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칭성에서 완전성으로 비약하라.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양은 침투한다.
모든 존재는 구조가 같다. '질, 입자, 힘, 운동, 량' 다섯 ‘인자’로 조직된 하나의 플랫폼을 세상의 모든 존재가 공유하고 있다. 구조론은 이 다섯 인자들 사이에서 완전성과 불완전성을 추적한다.
인간이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은 자연의 ‘대칭성 원리’를 모방하고 있다. 자연은 하늘과 땅, 밤과 낮, 해와 달, 암컷과 수컷, 산과 강, 풀과 나무, 길짐승과 날짐승으로 항상 둘씩 짝지어져 있다.
인간은 자연의 대칭성을 모방하여 이상과 현실,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문과와 이과, 임금과 신하로 짝짓는다. 이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문명사회와 원시사회를 막론하고 공통된 속성이다.
자연의 짝짓기 성질 곧 대칭성 원리가 바로 포착해야 할 구조다. 인간은 그러한 구조를 통해 사물을 이해한다. 어떤 둘씩 세트로 짝지어져 대칭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 안에 구조가 숨어 있다.
서구 근대과학의 역사는 대칭성 원리의 토대 위에 구축되었다. 그러나 대칭성은 불완전하다. 에너지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대칭성은 에너지가 있는 다른 존재에 종속된 형태로만 존재한다.
대칭성 위에 완전성이 있다. 구조론이 새로 완전성 개념을 제시한다. 이에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대칭성에 집착하는 닫힌 세계관을 극복하고 완전성에 기초한 열린 세계관을 얻어야 한다.
대칭성은 분석의 방법으로 포착한다. 덩어리를 잘게 쪼개어 사물의 내부를 뜯어보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을 뜯으면 어떻게 되지? 죽는다. 분석적 접근은 뜯어헤쳐진 죽은 구조를 포착할 뿐이다.
살아있는 구조를 포착해야 한다. 대칭성은 존재의 한 측면일 뿐이다. 쪼개기가 아니라 합치기로 눈을 돌려야 한다. 합치는 것은 에너지다. 존재의 근본은 에너지다. 생명의 근원 역시 에너지다.
존재를 뜯으면 에너지가 이탈한다. 남녀사이를 뜯어보면 사랑이라는 에너지가 이탈한다. 대칭성의 분석과정에서 현상이 왜곡된다. 불완전하다. 복원해야 한다. 에너지를 태워 도로 살려내야 한다.
완전성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어떤 것이 완전한가? 완전한 구조는 창조한다. 창조하여 낳는다. 낳아서 증식한다. 증식하여 번성한다. 생명은 낳음에 의해 성장하고, 역사는 낳음에 의해 진보한다.
문명의 발전, 자본의 증식 역시 낳음에 의해 달성된다. 근대과학의 분석적 방법으로는 이미 만들어진 존재를 피상적으로 관찰할 뿐 처음 존재가 만들어지는 과정, 낳음의 현장을 포착하지 못한다.
완전성이 대칭성에 앞선다. 통합지가 분별지에 선행하는 앞선 단계의 높은 지식이다. 대칭성이 구조의 기본이다. 완전성은 구조 위의 구조, 구조의 완성이다. 대칭성은 하부구조로 종속될 뿐이다.
닫힌 세계관에서 열린세계관으로 전환하라
근대과학의 토대는 인과율이다.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를 짝짓는다. 삼단논법 역시 A와 B가 짝을 짓는다. 수학적 방법 역시 ‘=’를 고리로 삼아 연속적인 짝짓기를 전개한다. 대칭성은 짝짓기다.
짝짓기 방법으로 인간은 지식을 창출한다. ‘원숭이 밑은 빨갛다. 빨간 것은 사과다. 사과는 둥글다.’ 이런 식이다. 연속적인 짝짓기로 지식을 대량생산한다. 그러나 파편화된 부스러기 지식일 뿐이다.
자연의 전개 역시 짝짓기 중심이다. 물질의 분자구조든, 돌턴의 원자가설이든, 표준모형이론이든 모두 연속적인 짝짓기 구조다. 문제는 불완전하다는 데 있다. 에너지를 태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의 대칭성을 발견하고 곧 흥분한다. 마치 세상을 다 알게 된듯이 기고만장해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대칭성은 내부구조일 뿐이다. 외부와 관계를 맺지 못하는 닫힌구조다.
에너지가 있는 존재에 딸려있는 하부구조다. 에너지를 들여오려면 안의 짜임새가 아니라 바깥세계와의 관계설정이 중요하다. 상부구조가 밖에서 에너지를 들여오는 방법으로 하부구조를 통제한다.
열린구조 안에 닫힌구조가 들어있다. 열린 상부구조에 닫힌 하부구조가 포함된다. 구조 위의 구조로 이중구조다. 그러나 인간은 위를 보지 못한다. 정상에서 전모를 바라보는 열린 시야가 없다.
한사코 아래쪽에만 현미경을 들이댄다.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여전히 대칭성에 매달린 닫힌 세계관에 갇혀 있다. 흑백논리, 이원론적 사고, 이분법적 사고, 이항대립적 사고, 선형적 사고다.
파편화된 인식을 극복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한 줄에 꿰어 하나의 논리로 일관되게 설명해야 바르다. 서말의 구슬을 꿰어 보배가 된다면 무엇으로 인식의 구슬을 꿸 것인가? 에너지라는 끈이다.
에너지 흐름을 따르면 길이 열린다. 에너지의 일방향성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하나의 체계로 통일하여 입체적인 구조로 인식하게 한다. 그래야 낳는다. 낳아서 증식된다. 진보하고 발전하고 성장한다.
세계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흑백논리로 대칭구조에 갇혀서 교착되지 말고 에너지 흐름을 갖춘 통짜덩어리 인식을 얻어서 교착을 타개해야 한다. 열린 세계관의 입체적사고로 비약해야 한다.
∑ |
덕분에 대지는 봄비를 머금고,
덕분에 인류는 설렘을 머금소.
-주어는 생략하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