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라. 게시판에 공황장애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게 다 공부를 안 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연예인 중에 무려 40여명이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 한다.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보면 공부 안 한 티가 난다. 학창시절 농땡이 치던 애들이 끼를 살려서 연예인이 된 거다. 뇌는 부단히 정보를 요구한다. 필요한 정보를 주지 않으면 뇌가 화를 내는 것이 공황장애다. 가짜정보라도 상관없다. 아무러나 뇌에 정보를 주기만 하면 일단 수습이 된다. 그것은 종교의 방법이다. 지식이 있다고 해결되는게 아니다. 최신정보를 수시로 업데이트 해줘야 한다. 연예인들이 그것을 안 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뇌에게 알려줘야 한다. 아무 생각이 없는 일베충은 공황장애에 걸리지 않는다. 그 경우는 뇌가 정보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예인은 스타다. 뇌는 자신이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의 행동이 집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안다. 집단 무의식이 작용하므로 연예인의 뇌는 특별히 상황에 맞는 더 많은 정보를 요구한다.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공부하지 않으면 공황장애에 걸린다. 무작정 공부할 이유는 없다.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는 알아야 한다. 일전에 누가 조직 스토킹이라는게 있는데 하며 질문하길래 검색해 봤는데 참으로 가관이다. 이 사람들도 공부를 안 한 것이다. 뇌가 정보를 요구하는데 대응하지 않으면 뇌가 쓸데없이 정보를 자가생산하는데 그게 심하면 미친거고 약하면 불안장애고 빗나가면 망상장애다. 벽투시기가 어떻고 전파탐지기가 어떻고 해킹이 어떻고 하는 소리를 읽어보면 기본 상식이 없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해킹이 뭔지 모르니까 아무데나 해킹을 가져다 붙인다. 심리장애는 생각은 없는데 쓸데없이 관심은 많아서 생기는 병이다. 제 분수에 맞게 살면 치료된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이 사이트의 방문자들은 대개 한 가지씩 자기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가벼운 조울증 정도는 누구나 있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기분이 다운되어 있는 날 건드리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런거 있다. 누구에게나 문제는 있다. 사실은 다 같은 하나의 문제이다. 그것은 인생의 근본문제다. 문제가 있다는게 자랑거리일 수도 있으니 그것이 세상과 교섭하는 나의 창구가 되고 때로는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문제가 있으니 내가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답은? 그 상호작용을 해주는 것이다. 상호작용하면 해결된다. 실패는 상호작용을 못하는 막다른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답이 없는 쪽으로 자신을 몰아넣는다. 한발짝 들어서면 그 안에 또다른 세계가 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중증이 된다. 이제는 돌아나올 수 없다. 애초에 그 세계로 발을 들여놓지 않아야 한다. 좋은 세계로 가야 한다.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진 물음은 이렇다. 내가 이 우스꽝스런 세상에 빌붙어 살아있어도 좋다는 근거 말이다. 첫째 신은 있는가? 둘째 신을 만났는가? 셋째 나는 완전한가? 넷째 나는 만족하는가? 다섯째 내가 이겼는가? 이 물음들에 YES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숨쉬고 산다. 인생의 정답은 굽히지 말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계속하며 전진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신은 의사결정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특정 종교의 신 개념을 들이대면 피곤하다. 