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성의 문제 인생은 대본 없는 연극이다. 끼어들 때와 빠질 때를 모르니 어설프다. 다들 눈치껏 끼어드는데 나는 그러기가 싫다. 적당히 끼어들려고도 했으나 잘 안 되더라. 내가 왜 저 우습지도 않은 광대짓에 가담해야 하는 거지? 눈 질끈 감고 하차해 버리고 싶지만 버스는 계속 간다. 인생의 비참이 그곳에 있다. 타자성의 문제야말로 철학의 근원적인 출발점이라 하겠다. 타자성의 반대는 주체성이다. 인생의 대본이 없어서 허둥대는 것이 타자성이라면, 자기 대본을 얻어서 떳떳한 것이 주체성이다. 모임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고 하더라. 할 말 없게 만든다. 인상적인 체험은 꼬마 때 하는 것인데 꼬마 때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4살 이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니 유아기억상실증이다. 아기 때 손님이 찾아오면 ‘가!’ 하고 소리를 지른다. '우리 집에 왜 왔니? 가버렷!' 손님이 과자라도 갖고와야 조금 풀어진다. 그런 충돌이 타자성의 문제다. 인생은 어색한 놀이와 같다. 여자아이들이 하는 고무줄 놀이에 끼어들기 어렵다. 몇 번 시도해 봤으나 계속 고무줄에 발이 걸렸다. 인생의 비애를 경험하게 된다. 이 세상은 나와 맞지 않는가 보다. 남의 놀이에 끼어들어서는 어차피 답이 없고, 내가 잘 하는 놀이를 개척해야 한다. 나만의 놀이를 설계하는 것이 주체성이다. 예수놀이는 할 수가 없었다. 교회 다니는 애들은 아랫동네에 살았는데 그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다. ‘예배당에 갔더니 꼬배당에 갔더니 눈감으라 해놓고 신도둑질 하더라.’는 노래가 있다.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구멍난 양말 사이로 씻지 않은 까만 발가락이 신경쓰여 교회놀이는 사절일 수 밖에 없었다. 석가놀이도 재미가 없다. 무심한 스님이 저혼자 목탁을 두드리고 있으니 끼어들 구석이 없다. 제사 지낸다며 군기잡는 공자놀이도 짜증나고, 노자놀이도 시큰둥하다. 혼자 흥분해서 핏대 세우는 헤겔놀이나, 유치하게 까불어대는 니체놀이도 식상하긴 마찬가지다. 하긴 마르크스 놀이가 잠시 관심을 끌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때려잡자 공산당 놀이보다 자본가 까기 놀이가 재미있다. 공산당이 보여야 때려잡지. 이왕 놀려면 가까운 곳에 있는 자본가를 잡는게 맞지 않은가? 그해 6월의 독재타도놀이가 좋았고, 80년대를 관통한 통일놀이는 북한과 손발이 맞지 않아 어설픈 희극이 되었다. 손발이 맞아야 해먹지. 남의 놀이에 어색하게 끼어들 것인가 나만의 놀이를 설계할 것인가?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자들은 이 놀이가 좋다거니 혹은 저 놀이를 하자거니 하며 함부로 들이댈 뿐 게임의 본질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차피 인생은 게임이라는 본질 그 자체를 절절히 인식하는 것이다. 게임의 본질은 인간의 사회성에 있고 또 생존본능에 있다. 내 바깥으로부터의 소식인 사회성을 받아들일 것인가? 내 안으로부터의 소식인 생존본능을 받아들일 것인가? 사회성의 문제는 무의식이다. 예컨대 이런 거다. 여자가 화장을 한다면 남자를 의식해서다. 여자에게 물어보면 ‘천만에! 자기만족을 위해서지 남자를 의식해서 하는 것은 아냐!’ 하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미 남을 의식하고 있다. 어떤 남자를 의식한건 아닐 것이다. 자기만족을 위해 화장을 한다 해도 사회에 타인의 시선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자기만족을 찾게 된다. 위하여는 모두 가짜다. 배후에 의하여가 있다. 무의식이 의하여다. 스트레스라는 심리적 압박에 의해 보이지 않게 마음이 조종된 것이다. 월남전에 참전한 미군 다수가 마약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부상을 입고 치료받으면서 모르핀 주사를 맞는 식이다. 월남전이 끝나고 이들이 일제히 귀국하면 한꺼번에 수십만 명의 마약중독자를 본토에 풀어놓는 셈이다. 미국인들은 크게 걱정하였다. 차라리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거 아냐? 그러나 귀국한 미군은 모두 마약을 끊었다고 한다. 그렇다. 전쟁이 사람을 먹은 거다. 과학자들이 생쥐실험을 해봤는데 과연 생쥐들은 마약을 끊지 못했다. 