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는 자연에 존재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처음에는 벼락을 병에 가두어 이용하려고 했다. 프랭클린이 비오는 날 무모한 실험을 강행하여 피뢰침을 발명했지만 행운이 따랐다. 프랭클린의 실험을 재현하려 한 많은 과학자들이 벼락맞아 죽었음은 물론이다. 전기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유도전류의 발견 덕분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전자기의 방향성이다.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기다. 힘은 자연에 넉넉하게 있지만 일정한 방향으로 통제할 수 없다면 허무하다. 힘에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할 때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된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결국 힘을 통제하는데 따른 문제이다.
힘과 그 힘에 대항하는 안티 힘의 대결구조에 따른 계의 통제원리가 자연의 진보원리다. 이 구조를 어떻게 사회의 발전에 반영시킬 것인가이다. 힘에다 방향성을 부여할 때 거대한 진보는 일어난다. ### 착취, 독점, 억압, 인권유린 등의 구태의연한 19세기 언어로는 21세기의 현실을 옳게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감상에 호소하는 봉건언어를 버려야 한다. 마르크스의 실패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결구도에 골몰하느라 객관화, 과학화 하지 못한 것이다. 예컨대 이런 거다. 왜 역사는 노예제≫소작제≫자작농으로 발전했을까? 각성한 농민이 투쟁한 결과일까? 천만에. 노예제가 더 비용이 많이 먹힌다. 소작을 주는 것이 더 지주에게 유리하다. 자영농에게 세금을 받는게 더 국가에 유익하다.
왜? 농사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노예제는 봄에 파종하고 가을에 수확할때까지 농민이 할 일이 없다. 많은 손이 가는 한국식 농경은 농업이 고도로 발달한 결과다. 미국에서 흑인을 동원한 노예노동이 근대까지 존재했던 이유는 면화수확철에만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흑인 노예들에게 한국식으로 모내기를 시킨다면 어떨까? 효율은 극도로 떨어진다. 한국식 농경이라면 차라리 소작을 주는게 낫다. 고도 노예제에서 중세 농노제 혹은 근대 자작농으로 발전은 순전히 농업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또 농기구를 생산하는 야금기술의 발전과도 관련이 있다. 제대로 된 철제 농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비효율적인 농경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최대한 많은 농토를 확보하고 아주 단순한 형태의 원시농경을 했기 때문에 노예제가 기능했던 것이다. 무엇인가? 의사결정이다. 노예는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다. 만약 노예가 의사결정을 하면 구조론의 원리에 따라 권리가 생기므로 소작농이나 계약제로 변한다. 노예가 구실을 대어 조건을 걸기 때문이다. 노예가 기승전결 구조 중에서 기 포지션을 잡고 승전결 포지션을 지배하게 된다. 이 경우 노예가 주인을 엿먹이는 많은 방법들이 발명되므로 이러한 의사결정구조가 없는 단순한 형태의 원시농업에만 노예를 쓸 수 있다. 여기서 공식! 의사결정량은 권리량과 비례한다. 노동자가 많은 의사결정을 할수록 많은 권리가 생긴다. 그러므로 인구가 증가하여 적은 농토에서 많은 수확을 기대한다면 노예가 해방될 수 밖에 없다. ◎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총 의사결정량에 비례한다. ◎ 노동자의 의사결정 총량은 권익총량에 비례한다. 무엇인가? 포드자동차의 포드가 증명했듯이 착취, 저임금, 가혹한 근로조건은 자본가에게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 주는가? 아니다. 오직 후진국의 자본가에게만 이득을 준다. 원시적 생산구조일 경우만 적용된다. 기술이 고도화 하고 선진국에 근접할수록 노동자를 착취하는 낡은 방법은 자본가에게 손해가 된다. ◎ 기술발전≫노동자의 의사결정량 증가≫노동자 권익증가 관리직이 생산직보다 많은 임금을 받는 이유는 관리직이 더 많은 의사결정을 하고 그에 따라 더 많은 권리가 생기며 이 권리들을 악용하여 회사를 엿먹일 수 있는 다양한 배임과 횡령의 방법들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생산직은 배임과 횡령이 불가능하므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대항해야 하는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동학농민전쟁만 해도 그렇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 때문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구태의연한 사고다. 조병갑의 후손인 조기숙 교수가 해명한 바와 같이 당시 동학의 투쟁은 관리의 학정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농민의 발언권 확대 때문이었다.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른 농민의 권익신장이 투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옛날에는 밭벼를 재배했기 때문에 만석보도 필요가 없었다. 무엇인가? 세상의 발전법칙은 힘과 그 힘에 대항하는 안티 힘의 대결구조를 만들어 균형을 이룸으로써 계를 통제가능한 상태로 조직하는데 있다. 만약 대항하는 힘이 없으면 내전을 벌이는 등의 자해행위로 인류는 어떻게든 그 힘을 만들어 낸다. 인간이 전쟁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는 자연의 법칙이다. 노동절의 의미는 그 이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통제불가능한 자본의 힘을 인간이 마침내 발견했다는 거다. 