신은 모든 의사결정의 궁극적 근거가 되는 일자를 의미한다. 모든 의사결정이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가? 신이 없다면 곧 모든 의사결정이 한 방향으로 수렴되지 않는다면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일관되어야 합리적이다. 간단하다. 포개면 된다. 큰 의사결정 안에 작은 의사결정을 집어넣으면 된다. 밥 먹고 똥 싸는 것은 작은 결정이니 옳고 그르고 논할 일 아니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진리를 정면으로 상대하는 의사결정이어야 한다. 작은 것은 그 큰 과정 안에서 용해된다. 둘째 신을 만났는가다. 만나지 못하는 신은 필요없다. 기도하고 은혜를 베풀고 이런건 만나는게 아니다. 그것은 구경한 것이다. 일대일이 되어야 만난 거다. 주인과 노예의 만남은 없다. 주인은 노예를 만나지 않고 다만 부린다. 주인이 자동차를 만나는게 아니고 다만 탄다. 작가는 연필을 만나는게 아니라 다만 쓴다. 일대일의 대등한 관계가 아니면 만난 것이 아니다. 주체와 타자의 관계가 대등해야만 비로소 의사결정이 의미있다. 내가 손해볼 각오를 해야 의사결정이다. 안전한 상태에서의 의사결정이면 가짜다. 내가 다치고, 내가 깨지고, 내가 죽어야 의사결정이라 할 수 있다. 방귀를 뀐다는건 의사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밥을 먹었을 때 정해진 거다. 화장실 가는 것은 생리현상이지 의사결정 아니다. 신을 인식하고 신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신과 닮아야 한다. 그러므로 셋째 나는 완전한가를 묻게 된다. 개인은 불완전하나 집단의 진보는 완전하다. 머리가 좋거나 얼굴이 잘생겼거나 신체가 건강한건 의미없다. 완전성을 결정하는 것은 임무다. 차는 짐싣고 달려야 완전하다. 나의 완전은 집단의 완전성으로부터 연역된다. 집단은 진보할 때 완전하다. 그 집단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인간은 완전해진다. 상호작용하되 근원과 상호작용해야 한다. 말단을 건드리는 짓은 개도 한다. 그것은 세상을 흔들어놓지 않으므로 의미없다. 세상을 타격해야 한다. 세상에 긴장을 조성하고, 세상을 화나게 하고, 그렇게 세상의 반응을 끌어냄으로써 인간의 연주는 완전해진다. 세상이라는 악기에 손대지 않는다면 내 인격이 어떻게 고결하든 말든 완전하지가 않다. 연주하지 않는 완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소리내지 않는 종은 가짜다. 넷째 나는 만족하는가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불만족하는 존재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만족한다. 인간이 죽음을 겁내고 성공을 원하고 불평을 터뜨리는 것은 인간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밥만 주면 꼬리치는 개처럼 쉽게 만족하는 존재라면 매우 곤란하다. 인생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지만 만족하지 않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만족스럽다. 북유럽 나라들이나 부탄왕국이나 북한주민들은 만족하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들의 만족을 비웃을 뿐이다. 내게는 이 말 많고 탈 많은 헬조선이 전혀 만족스럽지 않으므로 만족스럽다. 둔감한 악기보다는 예민한 악기가 좋다. 메갈리아 사태라면 즐겁다. 좀 그래야 한다. 티파니가 욱일기를 어쩌고 이런거 있어조야 한다. 조용한 곳은 공동묘지다. 그것은 죽음의 공간이다. 세상은 시끄러워야 한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보다 시끄러운 정오의 나라가 만족스럽다. 결국 상호작용이다. 물은 흘러야 만족하고 불은 번져야 만족하고 인간은 상호작용해야 만족한다. 술 먹고 헤벌레 하는 것은 만족하는 척 하는 도피행각에 불과하다. 북유럽은 에너지가 없다. 그들은 시든 꽃과 같다. 북한주민은 정말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더 의미가 없다. 눈에 힘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건방도 있고, 긴장도 있고, 예리함도 있고, 섬세함도 있어야 한다. 다섯째 질문은 내가 이겼는가다. 결론적으로 나는 신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이겼다. 무엇인가? 