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전성의 문제 -
◎ 인간은 완전성을 찾는다. - 언어의 문제 -
◎ 답은 언어에 있다. - 타자성의 문제 -
◎ 인간은 비참하며 존엄하려고 한다. 공자는 깨달음을 얻어 ‘일이관지’ 했다.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다. 공자는 사건의 전모를 보는 관점을 얻었고 이를 표현하는 언어를 얻었다. 그러나 옳게 표현되지 않았다. 2500년 전의 중국어 수준으로는 불가능하다. 언어의 한계다. 이후 자사의 성性, 맹자의 의義, 순자의 예禮, 묵가의 애愛, 한비자의 법法이 난립하여 유가는 산만해졌다.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은 맹자의 ‘천명’과 순자의 ‘민의’를 합치는 아이디어다. 주자가 이를 이기설로 발전시켰으나, 천명과 민의를 대립적으로 보는 오류를 저질렀으니 곧 남인 퇴계의 이기이원론이다. 이는 공자를 둘로 쪼개놓는 것과 같다. 이와 기의 대립은 기승전결로 가는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용해되어 사라진다. 인간에게는 동기부여 문제와 의사결정 문제라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사건 안에서 둘은 하나다. 비유하면 동기부여는 하느님을 찾는 것이며, 의사결정은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이다. 이원론은 하느님을 찾아내되 하느님을 타자화하여 숭배하고 굴복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을 멀리하는 것이다. 이는 손님을 집에 초대해놓고 함께 담소하며 즐거워하기는 커녕 손님을 상석에 모셔놓고 엎드려 절하며 요구조건을 내걸고 부탁하여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일원론은 신과 인간이 나와 타자로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의사결정해야 바르다. 그것이 구조론의 대표성 개념이다. 인간의 완성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에 있어서 신을 대표하는 것이다. 손님과 나의 경계가 사라졌을 때 그 흥겨움 안에서 완전하다. 역사이래 다양한 철학사상이 있어왔으나 이 한가지 문제를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진보와 보수를 둘로 나누어 본다면 아직 진보도 보수도 옳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커다란 진보 안에 일부 보수 포지션이 있다. 한국 안에 지방이 있다. 서울과 지방은 중앙과 변방으로 나뉘어 대립되지만 사실은 서울시도 지자체다. 알고보면 서울도 대한민국의 한 지방이다. 우주 안의 모든 대립은 의사결정하는 과정에서의 절차이며 의사결정이 끝나면 사라진다. 대립적 사유는 무지의 소산에 불과하다. 원효가 화쟁을 제시하여 처음 일원론을 제창한 이래 한국 철학의 전통은 일원론이 주류다. 모든 이항대립적 사유는 언어의 실패에 기인한다. 그들은 한국어를 잘못 사용한다. 말을 깨치지 못한 것이다. 주어와 목적어를 옳게 조직하지 못한다. 생각은 머리를 쥐어짜서 하는게 아니라 저절로 번뜩 하며 떠오르는 것이다. 아이디어는 짜맞추는게 아니라 갑자기 툭 튀어 나온다. 그것이 뇌의 연역이다. 우리는 ‘귀눈코혀몸’의 신체감관에서 얻은 데이터를 귀납하는 방법으로 사물을 인식하지만, 뇌는 연역의 방법으로 아이디어를 복제한다. 귀납은 타인에게 전달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순서가 뒤집어진 것이며, 연역이 진짜다. 뇌를 따라야 한다. ‘귀납어’를 ‘연역어’로 바꾸어야 한다. 공자가 얻은 깨달음이다. 곧 일이관지다.
보통은 삶의 의미가 뭐냐고 묻지만 의미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나 하는 질문일까요? 의미는 일의 다음 단계를 말합니다. 일의 다음 단계를 알려면 일을 알아야 합니다. 일을 모르므로 의미를 설명해봤자 무효입니다. 대개 이런 식이지요. 일은 완전성이며 완전성은 복제입니다. 이걸 이야기하려면 양자역학까지 가야하므로 골때리게 됩니다. 거기까지 몰라도 구조론은 패턴이 반복되므로 반복의 마디만 알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