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s.gd/7bO126 피그말리온효과니 바넘효과니 플라시보효과니 하며 무슨 효과나 신드롬이라고 하는 것들이 과연 제대로 된 방법론을 쓰고 있는가를 따져묻지 않을 수 없다. 모두 의도를 앞세우는 즉 ‘위하여’의 귀납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애초에 접근법이 틀렸으니 과학의 방법론이 아니다. 객관적이지 않다. 의도가 앞서면 곤란하다. 인간의 의사결정은 나와 타자가 대립하는 경계면에서 일어난다. 자기편인가 타자인가에 따라 정반대의 행동이 도출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상대적인 전략이 정해지는 것이며, 여기서 큰 틀에서의 방향성이 나와주는 것이며, 나머지는 이 전략에 연동되어 결정된다. 그러니까 의사결정의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익숙하면 세력전략을 쓰고 낯설면 생존전략을 쓴다. 피그말리온 효과란 교사가 관심을 가져주면 즉 상호작용을 늘려주면 공부를 만만히 보고 이기려고 하는 것이며, 반대로 밖으로 떠밀어 밀어내면 공부를 어렵게 보고 포기하는 것이다. 이길 자신이 있으면 도전하고 질 싸움은 회피한다. 도와주는 자기편이 있어야 한다. 무슨 효과니 현상이라는 것은 실험결과일 뿐이며 즉 피실험자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측면이 배제되어 있다. 이런건 가짜다. 데이터는 진실하나 배후의 함의는 왜곡되어 있다. 잘한다고 부추기면 더 잘하는 것은 사실이나 과학적인 방법은 아니다. 과학의 방법은 계를 정하고 압박하여 확산방향을 수렴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다. 한 방향을 바라보게 한 다음 내부에 심을 투하하여 결집시키면 통제가 가능해진다. 즉 피실험자가 자기통제에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목표를 주면 쉽게 목표를 달성한다.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것은 세상이 나의 적이냐 아니면 우리편이냐다. 적이라고 여겨지면 어깃장을 놓고 심술을 부리고 반항하는 것이다. 공부가 적이라고 여겨지면 당연히 공부를 하지 않는다. 이길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해결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교사가 격려해주면 달라진다. 환경이 우호적이면 세력전략을 쓴다. 쥐실험에서 정성들여 키운 쥐는 미로를 쉽게 찾았다. 환경을 자기편이므로 여유를 갖고 임한다. 홀대받은 쥐들은 환경이 우호적이지 않으므로 여유가 없다. 쉽게 포기해 버리고 다른 목표를 찾는다. 장기전을 할 수 있느냐다. 환경이 양호하면 장기전을 하고 환경이 나쁘면 단기전을 한다. 워렌버핏은 장기전을 한다. 밑천이 많기 때문이다. 단돈 500만원으로 주식을 한다면 단타를 친다. 내일까지 빚을 갚아야 하니까. 결론적으로 무슨 효과니 신드롬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귀납적인 방법을 써서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며 피실험자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스톡홀름 신드롬도 마찬가지인게 그들은 인질의 전략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인질도 본전을 건지는 자기전략이 있는 것이다. 세상이 납치범을 찬양하면 그들은 납치범을 비난하는 방법으로 마이크 잡으려 든다. 반대로 세상이 납치범을 비난하면 그들은 납치범을 옹호하여 마이크 잡는다. 마이크 잡는 본질은 똑같다. 각자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팻걸이라는 영화가 있다. 마지막에 소녀는 성폭행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당연하다. 그 방법으로 세상을 후려패는 것이다. 세상에 복수하는 방법이다. 가해자에게 복수한다고? 천만에. 니들 다 한 패잖아. 인질 피해자들은 가해자인 납치범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니들 다 한 패잖아. 세상에 복수하는 방법은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합리적이다. 정리하자. 교사가 학생을 격려하면 공부를 잘한다는건 개소리다. 설사 일부 맞다해도 과학이 아니다. 한의사가 헛소리하는 것과 비슷하다. 몸에 열이 많다니 이런 소리 하면 안 된다. 열이 많으면 모세혈관이 확장된 것이며 이는 피가 피부조직으로 몰려간 것이며 이는 체온이 내려간 것이다. 열이 많으면 열이 없는 것이다. 표면열이 많으면 내부열이 없는 것이다. 뒤집어보면 그게 그거 아니냐 싶지만 위험한 발상이다. 엄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의사의 방법이 먹힐 때도 있지만 그런 식으로 과학을 하면 안 된다. 효과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된다. 사건의 원인측에서 능동적인 관점에서, 주체적인 관점에서 곧 전략적인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피아구분을 하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닫힌계를 정하고 외부에서 스트레스를 가하고 내부에 심을 투척하고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높여주면 사람은 원하는대로 움직인다. 그것이 정답이다. 이는 과학적인 접근이다. 교사의 관심이 우연히 이와 맞아질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원하는 결과가 도출되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1) 공부가 적이 아니라 자기편이라는 점을 납득시킬 것. 공부가 적군이라고 여겨지거나, 공부보다 게임이 낫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집단에서 배척되었다고 여겨지거나, 곤란할 때 도움을 요청할 자기편이 없다고 여겨지거나, 자신의 행동에 상대가 반응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인간은 그것을 때려치운다. 다시 말해서 학생에게 공부는 집단에 기여하는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무엇인가? 공부라는 환경을 장악하는 것이다. 공부를 잘해서 남들에게 칭찬을 받는게 아니라 공부라는 환경 그 자체를 씹어먹어 버리는 것이 진짜다. 댓가를 제공하고 격려하고 지켜보는 것은 부담을 줄 뿐이다. 환멸을 느끼고 때려치우는 수가 있다. 땅주인이 제 농장을 관리하듯이 공부라는 환경을 집어먹게 하는게 맞다. 무엇인가? 내가 공부를 한다고 여기는 순간 이미 망했다는 거다. 공부는 타자가 된다. 나와 타자로 구분되는 순간 끝났다. 내가 진 게임이다. 고양이는 자기 영토를 순찰하는 습관이 있다. 개도 자기 구역을 지키려 한다. 공부라는 내 구역을 내가 지킨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공부라는 남의 구역에 잘못왔다면 도망친다. 뇌의 관점에서 보자. 생쥐가 사는 공간의 먹이나 담벼락이나 쥐구멍이나 이런 외부 요소들은 나의 바깥에 있는 타자일까? 아니다. 똥꼬가 가렵다거나 콧구멍이 막혔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나의 신체 일부인 것이다. 생쥐가 사는 공간이 생쥐의 몸뚱이다. 생쥐에게 주어지는 먹이도 생쥐의 심장이나 위장과 같은 신체일부다. 마찬가지로 공부도 내 손가락이나 내 발가락처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나의 신체 일부라면 당연히 그 신체를 잘 지배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 신체일부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당연히 도망치려고 한다. 신에 대한 태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신을 나 바깥의 타자라고 여기고 예배보는 자들은 모두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공부가 목표가 되면 당연히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스톡홀름 신드롬과 같습니다. 목표가 있으면 당연히 개겨보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집적거려보다가 흥미가 없어지면 패대기치는게 맞습니다. 공부라는 익숙한 내 구역에 무지라는 침입자가 몰래 들어와 있지는 않는지 감시하는게 정답입니다. 지식을 플러스 하겠다는 관점이 아니라 무지를 제거하겠다는 마이너스 관점이어야 합니다. 결벽증 환자가 손을 씻듯이 무지라는 바이러스를 퇴치하겠다는 관점이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