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봅니다. - 논어는 일높이 교육이다 논어를 한 마디로 압축하면 ‘눈높이 교육’이라 하겠다. 공자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가르쳤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높이 교육’이다. 공자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행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공자는 안회와 자공과 자로에게 각각 다르게 가르쳐서 각자의 개성을 살려주었다. 이를 고급반, 중급반, 초급반으로 이해한다면 곤란하다. 일의 기승전결 전개에서 어느 단계에 해당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공자는 소극적인 염유를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고, 적극적인 자로에게는 신중하게 처신하라고 가르쳤다. 아니다. 생각만 하는 사람에게는 다음 단계로 진도 나가서 행하게 하고, 생각없이 성급하게 행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먼저 생각하도록 한 것이다. 정답은 먼저 생각하고 다음 행하는 것이다. 생각이 먼저다. 깨달음이 먼저다. 일의 순서를 염두에 두고 논어를 읽어야 할 것이다. 공자에게서 배워야 할 하나는 ‘일이관지’다. 공자는 한 줄에 꿰었다. 그것은 깨달음이다. 무엇을 꿰는가? 일의 수순을 꿴다. 공자에게서 왕과 제후와 경대부와 사와 민은 세습신분이 아니라 일의 순서다. 왕은 일감을 얻어오고, 제후는 팀을 조직하고, 경대부는 의사결정하고, 사는 실행하고, 민은 그것을 누린다. 기업이라면 CEO와 이사와 팀장과 실무자와 고객이다. 군자는 이러한 다섯가지 일의 단계를 모두 책임질 수 있어야 하니 그것이 일이관지의 진정한 의미다. ### 제 1편 학이學而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군자의 참모습이 아니겠는가?” 부싯돌도 마주쳐야 불이 켜지는 법이다. 한 알의 작은 불씨가 요원의 들불을 일으킨다. 사건은 만남으로 시작된다. 그 만남은 ‘합이 맞는’ 만남이어야 한다. 유비, 관우, 장비가 만나면 합이 맞으니 기어코 일은 벌어진다. 처음 일을 벌여가는 사람은 결과에 신경쓰지 않으므로 즐겁다. 연주자는 악기와 만나서 기쁘고, 동료와 앙상블을 이루니 즐겁다. 합을 맞추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부싯돌을 쳐서 불씨를 얻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불이 어디까지 번져갈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작가와 예술가는 합을 맞추는 사건의 시작부분에 서므로 즐겁다. 그 사건의 결말은 독자와 관객에게 넘긴다. 집을 지어도 그러하다. 일당받고 일하는 노동자는 고苦롭지만 집주인은 즐겁다. 점차 완성되어 가는 집을 지켜보는 동안은 즐겁다. 군자는 일을 벌이는 사람이다. 결말은 역사가 답할 문제다. 그러므로 남이 알아주건 말건 상관없다. 내가 좋은 문제를 냈는데 남들이 쉽게 답을 맞추지 못한다면 즐겁다. 쉽게 답을 맞춰버리면 그게 무슨 재미냐고.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은 그 문제의 답을 맞추는 것이다. 공자는 학문을 처음 일으킨 사람이다. 학문은 일의 시초다. 먼저 학문을 이루고 다음 세상에 나가서 뜻을 펼친다. 먼저 학문이 발전하고 다음 이를 반영하여 산업화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학문은 개인의 시작이면서 인류의 시작이기도 하다. 학문에 의해 인류가 통합되니 개인에서 인류로 나아간 것이다. 인간은 어미의 뱃속에서 한 번 태어나고 학문에서 집단지성으로 다시 태어난다. 석가에게 있어 인생이 고苦라면 공자에게 있어 인생은 락樂이다. 세상에 나가서 뜻을 펼침은 성공과 실패가 있으나 학문은 그저 즐거울 뿐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적용하여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는 사람은 고롭지만 피타고라스는 즐겁다. 군자는 즐겁다. 군자는 의사결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험문제 푸는 사람은 고苦롭지만 시험문제 내는 사람은 즐겁다. 