그러나 곧 실험이 잘못되었음이 밝혀졌다. 생쥐를 좁은 공간에 가둬놓은 것이 스트레스를 준 것이다. 넓은 공간에 풀려나 스트레스가 사라지자 생쥐들은 더 이상 마약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간에 그것은 순수한 당신의 의사가 아닌 것이니 당신은 생쥐실험을 당하고 있다. 인간은 섹스를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고, 행복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게 마약에 중독된 생쥐 꼴이 아닌가? 영웅호색이라고 한다. 사실은 스트레스 받은 거다. 권력자의 직업병인 불안장애가 그들을 섹스로 도피하게 한다. 마광수의 성담론이 유쾌하지만 그 또한 불안장애다. 당신의 취향, 당신의 마음, 그것이 가짜다. 대본없는 인생의 대본과 같으니 비좁은 실험용 생쥐상자가 보이지 않게 당신의 대본노릇을 한다. 그런데 말이다. 그 대본이 가짜다. 그래서 인생은 어설픈 연극이 된다. 죽음의 두려움이라도 마찬가지다. 과연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하는 존재일까? 천만에! 죽음의 두려움 또한 생쥐실험용 상자가 비좁은 탓에 일어나는 스트레스 반응이다. 그렇다. 게임의 본질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바 인간의 사회성이라는 집단 무의식의 압박과 인간의 생존본능이라는 자기 내부로부터의 압박이 제멋대로 대본을 쓰는데 있다. 당신이 넓은 공간에 자유롭게 풀려난 생쥐라면 마약도 끊고 죽음도 끊는다. 그곳에서는 진정한 당신의 게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격은 타자와의 조우에서 일어나는 어색함과 불일치를 피하려는 전략적 기동에 의해서 구축된다. 그리고 당신은 하루에도 무수히 실패한다. 실패할 때마다 조금씩 당신은 죽어간다. 그렇게 죽어가기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이라는 커다란 벽이 당신 앞에 막아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연극은 엉망이 되고 만다. 당신은 월남의 정글이라는 최악의 무대에서 압박받아 마약에 중독되었다. 당신이 명품을 좋아하든, 당신이 유행에 민감하든, 당신이 왕따에 앞장서든 그것이 마약임을 깨달아야 한다. 월남전을 끝내고 돌아와 마약을 끊듯이 어리석은 게임에서 풀려나야 한다.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당신의 대본이 아니다. 일전에 소개한 영화 ‘월터교수의 마지막 강의’에 잘 묘사되어 있듯이 타자성은 누구나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다. 근래 킴 카다시안과 테일러 스위프트의 SNS 전쟁이 화제가 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킴 카다시안은 4차원인 척 쇼하는 천재다. 패리스 힐튼의 수제자 답다. 패리스 힐튼도 그쪽 분야로 기특하다. 멍청한 재벌 상속녀인척 하는 기믹으로 떴다. 사실은 상속받을 재산도 얼마 없는데 말이다. 대중은 그의 자기연출에 낚인 것이니 킴 카다시안도 못지 않다. 주식시장에서 농간을 부리는 작전세력처럼 작당하여 셀럽이라는 시장을 개척하였으니 그것은 그들의 게임이다. 그런데 테일러 스위프트의 일진놀이는 위험하다. 테일러의 위선놀이 대 킴의 위악놀이가 충돌한 셈이니 테일러는 얼굴 예쁜 공주 캐릭터를 밀고 킴은 엉덩이만 큰 하녀 캐릭터를 민다. 카다시안은 신중하게도 흑인과 결혼했고 테일러는 무모하게도 전 애인들을 디스했다. 이런 것들은 다 장삿속이다. 테일러는 남자 대 여자의 전선을 만들고 페미니스트인 척 한다. ‘지구의 모든 여자여 나를 따르라’ 하는 캠페인으로 지배하려 든다. 문제는 이런 대결이 초중학교 교실에서 항상 일어난다는 거다. 여고생 드라마에 잘 나오는 패턴이다. 그런데 이런거 역겹지 않은가? 세상이 그런 유치한 게임에 의해 작동한다는 사실이 슬프지 않은가? 일베게임이든 메갈리아 게임이든 마찬가지다. 낚여서 빠져드는 자가 어리석다. 모르는 사람이 친한 척 엉기며 무례를 저지르는 것도 역겹고, 알만한 사람이 공연히 화를 내며 자기방어에 열중하는 꼬라지도 우습다. 인간은 그런 사회의 무례함과 싸워야 하고 또 돌발하는 자기 본능과도 싸워야 한다. 게임의 정답은 첫째 아버지를 잘 만나는 것이고 둘째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선택할 수 없다. 아니다. 당신은 아버지를 선택할 수 있다. 당신은 신이라는 아버지, 진리라는 아버지, 역사라는 아버지를 선택할 수 있다. 