인식하지 못하다가 겨우. ‘어 힘이 있었구나!?’하고 그 존재를 포착한 것이다. 갑자기 대두된 위험한 힘의 존재를 모르고 방치하다가 얼떨결에 그 힘에 휘말려서 침략전쟁 혹은 내전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 힘을 통제하는 안티 힘을 만들어 그 힘을 적절히 통제할 것인가다. 역량에 달려 있다. 미국의 남북전쟁만 해도 노예해방은 내걸은 구호이고 실제로는 갑작스럽게 대두된 힘의 존재에 화들짝 놀란 남부 시골사람들이 그 힘을 통제할 의도로 총을 든 데서 촉발되었다. 이것이 진실이다. 남군이 먼저 중간지대의 경계주를 노예주로 바꿀 의도로 도발을 감행하고 북진했다는 점을 알아채야 한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감상주의를 버리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자는 것이다. 감상주의로 가면 적개심을 고취하게 되고 그 경우 그 힘을 역이용할 수 없게 된다. 무조건 힘을 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힘은 기술의 진보에서 나온다. 그 기술의 힘은 노동자의 총 의사결정량을 증가시킨다. 그러므로 자본의 힘은 역설적으로 노동자의 힘을 증대시킨다. 그러나 여기서 시간차가 발생한다. 자본의 힘이 증대되었는데 노동자의 힘이 균형을 이룰만큼 증대되지 않으면 온갖 혼란, 모순, 전쟁, 자해 등이 일어나서 혼란에 빠져버린다. 남북전쟁이나 대공황이나 양차세계대전은 이에 따른 구조적 필연이었던 것이다. 무작정 자본의 힘을 반대하다가는 거기에 대항하는 노동자의 힘까지 같이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어느 한 쪽의 힘이 증대되면 반드시 그 힘에 대항하는 반대쪽 힘을 증대시켜 균형을 맞추어야 하며 이것이 자연의 필연법칙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포드주의는 자본가에게만 유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노동자에게도 이득이 된다. 거기에 걸맞는 투쟁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자본의 힘을 적대하다가 모든 기술의 진보를 적으로 규정하여 적에게 유리한 판구조를 만드는 것은 진보가 노상 저지르는 전략적 판단미스다. 무작정 부동산을 반대하다가 새누리당의 영구집권 토대로 만들어준 것이 그러하다.
벼락이 전기라는 사실은 프랭클린이 증명했다. 벼락은 통제되지 않는 난폭한 힘이다. 자본의 힘은 벼락과 같다. 그러나 유도전류는 안전한 힘이다. 충분히 통제된다. 방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방향성을 획득하는 순간 난폭한 자본의 힘은 포드자동차의 임금상승으로 이어진다. 물론 포드의 노동자에 대한 온정주의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유도전류와 같은 방향성을 포착하는데 성공하는가이다. 통제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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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힘과 그 힘을 통제하는 시스템 간의 부단한 대결과정입니다. 힘을 통제하지 못하면 반드시 내전이나 전쟁이 일어납니다. 힘을 통제하면 팽팽한 긴장상태가 되며 꼴통들은 그 긴장을 혐오하기 때문에 차라리 전쟁하자는 식이 됩니다. 남녀간에도 그러한 힘의 대결구조는 존재합니다. 그 팽팽한 긴장을 그 자체로 완성시키는 것은 미학입니다. 힘을 완벽하게 잡아가두었을 때 그 안전해진 상태를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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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이 부시부자한테 뻑떱칠때, 민주당은 오바마라는 보석을 발견합니다. 흑인 인텔리.
비주류와 주류를 넘나서는 진보주의.
아직도, 변방인 대한민국에선, 제3의길도 우경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주류와 비주류를 함께 갖춘
김대중과 노무현이라는 엘리트를 외면합니다. 제일외면한건, 우파가 아니라, 좌파지식인들. 노무현이 낙담한것도 후자쪽입니다.
자본, 혹 욕망자체에 겁이 나서, 잔뜩 움츠립니다. 감히 욕망이라니요. 이 점잖은 세상에.
겁쟁이들은 물속으로 한발 넣기가 겁납니다. 실은, 옆에 있던 누군가는 물살에 휩쓸려갔습니다.
저걸 보라면서, 자신의 위축을 정당화합니다.
21세기 자본의 방정식은, 관계의 밀도입니다. 어떻게 관계의 밀도를 증가시키느냐에 따라
자본은 조절됩니다. 그건 정밀한 이자율의 조절. 교역의 확대. 개발툴의 보급. 무엇보다,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 변화.
자신안의 완전성으로 타인 혹 세상과 조응해야합니다. 창작은 그 조응방식에 따라 다변화됩니다. 마치 안테나가 EM wave에 반응하는 lobe diagram처럼.
날씬하게 싸이클 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가던 60 노인을 보고, 엘지에서 10년다니다 유학온 누군가가 묻습디다.
아니, 석양을 보면서 그저 웃더군요.
21세기 자본의 방정식은, 관계의 밀도입니다. 어떻게 관계의 밀도를 증가시키느냐에 따라
자본은 조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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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본의 방정식.
이거 책 제목으로 그만이네요.
멋진 통찰입니다!
너그가 이걸 알아^?^
"그 팽팽한 긴장을 그 자체로 완성시키는 것은 미학입니다.
힘을 완벽하게 잡아가두었을 때 그 안전해진 상태를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세포에서부터 우주단위에 이르기까지 확장되는 미학이 아니고 무엇인가?
긴장은 스트레스여!
후련하오
멋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