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들이 다수 소개되어 있다. 운전기사의 결혼식 날 뒷좌석에 신혼부부를 태우고 노변이 직접 신혼여행지인 경주까지 운전하여 갔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다. 국정원 담당자와의 우정 이야기도 필자가 처음 접하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눈물 나는 장면은 잘 없더라. 부안, 지율, 파병, 송금, 탄핵, 연정 등의 고통스런 장면은 빠졌다. 허태열과 이인제의 악랄한 범죄행각이 잘 보고되어 있더라. 조중동한경오가 왜 주적인지 새삼 알게 한다. 조중동이 올려주면 이인제가 받아치고 이회창이 엄호하며 손발이 척척 맞더라. 민주주의를 물 말아 드시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둘이서 민주당 경선을 다 해버리는 거다. 이쯤 해서 빨갱이파동 한번 나와줄 때 됐지 싶으면 어김없이 조선일보에 딱 떠준다. 조기숙은 정동영을 밀었다가 나중에 합류한 것으로 아는데 의외로 많이 나왔더라. 문성근은 잘 안 보였다. 문재인은 마지막에 조금 나왔다. 유시민은 좀 거슬렸다. ‘정치하지 마라’는 말은 유시민에게 던져준 말일 터이다. 유시민은 아직도 노무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왜 많은 사람이 노무현에게 빠져드는지 유시민은 잘 모른다. 일단 지능이 떨어진다. 치매인지는 모르겠다. 공감능력이 없다고 하면 맞는 표현일지도. 이광재, 안희정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노무현의 진심 근처에 가지 못했다. 외로웠다는 말이다. 엄마가 없는 아이는 결코 울지 않는다. 엄마가 근처에 있기 때문에 아기는 우는 것이다. 서러워서 우는 것이다. 엄마가 있는데 그럴수록 서럽다. 그것이 아기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아기는 엄마가 없어서 운다.’는 당연한 생각은 당연히 틀렸다. ‘엄마가 없다.≫무섭다.≫운다?’ 천만에. 당신이 부족민 아기라 치자. 엄마가 없다. 운다? 호랑이가 물어간다. 아기의 울음은 숲속의 맹수를 불러들일 뿐이다. 아프다고 우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개는 아파도 울지 않는다. 썰매개는 발을 다쳐 피를 흘리면서 악착같이 무리를 쫓아간다. 왜인가? 늑대나 개나 인간이나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끊임없이 이동하며 사냥하는데 무리에서 뒤처지면 죽음이다. 무리에서 버려질까 봐 두려워서 개는 다쳐도 내색하지 않는다. 마찬가지 인간은 엄마를 잃었을 때 울지 않는다. 반대로 엄마를 찾았을 때는 서럽게 서럽게 운다. 아기의 울음은 엄마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엄마를 믿기 때문에 우는 거다. 헛똑똑이 지식인들의 오해다. 노무현의 눈물을 엄마 잃은 아기의 울음으로 착각한다. 그 반대다. 아기는 엄마가 있어야 운다. 엄마를 찾았을 때 대성통곡한다. 인간 존재의 깊은 부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유시민들은 오해한다. 당연히 노무현을 오해하고 한국인들을 오해한다. 인간에게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어떤 이유로 그 선을 넘어버렸다면? 이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목표 같은 것은 없다. 성공한 대통령이 노무현의 목표였을까? 아니다. 성공 따위는 해서 뭣하게? 대통령이라면 인간으로서는 오를 만큼 올랐다. 목표가 사라지고 허무해진다. 박근혜처럼 ‘무위의 삶’을 살게 되는 거다. 당선이 목표이고 그다음은 없다. 그래서 미국은 재선의 영광을 누릴 기회를 준다. 그래야만 열심히 한다. 성공한 대통령? 웃긴 소리다. 당선이 성공이다. 아직도 ‘실패한 노무현’ 운운하는 쓰레기들이 주변에 널려 있지만 잊자. 진보주의 이념의 달성? 개소리다. 진보해서 뭣하게? 대통령이 되어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거 많겠지만 그거 소인배 마음이다. ‘정은이놀이’ 말이다. 전차 수백 대 원산해변에 모아서 화력시범 해보고, ICBM 쏴보고 싶고. 그거 어린이의 치기다. 정은이 꼬마는 아직 어른이 못된 것이다. 노무현은 무엇을 원했을까? 이런 이야기를 할 때 필자가 늘 써먹는 것이 있다. ‘벙어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말하는 사람.’ 