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을 통한 긍정 - 구조론에서 말하는 이중의 역설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제가 원문을 읽은건 아니고 .. 결론적으로 많은 사람이 구조론적인 사유를 하고 있다는 거죠.
언어는 주어+목적어+동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서는 반대로
동사+목적어+주어입니다.
즉 반대로 받아들여 뇌에서 한 번 걸러준다는 거죠.
* 동사는 먹다.
* 목적어는 밥
* 주어가 사람이라면
사람이 먹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밥이 사람을 유혹하여 먹음을 당한 거지요.
이것이 한 번 역설입니다.
한 번 역설은 손자병법이고 이걸로 큰 싸움을 이길 수는 없지만
순간적으로 임기응변하여 위기를 탈출하는 잔꾀는 됩니다.
성범죄자도 '사실은 내가 유혹당했다'고 우기며 버티면 그게 잔꾀가 됩니다.
그러나 이건 한 번 역설이고 이런 꼼수로 세상을 사는 사람은 타락합니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쓰레기들의 9할은 이 부류로 보면 됩니다.
그 밥을 조리한 주체는 사람입니다.
주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어는 그 주어가 아닙니다.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람은 집단으로서의 사람입니다.
즉 어떤 특수 사람이 아니라 보편 인간이지요.
즉 천하의 인간들이 그 밥을 조리한 겁니다.
지구에 사람이 없으면 밥도 없다는 거.
그러므로 어떤 사건이 나면
첫째 항우병법 - 눈앞에서 사고를 친 즉 동사를 찾아서 조낸 팬다.(대상을 바꾼다.)
둘째 손자병법 - 동사 배후에 숨은 목적어를 찾아서 조낸 팬다.(목적을 바꾼다.)
셋째 오자병법 - 목적어 배후에 주어를 찾아 조낸 팬다.(주체를 바꾼다.)
이 방법이 있는데 어느 카드를 쓸 것인가는
전장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는가에 따라 달리 해야 합니다.
즉 오자병법을 쓰는 사람은 손자병법도 겸할 수 있는 것이며
손자병법을 쓰는 사람은 항우병법(그런 말은 없음)도 겸할 수 있는 것이며
항우병법을 쓰는 사람은 다른 전술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합니다.
왜? 환경이 변화하기 때문에.
승리하지만 여론이 바뀌어 패배해 있습니다.
항우는 이겼는데 왜 져 있을까요?
외부에서 변수가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개입하는 매개변수는 다섯입니다.
항우병법은 그 다섯 중 셋째로 넷째를 친 것이며
항우한테도 지는 유방은 넷째로 다섯째를 치는 것이며
다섯째는 그냥 깨지는 것이지 남을 칠 수 없으며
병법은 두번째와 첫번째이며
첫번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고수인데 아무때나 쓸 수 없고
전장이 무르익어 비로소 그 상황이 되어야 쓸 수 있으며
두번째를 쓰는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틀어서 사용하는 것이며
보통 수순을 바꿔서 적을 혼란시킵니다.
첫번째를 쓰는 사람은 장기적으로 시스템을 갖춥니다.
그런데 이미 대비하지 않는 전쟁이 발발했다면 첫번째를 쓸 수 없죠.
그래서 동서고금의 임금들은 손 안 대고 코 푸는
두 번째 방법을 선호합니다.
첫번째를 쓰다가는 임금 자리에서 짤리거든요.
첫번째는 '강군을 만들려면 민주주의를 해야한다'는 건데
이건 임금한테 '꺼져!'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도 손자병법을 좋아합니다.
주어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주체사상은 주인을 섬기는 사상이고 주어교체는 주인을 바꾸는 거죠.
구조론의 원리는
누구나 감각적으로 아는 거지만
대충 아는건 현장에서 안 먹히고
철두철미하게 알려면 조금 뇌를 굴려줘야 합니다.
탄허 스님이,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 생활화 되지 못한 이유를 명쾌히 설명해 주었네요.
애벌레가 허물을 벗듯이 우리가 나비에 열광하는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