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철학은 의사결정 능력을 키운다. 인문학은 사회를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로 이끈다. 문화예술은 그 의사결정을 세련되게 한다. 개인의 결정에 그치지 않고 집단의 결정으로 발전해야 한다. 상황에 직면하여 회의를 소집하면 늦고 미리 잘 짜여진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 도량형을 정하듯이 법과 원칙을 정하는 것이 방법이지만 거기에 의존하면 안 된다. 부부간이라도 그렇다. 보통은 양말을 어디에 두었느냐 하는 사소한 문제로 틀어진다. 미리 정해놓으면 편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것이 또다른 다툼의 원인이 된다. 유태인처럼 매뉴얼을 잘 만드는 나라가 흥하지만, 일본처럼 매뉴얼에 집착하는 나라는 망한다. 이성적인 판단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의 사회적 본능에 속하고, 집단 무의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프로야구의 벤치클리어링처럼 합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동료가 빠르게 달려나와 주었을 때 선수는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팀은 굳게 결속한다. 지식인의 머리로는 판단할 수 없다. 신분상승이 역사의 본질이다. 집단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신분상승이다. 벤치클리어링에 가담하여 동료의 땀을 몸에 묻히며 숨결을 느끼고 호르몬을 교환하는 것이다. 집단 내부에 그러한 결속된 덩어리를 만들어 내느냐가 중요하다. 어느 집단이든 잘 나가는 그룹은 끈끈하게 응집된 것이 있다. 친노세력과 같은 의사결정의 핵이 있고 구심점이 있다. 조선왕조는 과거합격자가 의사결정그룹에 들었다. 로마는 원로원과 민회로 그것을 조달했다. 몽골인은 쿠릴타이로 그것을 대체했다. 보통은 중산층을 의사결정의 핵으로 본다. 그룹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룹 안에 치고나가는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무의식 차원에서 손발을 맞출 수 있다. 왜 퇴계가 문제인가? 신분상승을 하려면 그 신분이 있어야 한다. 차별해야 신분이 생긴다. 부족민의 원시사회주의처럼 모두가 평등하면 신분상승이 불가능할뿐더러 집단의 의사결정을 못한다. 퇴계의 노선은 차별의 방법으로 매뉴얼을 만들어 쉽게 가려 하다가 수렁에 빠진 것이다. 중국은 외척과 환관으로 쉽게 가려다가 밀실협잡으로 망했고, 서구는 기독교로 쉽게 가려다가 의사결정을 성직자에게 위임한 자발적 노예로 망했고, 일본은 봉건세습으로 쉽게 가려다가 한 명이 할 일을 열명이 분업하여 비효율로 망한다. 우리가 아는 공자는 주자와 퇴계에 의해 왜곡된 공자다. 모든 나쁜 것은 도교에서 온 것이며 엄밀하게 논하면 묘족의 관습이다. 인도를 망치는 것은 힌두교의 교리가 아니라 이전부터 있었던 촌락의 관습이다. 모든 관습은 매뉴얼을 정해놓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장점이 단점이 된다. 중국은 처세가 장점이고, 기독교는 헌신이 장점이고, 무슬림은 복종이 장점이고, 일본은 역할분담이 장점이다. 장점이 단점으로 바뀔 때는 의사결정회피로 나타난다. 주로 작은 것을 잘 결정하고 큰 것을 망설인다. 중국은 만만디로 망하고, 일본은 다테마에로 망하고, 기독교와 힌두교와 이슬람은 내세집착으로 망한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셋이다. 첫째는 존엄이다. 천하의 일을 논하는 큰 무리의 의사결정그룹에 들어야 한다. 둘째는 긴밀이다. 밀당을 두려워 말고 팽팽한 긴장 가운데 서야 한다. 셋째는 의도다. 꿍꿍이를 가지고 트렌드를 연출해야 한다. 보통은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한다. 망한다. 문화예술의 본의는 자신이 문제를 출제하는 것이다. 인류를 시험에 들게하는 것, 그것이 의도다. 인류를 낚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행복을 원한다. 틀렸다. 아기의 행복은 엄마의 지켜보는 시선에 있고 돼지의 행복은 환경적 조건의 충족에 있다. 모두 타자가 결정한다. 그 반대여야 한다. 타인이 자신을 쳐다보게 만들어야 한다. 당신이 세련되어질 때 그렇게 된다. 문제를 내는 사람이 세련된 사람이다.
공자가 옳다는게 아니라 제가 공자를 완성한다는 말입니다. 공자는 그저 화두를 던졌을 뿐이고 율곡과 퇴계가 이를 다르게 해석했으니 사실은 각자의 서 있는 위치가 달랐던 것입니다. 세상과 대결하는 지점이 결정합니다. 섬나라는 섬나라 방식으로, 대륙은 대륙 방식으로, 반도는 반도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사회적으로도 중앙에 서는 방법과, 변방에 서는 방법과 그 양자를 잇는 길목에 서는 방법이 다릅니다. 옳게 결정할 수 있는 위치로 가 있어야 합니다. 그 위치는 진보의 위치입니다. |
손볼거냐 말거냐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