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함이라는 절대신성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불완전함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기로 한다.
완전함이 완전하기 위해서는 불완전이란 의미가 없어야 한다.
완전함조차 대칭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너무 공허하다.
그러고 보면 완전함 뿐만이 아니다.
의미와 무의미, 가치와 무가치, 삶과 죽음, 사랑과 미움..
모든 대칭된 개념이 주종관계로 이루어져있다.
무의미는 의미에서 파생되고,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다.
사람들은 늘 목적론적 혹은 절대론적 사고에 빠지는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스탈린, 나찌, 십자군의 악몽이 남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에는
프로이드와 니체와 라깡과 레비스트로스를 모두 합쳐도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 집단 트라우마는 모든 완전함에 불완전함이라는 감시인을 붙게 만들었다.
이제 비로소 인류는 안심하는 듯이 보였다.
'그래, 절대주의 귀신은 모두 죽었어.' 과연?
우리 솔직히 인정하자. 사람은 누구나 절대적으로 살고 있음을.
세상에 아무리 하찮은 인간이라도 상대적인 삶,
누군가의 거울같은 삶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류가 정말 오랜만에 이성의 울타리를 벗어났을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세상은 대칭의 축제를 즐기느라 축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아니,
축 따위는 필요하지 않노라며 세상의 모든 축을 비웃었고 축대는 허물어졌다.
인류역사의 진보는 해체될 위기에 처했다.
2차대전에서 세계를 구한 미국이 세계를 농단하는 것은
나찌에 희생된 유대인이 아랍을 탄압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것이 현 세계의 축이다. 즉, 반작용이 작용의 행세를 하는 것이다.
독일과 일본같은 가해자로서 작용을 가한 국가들은 앞으로 50년 내에
발언권을 가지기 힘들기 때문에, 새로운 축은 중국 한국 브라질 같은
기존 전후질서에서 벗어난 신흥국가들에게서 나올수밖에 없다.
중국이나 브라질은 기득권국가의 견제가 심해서 쉽지않은 일이고,
결국 한국, 멕시코, 폴란드, 터키 정도의 중위권 국가들로 압축된다.
축이란 힘의 축 만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다.
가치의 축, 즉 작용과 반작용의 반동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완전성을 뜻한다.
대칭을 넘어, 교착을 타개해서, 허무주의와 순환론을 일축하는 그 완전함 말이다.
생성과 변화와 소멸을 아우르고, 상생과 발전이 결합되는 이상주의를 믿을때 가능하다.
불완전함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기로 한다.
완전함이 완전하기 위해서는 불완전이란 의미가 없어야 한다.
완전함조차 대칭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너무 공허하다.
그러고 보면 완전함 뿐만이 아니다.
의미와 무의미, 가치와 무가치, 삶과 죽음, 사랑과 미움..
모든 대칭된 개념이 주종관계로 이루어져있다.
무의미는 의미에서 파생되고,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다.
사람들은 늘 목적론적 혹은 절대론적 사고에 빠지는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스탈린, 나찌, 십자군의 악몽이 남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에는
프로이드와 니체와 라깡과 레비스트로스를 모두 합쳐도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 집단 트라우마는 모든 완전함에 불완전함이라는 감시인을 붙게 만들었다.
이제 비로소 인류는 안심하는 듯이 보였다.
'그래, 절대주의 귀신은 모두 죽었어.' 과연?
우리 솔직히 인정하자. 사람은 누구나 절대적으로 살고 있음을.
세상에 아무리 하찮은 인간이라도 상대적인 삶,
누군가의 거울같은 삶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류가 정말 오랜만에 이성의 울타리를 벗어났을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세상은 대칭의 축제를 즐기느라 축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아니,
축 따위는 필요하지 않노라며 세상의 모든 축을 비웃었고 축대는 허물어졌다.
인류역사의 진보는 해체될 위기에 처했다.
2차대전에서 세계를 구한 미국이 세계를 농단하는 것은
나찌에 희생된 유대인이 아랍을 탄압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것이 현 세계의 축이다. 즉, 반작용이 작용의 행세를 하는 것이다.
독일과 일본같은 가해자로서 작용을 가한 국가들은 앞으로 50년 내에
발언권을 가지기 힘들기 때문에, 새로운 축은 중국 한국 브라질 같은
기존 전후질서에서 벗어난 신흥국가들에게서 나올수밖에 없다.
중국이나 브라질은 기득권국가의 견제가 심해서 쉽지않은 일이고,
결국 한국, 멕시코, 폴란드, 터키 정도의 중위권 국가들로 압축된다.
축이란 힘의 축 만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다.
가치의 축, 즉 작용과 반작용의 반동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완전성을 뜻한다.
대칭을 넘어, 교착을 타개해서, 허무주의와 순환론을 일축하는 그 완전함 말이다.
생성과 변화와 소멸을 아우르고, 상생과 발전이 결합되는 이상주의를 믿을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