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자기 자신과 화해하라 구조론 방송국 게시판에서 가져옵니다. 의사결정은 ‘인지의신예’의 순서대로 가는 것이 정답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공자의 인이다. 인은 타자와의 공존 가능성이다.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예수는 사랑하라고 했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무턱대고 들이대다가는 싸대기 왕복으로 쳐맞는 수가 있다. 세상은 온통 악의로 무장한 적으로 둘러싸여 있다.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가? 인이 시작인데 인하기 쉽지 않다. 타자성의 문제다. 쉽게 이야기할 것은 아니고 잘 훈련되어 있어야 한다. 예수는 사랑하라고 했지만 목숨을 걸어야 사랑할 수 있다. 쉽게 나와도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기 때부터 인을 훈련해야 한다. 맨 처음 세상과 나 사이에 금을 긋는 훈련이 필요하다. 일단 나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타자라는 생각을 연습해야 한다.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적이다. 울지말고 겁먹지 말고 쿨 하게 받아들여라. 적진을 향해 씩씩하게 나아가라. 그러나 그것은 전쟁에서의 적이 아니라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적이다.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엄마도 적이고, 아빠도 적이고, 국가도 적이고, 신도 적이고, 나 자신도 적이다. 경계해야 한다. 순진하게 타인을 믿다가는 유괴범에게 납치 당하는 수가 있다. 아기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한다. 유태인은 아기에게 다른 사람을 함부로 믿지 않도록 단단히 훈련을 시킨다고 들었는데 사실이라면 그것도 끔찍한 이야기다. 친부모도 믿지 말라는 식이다. 완전성이 중요하다. 모든 의사결정의 궁극적인 근거가 된다. 아기 때는 우주가 작다. 자기가 보고 경험한 세계가 우주의 전부다. 그 거리는 사방 100미터 안쪽이다. 그 세계는 어린왕자의 별처럼 작고 완전한 세계다. 그렇게 자신이 책임질 범위를 최대한 좁혀놓고 그 안에서 완전성을 발견해야 한다. 공자는 자식이 아비의 잘못을 감춰주고 부모가 자식의 허물을 덮어주는 데서 인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의사결정의 범위를 좁혀놓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적대의식은 자신을 용서하기 않기 때문이며 그것은 자신의 허물을 들추는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모욕당했을 때, 창피당했을 때, 망신당했을 때를 기억하고 그렇게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 거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타인을 갑으로 놓고 자신을 을로 놓는 순간 이미 망한 것이다. 아기 때는 자신이 부러움없는 왕이어야 한다. 그래야 씩씩할 수 있다. 세상이 모두 타자이므로 나는 누구에게도 망신당하거나 무시당할 수 없는 존재여야 한다. 소가 개가 나를 무시했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 망신당했다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집단을 자신의 주인으로 놓고 자신을 집단의 하인으로 놓은 것이다. 관계설정이 틀려먹었다. 주인님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니 이는 자신을 징벌하는 것이다. 이를 트라우마라 하고 열등의식이라 하고 콤플렉스라고도 한다. 자신이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어야 살 수 있다. 박근혜는 제 부모를 죽인 한국을 증오하며 이는 역시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행동이니 여전히 자신을 징벌하고 있다. 자신이 소속된 대한민국을 괴롭히는 방법으로 말이다. 이명박은 상고출신인 자기를 미워한다. 자기를 미워하는 자가 선물공세로 자신에게 아부하는 법이니 부자가 되려 하고 미녀를 사귀려 하고 출세하려고 하는 방법으로 자기에게 선물공세를 편다.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체의 행동이 그러하다. 내가 왕이어야 한다. 세상이 내게 잘 보여야 한다. 내가 세상에 잘 보여야 할 이유는 없다. 부를 탐하고 명성을 탐하고 명품을 탐하고 용모에 투자하는 사람은 아직 자기 자신과 화해를 못한 사람이다. 공자는 부모가 자식을 감싸고 자식이 부모를 감싸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당신이 당신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겠다. 자신이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려면 일단 세상 모두가 타자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안에서 완전성을 발견해야 한다. 자신이 완전한 존재이면 남에게 잘 보일 이유가 없다. 출세도 성공도 그 어떤 것도 남에게 잘 보이려는 행동인 즉 노예의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왜 그대는 노예가 되었는가? 의사결정에 있어서 나와 타자 사이의 경계선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완전성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아부하려고 한다. 그 방법으로 세상에 아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은 파괴되고 만다. 먼저 자신의 존재 범위를 극단적으로 좁혀서 완전성에 이른 다음에 자신을 확대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의사결정범위를 무한히 확대하여 신에게까지 이른 다음에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예수의 소박한 가르침을 따를 수 있다. 그렇게 나와 신의 일대일에 도달하고 그 중간의 자질구레한 것들은 걷어치워야 한다. 국가의 논리, 부족의 논리, 집단의 논리, 패거리 논리, 가족의 논리까지 모두 잘라버려야 한다. 얼짱 만들어 나 자신에게 아부하고, 공부해서 가족에게 아부하고, 승진해서 회사에도 아부하고, 애국해서 국가에도 아부하고 오지랖 넓게 그러다보니 망가지는 것이다. 감당할 수 있는 것을 하라.
세상 모두가 적이고 타자이고 경계선 너머의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세상 모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자기편이라고 여긴다는 것은 곧 세상의 보흐를 받는다는 것은 곧 세상을 갑으로 놓고 자신을 을로 놓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순간 이미 의사결정은 망한 것입니다.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