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적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1) 일의성의 관점
공간의 동시성이 작용하는 상호작용의 세계, 게임의 세계, 양자론의 세계, 확률의 세계가 있다. 근대과학을 뒷받침하는 논리인 서구의 인과율과 구분되는 동양적 일의성의 세계가 있다. 원인이 결과를 결정하는 시간의 인과법칙이 단선적 사유를 요구하는 것과 달리, 축의 움직임 하나가 대칭된 둘을 동시에 결정하는 공간의 중첩성질이 보다 입체적인 사유, 비선형적인 사유를 요구한다는 점이 각별하다.
2) 상호작용 관점
공간의 엮임에 주목하는 점에서 게임이론은 동양의 주역이나 음양론과 아이디어와 같다. 중용의 밸런스 개념과 서구의 인과율을 하나로 통합하면 구조론이다. 서구와 동양의 차이는 개인을 보느냐 집단을 보느냐다. 세상을 개인의 이기심이나 의지, 욕망, 노력, 정신력으로 보는 차별주의 관점이 아니라, 집단의 주도권을 다투는 게임, 상호작용, 밸런스, 팀플레이의 경쟁으로 보는 평등주의 관점을 얻어야 한다.
3) 진보주의 관점
근대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애덤 스미스의 사적 이윤동기 논리를 깨뜨리는 상호작용의 논리에 21세기의 희망이 있다. 2인 이상의 상호작용에서 주어지는 역할이 동기가 된다. 창의와 혁신 혹은 전쟁으로 외력의 작용이 내부의 균형을 깨면 상호작용구조에서 얻은 역할을 지키려는 복원력의 힘이 강자와 약자 사이에 동적균형을 이루어 집단을 계속 나아가게 한다. 이에 맞게 진보주의 이론을 바꾸어야 한다.
4) 에너지의 관점
에너지는 결따라 간다. 구조론은 에너지가 진행하는 루트를 추적한다. 사물이 아닌 사건을 보고, 결과가 아닌 원인을 보고, 선수가 아닌 팀을 보고,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고, 기능이 아닌 일을 본다. 작은 것을 모으는 대신 큰 것을 대량으로 복제한다. 문제를 해결하여 없애는 대신 문제를 생산해 그 에너지 흐름에 올라탄다. 연역적 사유로 귀납의 환원주의를 극복하는 엔트로피의 비가역성에 도달해야 한다.
5) 엔트로피 관점 구조론은 창조설 및 원자론의 세계관과 대립한다. 창조설의 기반은 진화가 어렵다는 것인데 구조론의 모듈개념으로 보면 진화는 쉽다. 플러스는 어렵고 마이너스는 쉽다. 진화는 마이너스다. 뉴턴 이래의 원자론적 세계관 역시 세상을 작은 것의 집합으로 보는 점에서 기독교의 창조설과 같은 플러스적 세계관이다. 세상은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룬게 아니라, 큰 것이 복제되며 쪼개져 작은 것이 되었다. 6) 이중의역설 관점 - 긍정인가 부정인가 부정을 통한 긍정인가? 전근대가 세상을 절대성으로 보고 긍정하는 플라톤 이래의 본질주의 관점이라면 근대는 상대성을 강조하고 세상을 부정의 시선으로 보는 니체와 노자의 역설적 관점이다. 전자가 정설이고 후자는 역설이면 구조론은 이중의 역설이다. 긍정이되 부정을 거친 긍정이다. 하부구조만 보면 정설, 상부구조로 하부구조를 치면 역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한 줄에 꿰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보면 이중의 역설이 된다. 7) 동적균형 관점 - 질서인가 무질서인가 동적균형인가? 서구는 기독교와 플라톤에 의해 세상을 안정된 질서로 보았고 동양은 도교와 주역의 영향으로 변화와 무질서로 보았다. 질서는 정치적 권위주의를 낳았고 무질서는 예술가의 창의성으로 나아갔다. 구조론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유도하는 동적균형으로 본다. 답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무질서를 질서로, 확산을 수렴으로, 척력을 인력으로 바꿀 때 변화과정에서 얻어진다. 그냥 질서만 있는 상태는 에너지가 없다.
구조론은 근본적으로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선장은 바다를 보고 선원은 배를 봅니다. 서양은 개인을 보고 동양은 집단을 봅니다. 구조론의 관점, 구조론의 세계관을 얻지 못하면 백날 공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먼저 시각교정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구조론의 관점만 터득하면 세부적인 것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팀과 호흡을 맞추는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