졌기 때문에 다음 세대로 이어가는 연결이 있는 것이다. 계속 일을 이어가는 거다. 쉽게 이긴 자가 쉽게 진다. 쉽게 명문대 가고, 쉽게 좋은 직장 잡고, 쉽게 좋은 파트너와 맺어져서 행복하게 무덤으로 직행하는 그대는 패배자다. 당신의 의사결정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과 맞서 깨진 증거를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이 반응하지 않는다. 어떻게 세상의 반응을 끌어낼 것인가? 이것이 인생의 근본문제다.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해도 본질은 같다.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문제다. 첫째 신이 있어야 한다. 당신의 모든 의사결정이 단 하나의 지점을 바라보고 정렬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의사결정이 일관될 수 있다. 그럴 때 공황장애이든 불안장애이든 극복할 수 있다. 둘째 신을 만나야 한다. 그것은 운명의 순간에 운명적인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시켜서 서울대 간다? 남들이 알아주는 미인과 결혼한다? 이런건 의사결정이 아니다. 주변의 이목이 당신을 대리한 거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손에 꼭두각시로 놀아난 것이다. 당신이 인생 전부를 걸고 운명적인 의사결정을 했을 때 당신은 신을 만났다. 그 운명의 현장에서 당신의 인생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사결정이 바라보는 그 한 지점을 당신이 변화시켜야 한다. 그렇게 인간은 신을 호출한다. 이 방법으로 신을 불러냈다면 이후 당신의 모든 의사결정은 그 한 지점을 바라보며 거기에 연동되어 일제히 결정된다. 그렇게 당신은 시험에 든다. 그 시험 통과해야 한다. 연동되어 결정되므로 불안장애고 공황장애고 없어지는 것이니 뇌가 즐겁게 상황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뇌의 손에 악보가 쥐어쥐기 때문이다. 악보없는 즉흥연주로 뇌를 당황시키지 말라. 뇌의 대비가 있을 때 당신은 완전해진다. 그럴 때 당신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잡다한 사건은 순식간에 용해되어 사라지고 오직 그 하나의 의사결정이 당신의 전부를 결정하며 당신은 순수해진다. ◎ 당신의 신은 있는가? - 모든 의사결정이 한 지점을 바라보는가? 그러므로 완전하다. 그러나 곧 오염되고 만다. 당신은 그 의사결정에서 무수히 벗어난다. 곡이 완전하더라도 연주하지 않으면 허당이다. 운명적인 의사결정에 맞는 상호작용을 계속해야 한다. 노무현이 청문회 현장에서 정주영을 까기로 결정한 순간에 그는 신을 호출한 것이다. 5천만 국민과의 부단한 상호작용이 기다리고 있다. 그럴 때 세상이 반응한다. 당신은 불만이어야 한다. 만족하면 지는 거다. 신이 있다고 끝내면 만나지 못하고, 만났다고 끝내면 완전하지 못하고, 완전하다고 끝내면 만족하지 못하고, 만족했다고 끝내버리면 이기지 못한다. 당신은 신을 타격해야 한다. 그래야 만난다. 만나서 흔들어야 한다. 그래야 반응한다. 함께 소리내고 춤을 추어야 한다. 그럴 때 당신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스탭이 엉켜서 충분히 보조를 맞추지 못한다. 크게 실망한 자가 크게 이긴다. 이겨야 일은 다음 단계로 이어간다. 스승이 죽어도 제자가 이어간다. 불은 타는 속도로 꺼진다. 계속 꺼지면서 계속 번져간다. 당신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런 저런 소리를 하지만 본질은 같다. 당신의 신이 있어야 하고, 만나야 하고, 완전해야 하고, 만족해야 하며, 이겨야 한다. 당신은 모두 실패한다. 일은 계속 이어져 간다. 노무현은 모두 실패했지만 일은 더욱 크게 번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래 인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일이 아니다. 나야 눈 감고 손 떼면 그만이다. 인류의 일을 내가 끌어낸 거다. 가만있는 신을 그대가 불러낸 것이다. 원래는 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의 문제였다. 내가 인류의 대표자로 행한다. 인생에 얻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지만 이야기는 계속 간다. 본래 인류의 것을 내가 빌려 쓰고 되돌려 주는 것이다. 나와 너와 인간과 세상과 신의 경계를 허물어 지우는 것이다. 완전한 것은 그렇게 계속 가는 것 뿐이다.