자식도 선택하여 낳을 수 있다. 작가는 작품이라는 자식을 낳는다. 캐릭터와 스타일도 자식이다. 타자성의 문제는 주체성의 문제다. 세상은 타자다. 나는 혼자다. 의사결정만이 진실하다. 그렇다면 게임할 수 있다. 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이 아니다. 그래서 문제다. 무의식 영역에서 집단에 의해 조정되고 있다. 내 마음이 조종되고 있으며 본능 또한 조종되고 있다. 진정한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섹스에 흥미가 없다. 출세니 명성이니 지위니 돈이니 하는 것들은 마약의 종류다. 당신은 사회라는 비좁은 감옥에 갇혀서 스트레스 받은 생쥐다. 진정한 제 부모를 찾고 진정한 내 자식을 찾을 때 그 족보의 연결고리 안에서, 그 일을 추동하는 에너지의 흐름 안에서 당신은 완전하다. 인간은 하나의 연결고리이니 하나의 매개변수다. 내가 연결할 지점을 찾아 링크를 걸어주면 완전하다. 완전하지 못한 것은 보상받으려 하고, 비교하려 하고, 이기려 하고, 역할하려고 하는 것이다. 대본없는 연극의 대본을 찾아 허둥대는 짓이니 어리석은 광대노릇을 피할 수 없다. 당신이 섬겨야 할 엄마는 신이고, 당신이 책임져야 할 자식은 진보다. 그 우주단위의 커다란 게임 속에서 비로소 당신은 풀려난 생쥐처럼 마약을 끊게 된다. 역할을 끊고 죽음을 끊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 그 전에 무엇보다 이것이 게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많은 부분이 본능에 지배된다. 고통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는 것은 본능이다. 누군가 내게 도움을 청하는데 내가 그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할 때 괴롭다. 이런 것은 오랫동안의 사유와 체험이 축적된 것이다. 그것은 나의 게임이 만들어냈다. 당신은 게임 속의 캐릭터를 키우듯이, 당신 안에서 사랑과 의리와 믿음을 키울 수 있다. 인과 지와 의와 신과 예를 키울 수 있다. 존엄을 키우고 자유를 키우고 사랑을 키우고 성취를 키우고 행복을 키울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의 게임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강요된 게임이 아니어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커다란 족보를 이룬다. 그것이 당신이 찾아야 할 진짜 대본이다. 그 대본은 열려 있으니 그럴 때 당신은 상자를 탈출한 생쥐처럼 자유로워진다. 진짜 대본을 찾았을 때 비로소 당신의 게임을 설계할 수 있다. 자기 게임 안에서만 어색하지 않다. 타자성을 극복하고 주체성으로 나아간다. 메갈리아의 소행을 보고 화가 났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게임을 보지 못했다. 당신은 준비된 대본이 없다. 그래서 치인다. 치여서 허둥댄다. 남의 게임에 말려들었다. 킴 카다시안과 테일러 스위프트가 짜고 치는 게임에 낚였으니 작전세력에 놀아났다. 모든 것을 설계한 자는 칸예다. 떡밥은 비욘세. 화가 나지 않아야 한다. 죽음이 두렵지 않아야 한다. 게임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게임의 무리한 설정에 응수할 당신의 대본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 메갈리아 사태에 써먹으려고 30년 전에 준비해둔 대본이 서랍 속에 저장되어 있었지. 그걸 기억해내야 한다.
공자가 넓은 공간에 풀어놓으니 마약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생쥐라면 노자는 좁은 공간에 갇혀 스트레스 받아 마약에 중독된 생쥐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문제를 발명해내고 그래서 노자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불을 끄려고 하고 그래서 공자는 불을 지르려고 합니다. 인생이 힘든가요? 당신이 갇혀 있는 좁은 공간을 벗어나시오. 예수놀이든 석가놀이든 종북놀이든 일베놀이든 그것은 당신의 게임이 아닙니다. 탈출하여 넓은 곳에서 진리의 게임을 설계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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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