그것은 심리적인 족장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쩌겠는가? 엄마도 벙어리고 아빠도 벙어리다. 형도 벙어리고 동생도 벙어리다. 죄다 벙어리뿐인 마을에서 당신만 유일하게 말을 할 수 있다면? 운명적으로 그 상황에 몰리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노무현이다. 국민은 벙어리였다.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한다. 맹랑한 좌파들이 ‘니들이 하고 싶은 말을 내가 대신 해줄게.’ 이러면서 벼라별 개수작을 다 늘어놓지만 번지수를 잘못 짚는다. 인간의 본질은 권력의지다. 사탕을 주랴? 빵을 주랴? 떡을 주랴? 휴가를 주랴? 주 5일 근무제 주랴? 정규직 주랴? 절대 말하지 않는 게 있다. 아, 그 마이크 넘겨달라고. 한경오들이 뼛속까지 비열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 필요 없고 그 마이크 넘기라니까. 절대 마이크 안 넘긴다. 그래서 노무현이다. 본질은 권력이다. 노무현이 간 길은 민중의 권력의지다. 빵은 됐고, 떡도 됐고, 사탕 필요 없고, 그 권력을 내놔라. 이거다. 그래서 비극은 예정된 거다.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벙어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말하는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 그것은 신 앞에서의 단독자다. 오직 신과 대화한다. 노무현 행동은 신에 대한 행동이다. 유서에서 ‘운명’이라고 표현한 그것 말이다. 노무현은 신에게 질문을 던졌고 문재인은 답했다. 노무현의 모든 행동이 엄마 앞에서 우는 아기의 질문임을 알아야 진실이 보인다. 엄마 없는 아이는 울지 않는다. 그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엄마가 있고 엄마를 믿기에 질문을 한다. 반대 포지션에 서는 자 있다. 그들은 ‘니들이 원하는 게 뭐야? 맞춰서 답해줄게.’ 이런 마음이다. 그들은 우는 자가 아니다. 질문하는 자가 아니다. 답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의도에 맞추어 행동한다. 대중에게 아부하는 3류 지식인. 아부하는 지식인과 이끄는 족장은 눈빛이 다른 거다. 지식인은 대중이 원하는 것을 주고, 족장은 그 지식인 포지션을 빼앗는다. 둘은 전혀 다른 지점을 보고 있다. 유시민들은 대중에게 아부하는 사람이다. 국민이 원하는 것을 찾아서 해주려고 하는 사람이다. 필자가 이덕일, 김훈, 강신주, 법륜, 혜민 등 명성을 탐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절대 노무현을 이해하지 못한다. 180도로 다르다. 보통은 묻는다. ‘국민 니들이 원하는 것이 뭐야?’ 자신이 답할 마음으로 묻는 것이다. 답하는 자 포지션에 서면 이미 글러 먹었다. ‘니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해줄게.’ ‘내가’에 주목해야 한다. ‘왜 니가 해주는데?’ ‘왜 너는 주는 자이고 나는 받는 자인데?’ 머슴이 주인에게 뭐를 해준다고? 주객전도다. 노무현은 그 엘리트의 마이크를 빼앗아 국민에게 넘긴다. 해주는 것은 없다. 거꾸로 국민이 정치꾼들에게 되물어야 한다. 니들 먹물들이 원하는 게 뭐야? 명성? 평판? 권력? 돈? 한경오들은 명성과 권력을 탐한다. 고약하다. 마이크를 독점하는 권력 말이다. 그들은 엄마가 없어 울지 않는다. 노무현에게는 엄마가 있어서 바락바락 운다. 믿기에 운다. 누구를? 그것은 신이기도 하고 민중이기도 하고 국민이기도 하고. ### 과거 글입니다 ### 노무현은 밑바닥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이 배운 사람들 사이에도 섞여본 사람이다. 밑바닥 세계의 갸륵한 본심과 지식 세계의 비정함을 동시에 맛본 것이다. 이 세계의 양 극단을 경험했다. 가장 낮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세계까지 가로지르기!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특별한 생각을 품게 된다. 독자 여러분이라도 그렇다. 지구상의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혼자만 경험했다면? 에베레스트 정상에 첫발을 내디딘 노르가이와 힐러리처럼, 인류 최초로 달을 밟았던 암스트롱과 올드린처럼!