언젠가 어느 산 속 작은 선방을 방문했더랬는데 보살님이 물었습니다. 그래 인생의 문제들은 다들 해결했고? 예의에 맞는 답은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일 테지요. 해결했다고 하면 그럼 여기는 왜 왔냐 하는 핀잔이 날아올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워낙 떠돌아다니면서 막 산 사람이라 인간들 사이의 예의를 모르니. 불현 듯 깨달았습니다. 그래 인간들에게는 다들 하나씩 문제가 있었지. 그 문제를 마치 보물처럼 애지중지 하며 사는 거지.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고칠 생각은 전혀 없는 거지. 어쩌면 그것이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유일한 창구일지도. 그렇습니다! 문제가 있어서 오히려 인간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불완전해서 완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만족하지 못해서 세상을 향해 말을 걸 수 있습니다. 이기지 못해서 부단히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인생의 문제는 해결 못 합니다.
해결하는 순간 이승을 떠나서 천국이나 지옥에 가야합니다.
공자의 인생문제는
부자이고 귀족이고 권력자이고 장군이었던 아버지 숙량흘이
공자 어머니 안징재를 가난속에 버려두고 친아들 공자도 돌보지 않은 것이었는데
자신이 가난뱅이 천민인줄 알았던 공자가
귀족 장군 숙량흘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숙량흘이 죽은 지는 이미 15년이나 지났으므로 해결 못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성서를 엄청 많이 읽은 사람이라
하나님이 장님으로 만들고
찬찬히 예수가 왜 하나님의 아들인지 알려주면
100퍼센트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인데
스데반 집사를 바울이 주도해서
돌에 맞아서 죽게 하였으므로
평생 바울은 의인을 죽인 고통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미 죽어버린 스데반 집사를 다시 살릴 수도 없는 거고
이미 죽은 사람한테 눈물로 용서를 빌 수도 없는 거고
(못난 박해자를 둔 스데반 집사님, 정말 미안합니다!!!!!!)
스데반이 수행했던 사명을 죽을때까지 수행해야 하는 겁니다.
스데반을 죽인 지옥같은 죄책감 속에서
공자도 아버지 숙량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사도 바울도 스데반 집사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지옥같은 고통속에서
공자는 학문이라는 거대한 인류전체의 도약을 이끌어 내었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라는 것을
바울의 편지들로 지식적으로 이론적으로 밝히고
고난에 찬 선교활동과 순교로 몸으로 드러내었습니다.
인생문제보다 훨씬 거대하고 위대한 열매를 맺을 수는 있지만
인생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거 불가능합니다.
어휴! 헛소리하지 말고 좀 꺼지세요.
공자 아버지는 60세가 넘어 당시 예법으로 재혼이 불가능한데
재혼했으므로 정합이 아니고 야합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그건 당시의 예법이 그러할 뿐 강간 이런 말은 곤란합니다.
아버지가 어쩌고 뭐가 저쩌고 하는건
당신의 열등감을 나타내는 것 뿐입니다.
그런 안 물어본 자기소개 제발 하지 마세요.
여기서 말하는건 의사결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사결정을 왜 못합니까?
등신이 아니면 의사결정은 다 합니다.
등신들은 원래 아무런 문제도 해결못하지만
굳이 여기서 나 등신이오 하고 방송 안 해도 됩니다.
등신들은 이 글을 읽을 자격이 없습니다.
공자님은 거대한 가르침의 종주이기에 제 의견이 매우 부적절할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었던 부분을 삭제하고 수정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인생의 문제?" ---> "문제가 인생 !"
김용옥의 초딩 개소리에 낚여서
헛소리 하는 사람이 꽤 되는데 한심할 따름입니다.
당시 무당은 대단한 권력자였는데
소녀를 수십명이나 강에 투척한 무당도 있을 정도입니다.
위나라의 서문표가 계책을 써서 이들을 토벌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조선왕조 시대에 무당이 천민으로 차별되어 천대를 받았으므로
당연히 무당은 천민이었다는 식의 초딩 마인드로 이 글을 읽으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기본적으로 김용옥급 또라이라 볼 수 있는데
적어도 이 사이트에 오는 사람이라면 생각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합니다.
