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가 모든 것의 시작이다. 진리의 의미는 모두 연결되어 하나로 있다는 것이다. 하나이므로 인간이 개입하여 통제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므로 진리는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며 나의 끼어들 여지가 있는 것이다. 내가 끼어들어야 이야기가 된다. 진리와 나의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대단한 것이 있다고 해도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면 논외가 된다. 나와 일대일로 대칭을 이루고 상호작용할 수 있어야 진짜다. 구조構造는 얽을 구構 지을 조造다. 얽는 것은 공간이요 짓는 것은 시간이다. 얽는다는 것은 서로 붙잡는다는 것이고 짓는다는 것은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서로를 붙잡고 의지하여 일어난다. 이것이 진리의 대강이다. 불은 문득 일어나고 활활 타오르다가 결국은 꺼진다. 1회의 일어나고 타오르고 꺼지는 것이 사건이다. 그 사건의 불씨는 다른 곳으로 옮겨 붙는다. 그러므로 널리 망라하게 된다. 그것은 일이다. 세상은 일로 되어 있다. 이를 부정하는 관점이 있다. 세상은 알갱이의 집합으로 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진리를 부정한다. 알갱이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알갱이다.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집합이라는 말을 뒤에 붙인다. 더 어색해졌다. 일은 한 마디로 설명되는데 알갱이+집합으로 두 마디라면 이 둘을 통일하는 또다른 무언가를 필요로 하게 되니 이미 언어가 비루해졌다. 말이 어색하면 그게 사기다. 알갱이는 딱딱해서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나와 상관이 없다. 인간이 대상을 통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리가 아니다. 왜 이렇게 보는 바가 다른가? 일의 결말을 보기 때문이다. 호두나 잣이 딱딱한 것은 일이 끝난 뒤의 결과를 보기 때문이다. 호두나 잣이 열매맺는 과정은 딱딱하지 않다. 일이 끝난 지점을 보는 것이 귀납이요 일의 처음 시작점을 보는 것이 구조론의 연역이다. 안다는 것은 분류한다는 것이다. 시작점에 서야 일의 진행단계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진리는 하나이나 거기에 인간이 개입하고자 한다면 생성하고 전개하고 종결함에 따라 셋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자연의 에너지 생성원리다. 에너지는 처음 확산방향이나 수렴방향으로 바뀌어 한 방향으로 수렴될 때 통제된다. 그것이 엔트로피의 원리이며 구조론의 일의성 원리다. 에너지의 진행하는 방향성을 알아야 한다. 둘째는 인간의 의사결정원리다. 자연은 한 방향으로 수렴되는 에너지의 결을 따르고 인간은 역시 대집단의 세력전략과 소집단의 생존전략 중에서 의사결정하기 쉬운 쪽으로 의사결정하는 의사결정의 결을 따른다. 상대적인 집단의 사이즈에 따라 방향이 결정된다. 역시 인간의 모든 의사결정을 어떻게 한 방향으로 수렴시킬 수 있느냐가 의사결정의 요체이다. 환경이 양호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르다. 셋째는 구조를 복제하여 전파하는 미학원리다. 완전성 개념이 중요하다. 하나라도 빠지면 복제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만물은 서로를 붙들고 의지하여 일어나니 자체의 생명성이 있다. 어떻게 계속가는지가 중요하다. 정치든 경제든 역사든 자체의 동력이 있고 관성의 법칙을 따라 계속 가는 성질이 있다. 어떤 이상향에 도달하여 거기서 멈추는 법은 없다. 정치는 완벽하게 다스려지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경제는 모두가 만족할만한 부를 얻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계속 가야 한다. 음악은 이상적인 음악을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패션은 이상적인 디자인을 얻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일신하여 계속 가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다. 진리는 이 세 가지를 말한다. 어떻게 스스로를 생성하는가? 어떻게 인간이 받아들이는가? 어떻게 그것을 복제하여 전파하는가? 구조론은 다섯이니 여기에 둘을 더 추가할 수 있다. 구조론≫자연학≫사회학≫심리학≫양식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구조론이 모든 것의 벼리가 되고 갈피가 된다. 이를 수학, 물리학, 생물학 따위로 전개하면 자연학이다. 다시 그것을 인간사회로 가져오니 역사학, 정치학, 인류학 따위들이 사회학이 된다. 그 다음은 개인이 이를 어떻게 소화할 수 있는지가 규명되어야 하니 심리학이 마음의 구조와 깨달음을 논한다. 마지막은 문예사조이니 모더니즘이 정답이다. 굳이 분류하면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상업주의≫퇴폐주의라 하겠으나 본질은 모더니즘 한 가지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은 모더니즘의 도입부라 할 수 있다. 예술도 근본은 자연의 사실에 근거해야 하므로 모든 예술은 리얼리즘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을 규명한 다음에 적당히 인간의 욕망과 현실의 삶을 개입시켜 그것을 변주하니 곧 모더니즘이다. 나머지는 후방효과다. 세상이 잔혹하고 고통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어리광이다. 그런 말은 나도 판에 끼어들고 싶다. 나도 발언하고 싶다. 내게도 끼어들 빌미를 다오. 이런 거다. 이는 아직 판에 끼지 못한 노예의 관점이니 버려야 한다. 세상은 고통도 없고 삶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잔혹도 없다. 다만 멈추지 못하여 계속 가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의사결정이 한 방향으로 수렴된다면 그 대척점에 신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과 신은 서로를 붙들고 의지하여 일어난다. 인간이 신을 일으켜 세우는 만큼 신도 당신을 일으켜 세운다. 그것이 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진리를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사건에 개입하고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는 말이다. 구조론은 서로를 붙잡고 의지하여 일어서되 꼬리가 아니라 머리에 개입하는 관점이다. 단번에 진리의 머리를 틀어쥐고 사건에 끼어들어 발언하고 상호작용하며 계속 달려가는 거다. 대개 꼬리에 개입하려 한다. 귀납하려 한다. 원자론의 관점으로 본다. 군주에게 선택받는 수신의 관점에 선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다. 여인은 몸을 단장하고 남자의 선택을 받으려 한다. 학생은 성적표를 높이 들고 진학을 허락받으려 한다. 그렇다면 이미 망해 있다. 선택받으려고 하면 당신은 이미 을의 신세다. 귀납의 관점, 약자의 관점, 수신의 관점을 버려야 한다. 반대편으로 가서 진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혼자면 약하고 약하면 강자에게 선택받으려 하고 선택받으려고 강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수신제가를 하는 것입니다. 수신의 달인 제갈량은 혼자이므로 강족출신 오랑캐인 외톨이 강유를 후계자로 선택해서 결국 촉나라를 망쳤습니다. 유선이 멍청해서 40년간 장기집권한 것이 아니라 오랑캐 출신 강유가 원래 외톨이라서 한족 대신들과 어울리지 못한 것입니다. 박근혜가 아웃사이더만 끌어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새누리당 주류인 유승민 김무성과는 틀어졌습니다. 팀플레이를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기는 팀에 들어서 강해져야 합니다. 곧 죽어도 강자의 길로 가야 이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