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민주화 되었으나 짜르 푸틴의 제정은 지속된다. 겉으로 민주주의 흉내는 내었으나 속은 썩어문드러졌다. 더 암담한 것은 희망의 부재다. 푸틴이 물러난다한들 뾰족한 수는 없다. 야당은 더 썩었다. 아랍의 봄 이후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등이 민주화 되었으나 민주주의는 뿌리내리지 못한다. 한국도 처음엔 그랬다. 해방 직후 미군정청에 등록된 정당의 수는 344개였다고. 지금은 양당제로 가닥을 잡았다. 그때 그시절, 사람들은 말했다. 정당이 난립한 이유는 한국인 특유의 모래알 근성 때문이라고. 한국인은 원래 단결이 안 되는 종족이라고. 이런 말을 지어낸 장본인이 누구인지는 알 것이다. 박정희 반역자다. 군부독재를 정당화 할 목적의 속임수. 푸틴이 러시아를 통치하는 논리도 그렇다. 독재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장차 민주주의가 싹틔울 가능성을 짓밟는 일이다. 제 발로 민주주의 씨앗을 짓밟아놓고 말한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이 나라는 풍토가 척박해서 민주주의가 안 된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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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문제는 세력의 부재에 있다. 세력이 없는 이유는 정당정치의 근본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정당정치가 작동한다면 이명박의 실정은 심판되어야 하고 정권은 교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안이했다. 안철수류 배신자들의 정치혐오 선동에 속아넘어갔다. ‘정치? 필요없어. 정당? 필요없어. 무소속이라도 상관없어.’ 나라는 정치인보다 왕자와 공주가 더 잘 다스리는 법이지. 왕자 하면 안철수. 공주 하면 박근혜. 정치의 근본은 신뢰다. 문제는 그 신뢰가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본질을 망각하는 데 있다. 어떤 사람을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거짓이 활개치지 못하는 투명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신뢰다. 서로 의심하고 견제하는 시스템이 정치다. 착각하는 사람 많다. ‘왜 의심해? 사람을 믿어야지. 믿으면 되잖아. 믿음의 정치! 좋잖아.’ 말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가족과 친구 뿐이다. 조선왕조 500년을 말아먹은 것은 환관과 외척이다. 박근혜 정치는 전형적인 환관정치에 외척의 발호다. 사적인 인맥을 동원한 것이다. 윤창중 같은 쓰레기는 딱봐도 쓰레기다. 여야를 떠나 누구나 동의한다. 그런데도 빈 집에 혼자 사는 어떤 여자는 임명을 강행했다. 왜? 정치인은 원래 약점있는 인물을 좋아한다. 약점없는 인물은 대통령에게 대든다. 맞먹으려 든다. 꼬장꼬장해서 말을 안 듣는다. 부담스러운 것이다. 김대중과 김종필의 관계, 노무현과 고건의 관계는 서로 거북한 관계였다. 서로 조심스러운 관계였다. 의심하고 견제하는 관계였다. 그런데 그게 싫은 거다. 그냥 편한대로 하겠다는 거다. 애도 아니고 말이다. 왜일까? 콤플렉스 때문이다. 청와대 박씨는 독재자 딸로 정통성이 없다는 약점이 있다. 국내에서는 통할지 모르나 외국에 나가면 개망신이다. 박근혜는 외교로 망한다고 필자가 무수히 말했던 것이 이유있다. 박근혜도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뻔히 알면서 오기를 부리는 것이다. 원래 약점있는 사람은 약점있는 사람을 쓴다. 그래야 편하기 때문이다. 약점있는 인물일수록 의지할 사람은 대통령밖에 없다. 정통성에 약점있는 대통령과, 야당에 찍혀 약점있는 윤창중과, 어리버리하다가 여당에도 찍힌 윤진숙이 서로의 약점을 틀어쥐고 서로 의존하겠다는 거. 짐승의 생존본능. 썩어도 아주 썩은 인물만 골라쓴다. 버릇 치고는 못된 버릇이다. 이 버릇은 오래 간다. 박근혜가 사람이라면 이 정도 선에서 망신을 끝내야 한다. 앞으로 잘할 가능성은 없다. 서로 의심하고 견제하는 시스템을 부정해서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글자 아는 사람 치고 독재자 딸 밑에서 종노릇 할 사람없다. 해방직후 미군정청에 등록된 344개의 정당이 지금의 여야로 줄어든 것은 그만큼 신뢰라는 자산이 축적된 결과다. 60년 걸렸다. 서로 의심하고 견제하는 가운데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는 시스템을 건설해온 거.
그러나 신용수렴에 의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왕조시대로 퇴행했다. 국가증발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그리고 당분간 더 잃도록 예정되어 있다. 역사의 법칙대로다. 선진국들도 다들 버벅대는 판에 한국만이 특별히 잘나가는 것을 세계사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식이다. 꼴등이 벼락치기로 중위권까지는 잘 가다가 막판에 보기좋게 나동그라지는 코스. 역사의 맥박이 있다. 치고 나갈때는 연어가 폭포를 뛰어오르듯이 단숨에 천장을 뚫어야 한다. 한국은 머뭇거렸다. 욕망의 동기부여로 작동하는 국가에서 존엄의 동기부여로 작동하는 국가로 단번에 환골탈태해야 한다. 그러한 기세는 대개 인구이동과 관련이 있다.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갈급하는 욕구에 의해, 한여름 소나기 내릴 때 먹장구름 모이듯이 단번에 에너지가 응축되는 것이다. 한국의 인구이동은 끝났다. 기세도 꺾였다. 북쪽으로 뚫고 서쪽으로 열어 사람을 교통하지 않는 이상 한국에 희망은 없다. 그냥 평범해져버렸다. 하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세계를 발견한 일 조차 없으니. 식민지에 분단에 독재에 주눅든 꼴통들에게는 지금 이정도만 해도 감지덕지겠으니 말이다. 세계를 꿈꾸어 보지도 않았을테니 말이다. 그렇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그들의 눈앞을 무엇이 스쳐지나갔는지도 모른다. 천금의 기회가 왔다가 스쳐지나갔는데도 모르고 눈만 꿈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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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희망은 사라졌으나 세계의 희망은 계속갑니다. 한국을 특별히 구원할 필요는 없으나 인류를 구원할 필요는 있습니다. 한국에서 잃은 것을 세계에서 찾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안에서 잃은 것을 밖에서 찾는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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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잃은 것을 세계에서 찾는 수 밖에 없습니다."
갈릴리에서 희망없던 한 사람이 세상의 빛이 되었다.
왕궁을 박차고 나왔던 멍청한 왕자가 세상의 깨달음이 되었다.
물레나 잣고 있던 한 노인이 세상에 평화의 낳음이 뭔지 알려주었다.
버스 뒷구석에나 앉아 있어야할 흑인 여성이 제자리를 모르고 금지된 곳에 앉으며 자유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찌질한 것을 갖고 박터지게 싸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위해 발걸음을 내뎌라.
그게 대승이고, 진리고, 빛이고, 일의고, 깨달음이고, 낳음이고, 자유고, 해방이고, 창조다.
답답해 하지 마라!
갇힌 사람은 툭 터진 세상에 살면서도 갈곳이 없지만,
열린 사람은 강제로 가두어둔 감옥에서도 한없는 자유를 누리는 법이다.
그것밖에 안되니 말해서 더 뭣하리!
단지 안 밖 인데!!
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