김용옥은 노자가 몸을 돌보라고 하니 한약 먹고 국민체조 하는 수준입니다.
형이상학을 형이하학 아니 허리하학으로 푸는 형편없는 자입니다.
자존심이 있지 그 장단에 놀면 안 됩니다.
심청을 인당수에 투척하는 관습이 중국무당의 전매특허인데
당시는 고을 수령도 어쩌지 못할 정도의 대단한 권력집단이었으며
숙량흘이 무당의 딸을 빼앗는다든가 이런건 불가능합니다.
당시에 모계관습이 있었으므로 무당이 자기 판단으로 남자를 취하는 것이며
원래 무당들은 내부적으로 모계사회입니다.
정식 결혼은 하지 않지만 어떻게든 자식을 만들어 직업을 물려줍니다.
그래서 무당은 족보가 없으므로 천민인 거죠.
천민이라는 차별관습은 조선 특유의 유목민 문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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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천민이라는 식의 조선왕조 차별관념을 막 들이대는건
조선과 중국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개소리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할 때는 이전에 들은 이야기를 다 던져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읽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려듭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뭔지는 모르고 답하려 듭니다.
문제를 낸 사람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 의도를 파악하되, 그 의도에 낚이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고, 전환시키는 거라야 합니다.
누구나 한가지 문제는 있다.
당연한 말입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할 게 아니라, 그 문제로 깨달음에 이르러야 하는 거지요.
바울이든 공자든 신이든 다 같은 겁니다.
깨달음이란 자기가 걸어온 길을 다 접고, 다른 곳으로 튀는 겁니다.
바울은 깨달음을 얻고 아라비아 사막으로 튀었습니다. 3년 반동안 광야에서 한번 깨달은 그 깨달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길을 완성한 겁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선교활동과 순교에 관심을 갖는데 이미 그의 인생은 광야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성경은 뒤집어서 읽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당시 제사제도로 자식이나 남아를 바치는 것
더이상 하지 말라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아브라함의 사건을 놓고, 순종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면 하나님이 어린 양을 준비해 주신다는 식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든지 하는 건 다 개소리입니다.
인류의 대표자가 눈앞에 놓이 복타령을 하고 있다면 그건 가짜라고 방송하는 것일 뿐입니다.
I am your man 이라는 노래와 hallelujah라는 노래로 잘 알려진 캐나다의 음유 시인이자 가수인 레너드 코헨이 이런 말을 노래가사로 썼습니다.
새들은 하루의 시작을 노래하고
나는 다시 시작하라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있지.
지나간 그 무엇, 아직 있지도 않은 그 무엇에 신경 끄시게
......
종소리 울려라. 들릴 때까지.
잊어라. 너의 완벽한 책임감까지도.
모든 것에는 결점이 있나니.
그곳이 바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곳이라네.
맨 마지막 두 줄
모든 것에는 결점이 있나니
그곳이 바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곳이라네.
이 글과 맥이 통하는 것 같네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라. Solve the problem in your life!
이 걸 나는 인생의 문제를 전환시키라로 읽습니다. Transform the problem in your life!
굳이 설명을 달자면 해결은 문제가 없어지는 거고, 전환은 문제는 그대로 있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걸 말합니다. (누에가 나비로 변신하는 것처럼, 전환하는 거) (바울은 똑 같은 바울이나, 깨달음 이전과 이후는 완전 다른 존재)
문제는 원래 없는 것입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순간
더 이상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의 문제는 오직 비참의 문제 하나 뿐이며
다른 문제는 절대로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세상의 문제이거나
신의 문제이니 세상이 고민하고 신이 고민할 일입니다.
99퍼센트 남의 잘못을 고민하고 있으니
이는 지능이 떨어지는 경우입니다.
남이 나를 속였으면 그 자가 나쁜 자이니
그 범죄자가 나쁨을 고민할 일인데 왜 내가 고민합니까?
