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타자성 속에서 주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니, 타자성은 다른 사람이 주최하는 게임에 여불때기로 끼어드니 어색한 것이고, 주체성은 자기 자신의 게임을 설계하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대가 추구하는 혹은 그대가 두려워하는 것들, 곧 명성이든, 돈이든, 출세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죽음이든, 실패든, 좌절이든 그것들은 모두 다른 사람이 설계한 게임 속에서 허우적대는 꼴이니 그대는 이미 낚여 있다. 그러므로 버려라. 행복도 버리고, 죽음도 버리고, 명성도 버리고, 비교도 버리고, 승리도 버리고, 좌절도 버리고, 역할도 버려라. 그것이 말려드는 것이다. 오직 자기 게임 안에서 에너지를 얻어 가슴에 열정을 품고 계속 가는 것만이 진실하다. 그것은 위대한 만남으로만 가능하니, 불을 끄려 하는 자는 실패하고 불을 지르려 하는 자가 성공한다. 성냥개비와 적린이 마찰하여 불씨를 일으키듯 서로 다른 둘이 만나야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 인간은 사라져도 사건은 계속 간다. 우리는 그 사건의 에너지를 타고 가는 것이다. ‘개고기 먹지 마라’고 하면 ‘그게 왜 나쁘냐?’ 하고 단세포적으로 반발할 것이 아니라 주최측의 의도를 헤아려야 한다. 아! 이 동네는 또 요런 식으로 사람을 갖고 놀려고 하는구나 하고 간파해야 한다. 자신의 대응이 이기는 게임인지 지는 게임인지 알아채야 한다. 메갈리아도 그렇고, 일베도 그렇고, 김영란법도 그렇고, 동성애문제도 그렇다. 주최측의 의도가 있는 것이니 차별은 소수자를 때려서 다수자를 결속시키는 바 진부한 권력의 방법론이며, 반대로 평등은 잘 나가는 중산층을 갈궈서 집단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려는 똥개훈련의 의도가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당신은 낚여 있다. 이기는 자와 지는 자는 정해져 있으니 누가 이기도록 설계되어 있는 게임인지를 간파해야 한다. 흥분하면 낚인 거다. 게임에서 발을 빼고 사건의 다음 단계를 예고하는 냉정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누가 그린 그림인지, 아니면 누가 찍은 사진인지 모르겠으나.. 검색 중에 우연히 포착된 이미지. 작가는 타자성의 문제를 제기하려고 한듯. 어쨌든 화내면 그대가 지는 게임, 낚이면 그대가 지는 게임. 친한척 엉기지도 말고, 화난척 밀어내지도 말고, 주최측의 숨겨진 의도를 간파하고 그 수법을 복제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 자가 신의 다음 게임에 초청되는 법이다.
인생은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고,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으며, 사랑도 없고, 미움도 없고, 선수도 없고, 역할도 없고, 승리도 없고, 패배도 없소. 있는 것은 에너지 뿐이며 계속 가는 것은 게임 뿐이며, 찾아야 할 것은 족보 뿐이며, 낳을 것은 자손 뿐이며, 주최측의 의도를 알고 가는 자는 낚이지 않으며, 모르고 가는 자는 허둥댈 것이며, 각자 그대 자신의 게임을 설계하도록 하는 것이 이 게임의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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