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이 있다. 처음 서구를 방문했던 서유견문의 유길준이나, 미국 교민들을 보살폈던 선각자 안창호처럼. 그 위치에 서면 종교의 지도자와 같은 소명의식을 가지게 된다. 무슨 일이든 민족 단위로 생각하고 인류 단위로 생각하게 된다. 신 앞에서의 단독자다. 신의 완전성을 기준으로 사고한다. 자신을 운명적인 존재로 여긴다. 사명을 받은 사람이다. 노무현에게 그것은 '족장의식'이다. 벙어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과도한 책임감과 결벽증 말이다. 장애인들은 기본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앞 못 보는 사람에게 뜨거운 물을 찬물이라고 말했다가는 어떻게 되지? 농담이라도 위험하다. 벙어리들은 의사소통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가벼이 거짓말을 섞지 않는다. 보통사람에게는 장난이지만 장애인에게는 목숨을 거는 일이 된다. 노무현의 밑바닥 경험은 장애인 체험과도 같다.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쉽게 목숨을 거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타락해 있지만 진정한 리더를 만나면 변한다. 그 밑바닥 세계의 본심을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특별한 인격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족장의식이다. 과도한 책임감과 과도한 결벽증, 과도한 미안함을 지니게 된다. 약간의 의심하는 눈초리도 견디지 못한다. 타인에게 조금만 피해를 끼쳐도 어쩔줄을 몰라한다. 그런 세계가 있고 또 그런 사람이 있다. 지식계급의 시스템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선의를 용이하게 증명할 수단이 있다. 밑바닥 사람은 그렇지 않다. 배를 가르는 방법 외에는 자신의 결벽을 증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결벽증이다. 밑바닥 세계의 결벽성이야말로 큰 에너지가 된다는 사실을 포착한 사람이라면? 특별한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밑바닥 사람들 대부분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비굴하고 야비하며 천박하다. 쉽게 거짓말을 한다. 언제고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도 진짜를 만나면 완전히 변한다. 전혀 딴 사람이 된다. 목숨을 걸고 맹세하며 그 맹세를 끝까지 지켜간다. 그들이 현재 위치한 낮은 자리가 있고 올라가고 싶은 높은 세계가 있다. 그 둘 사이에 낙차가 크다. 약간 올라도 크게 얻으니 민중의 에너지가 된다. [2009년] ###
엘리트들은 장교로 시작하므로 많이 올라가도 조금 올라간 것입니다. 더 올라갈 고지가 있습니다. 이등병은 조금 올라가도 많이 올라간 것입니다. 2년만 버텨도 병장 달고 하느님과 동기동창입니다. 유시민은 장교로 시작했기에 별 달려면 아직 멀었지만 노무현은 이등병으로 시작했기에 이미 하느님과 동기동창이 되어 있습니다. 엘리트는 더 올라가기 위해 자기 생각을 표현합니다. 노무현은 이제 더 올라갈 곳이 없으므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대신 표현합니다. 노무현은 민중의 권력의지를 엘리트들에게 전달하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통역은 자기 생각을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엄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재인이 틀리게 말해도 통역은 고쳐서 외국정상에게 말해야 합니다. 정상회담장에 들어간 통역의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무현은 민중과 엘리트 사이에서 통역이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통역자가 완벽한 통역을 위해서는 자신을 죽여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의 진심과 온전히 함께 하시는 것이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