인간이 비참한 것은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어쩌고 GOD가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지만
그 경우는 남의 아이디어로 떠드는 것이니
그 아이디어의 주인이 아니고 종의 신세인지라
타고난 종놈들에게 무슨 얼어죽을 신이 있겠습니까?
제가 말하는 것은 당신의 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을 타자로 보는 한 그것이 자신의 것은 아닙니다.
나의 바깥에서 신을 찾는 자에게 신이 있을 리 없는 거죠.
그 사람들이 말하는 신에 대한 관념은
외계인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도 됩니다.
외계인이 어쨌든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외계인이 나를 도와주고 어째준들
그것은 그 외계인의 소행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신이 내게 백억원을 주었다면
그 백억원은 신의 것이지 내것이 아닙니다.
그 주려고 내밀어진 손을 자르고
그 주려는 자를 패죽이는게 내게 주어진 일입니다.
온전히 자기 안에서 나온 것만 내 것입니다.
당신의 신은 타자가 아니어야 합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거지 다른 말은 필요없습니다.
들을 귀 없는 자들은 스킵해도 됩니다.
들을 귀 없는 사람,
볼 눈이 없는 사람,
말할 입이 없는 사람,
생각할 두뇌를 장식으로 달고 있는 사람은 Skip 합니다.
성경의 핵심은
네가 신이다.
네가 예수다.
신을 닮으라 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나오는 게 신의 형상인데,
그 신의 형상을 빼닮은 게 인간이라는 걸,
인간이 모릅니다.
되도 않는 원죄론을 만들어서 몇천년 동안 가르쳐왔고, 그걸 철석같이 믿고 받듭니다.
원죄라는 말이 성경에 없는 데도, 말입니다.
어쨌거나
들을 귀 없는 사람,
볼 눈이 없는 사람,
말할 입이 없는 사람,
생각할 두뇌를 장식으로 달고 있는 사람은 Skip 합니다.
추상적 사유를 훈련해야 합니다.
의사결정만 갖고 이야기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지구라는 하나씩 땅덩이를 공짜로 챙겨서 나오는데
지구 안에 다 있는데 저거 아버지가 부자고 가난뱅이고 이런 말이 왜 나오는지?
돈은 은행에 있고 누구의 것도 되지 못하는데 부자가 어딨고 빈자가 어딨다는 건지
부자나 빈자나 이런건 빌어먹을 인간들이 짜고치는 고스톱 종목 중의 하나인데
왜 많은 재미있는 다양한 고스톱 놔두고 하필 그런 빈부고스톱을 치는 건지
나의 모든 의사결정이 소실점이 되는 하나의 지점을 바라보고 있느냐 여부에서
신이 있는지와 신이 없는지가 결정되는 것이며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산만한 자는
신이 있어도 없는 거고 없어도 역시 없는 것이며 신이 없으면 곧 비참 뿐이며
근본이 천출이니 귀족이니 이런건 사회적 관습인데 그런 관습에 복종하는 하류들은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는 개나 돼지의 족속이니 논외가 되는 거죠.
자기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는 자는 애초에 철학과 담을 쌓았으니 대화상대가 아닙니다.
자기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는 개나 돼지와 철학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며
제법 알만한 사람들이 조금 알만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철학분야입니다.
알만한 사람이라면 자부심을 가지고 긍지를 가지고 하류들과는 결별해야 합니다.
그런 정신무장이 되어 있어야지 군인과 일반인이 똑같다면 그게 당나라 군대죠.
세상에 별놈이 많지만 이 사이트에 왔다면 진리를 다룬다는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일반인이 아니고 엘리트 군인이며 개소리 쳐하는 당나라 군대는 더욱 아닙니다.
늘 문제는 있습니다.
그런데 해결할 문제가 없을 뿐이죠.
동렬님의 여러글들을 통해 어느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글을 통해 다시한번 정리가 되는군요.
결론은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계속하라.
인생의 정답은 굽히지 말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계속하며 전진하는 것이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