군자에 의해 의사결정된 것을 실행하는 과정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겠으나 의사결정은 성공과 실패가 없다. 그러므로 즐겁다. 탐험가는 즐겁다. 탐험가의 보고를 듣고 거기서 황금을 챙기려는 사람은 성공과 실패가 있겠으나 처음 탐험하고 와서 보고서를 쓰는 사람은 그저 즐거울 뿐이다. 만남에는 실패가 없기 때문이다. 헤어질 때 괴로워도 만날 때는 일단 즐겁다. 군자들의 공론이 모여 집단의 운명을 결정한다. 군자의 아이디어가 정치에 채택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공론의 형성에 기여하므로 즐겁다. 군자가 세상을 향해 말하든 말하지 않든 상관없이 확률 안에서 보이지 않게 영향을 미치므로 즐겁다. 군자는 말하지 않는 형태로도 말하기 때문이다. 배움은 진리와의 만남이다. 진리와 만나면 즐겁다. 고흐는 비록 한 점의 그림 밖에 팔지 못했으나 단숨에 그려낸 700점을 만나서 즐겁고, 이상은 폐병으로 일찍 요절하였으나 짧은 기간에 2000여편의 시를 쓰면서 즐거웠고, 소로의 첫 번째 책은 팔리지 않았으나 월든의 호숫가를 만나서 즐거웠다. 군자는 일을 벌이는 사람이다. 일은 기승전결로 이어간다. 타인의 평가는 결말에 이르러 얻어진다. 군자의 일은 3천년 단위의 큰 일이므로 결말을 신경쓰지 않는다. 일 벌이기는 만남으로 가능하다. 만나서 기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학이시습지’와 ‘유붕자원방래’ 그리고 ‘인부지이불온’ 이 세 구절을 따로 떼어서 각각 풀이하면 좋지 않다. 전체가 한 편의 시詩를 이루기 때문이다. 고시조와 비슷하다. 초장, 중장, 종장이다. 초장과 중장은 대칭을 이루고 종장은 호응을 이룬다. 문장은 대칭과 호응으로 담론을 완성시킨다. 그러므로 즐겁다. 배움은 개인의 영역이고 벗은 사람간의 사귐이다. 여기서 대칭을 발견하자. 나의 기쁨이 다른 사람의 기쁨으로 전염된다. 그런데 대칭시켜 간격을 벌리면 둘로 나눠져서 불안하다. 대칭의 불안정을 호응으로 봉합한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으로 시를 완성시킨다. 고시조의 초장은 아이디어를 던지고, 중장은 대칭시켜 간격을 벌리며, 종장은 호응하여 응답한다. 응답할 때 전율한다. 그러므로 시조의 종장에는 ‘어즈버’ 하고 감탄사가 들어간다. 필자의 글쓰기 공식도 같다. 대칭으로 벌리고 호응으로 닫는다. 그럴 때 전율할듯한 기쁨이 있다. 생각은 그냥 머리에 힘주고 있는게 아니라 수학문제처럼 공식에 대입하여 풀어내는 것이다. 명상한다면서 눈감고 있으면 잠 온다. 대칭과 호응으로 베틀의 씨줄날줄을 이루어야 한다. 정형화된 패턴이 있으므로 옛 시인들은 김삿갓처럼 앉은 자리에서 무한히 시를 뽑아낼 수 있었다. 현대시에도 강조되지 않을 뿐 그것은 있다. '1+1=2'라고 하면 '1'과 '1'은 '+대칭‘이 되고, '1+1'과 '2'는 호응이 된다. 학이시습지 + 유붕자원방래 = 인부지이불온이다. 언어는 기본 상대방의 호응을 전제로 한다. 호응되지 않으면 숨은 전제가 있다. 숨은 전제를 간파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 “교언영색巧言令色하여 말과 얼굴표정을 꾸미는 자는 어질지 않다.” 20여년 전 보궐선거에 나온 민주당 후보가 경주에서 당선된 일이 있다. 이기택과 홍사덕 등이 지원유세를 왔는데, 홍사덕이 목소리톤을 조절하여 할머니들을 울리는 것을 보고 소름이 확 끼쳤다. 그의 변절을 예견했음은 물론이다. 이기택은 마치 웅변학원 원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연설했다. 가짜는 반드시 표시가 난다. 정동영과 엄기영이 정치판에 뛰어들자 먼저 얼굴이 변하더라. 분장으로 가릴 수 있으나 본질은 속이지 못한다. 교회 목사의 웃는 얼굴도 그러하다. 그들은 보지 않고 내보인다. 자기 얼굴을 상대방 앞에 전시한다. 상대방이 원하는 표정을 지어준다. 이 수법으로 사람을 컨트롤하려 한다면 무서운 일이다. 소인배는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말을 대신해주는 사람이다. ‘니들 이런거 원하지 않아?’ 하는 식이다. 군자는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만 진리의 생각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집배원이 남의 편지에 손대지 않는 것과 같다. 기교로 수식하지 말고 간명하게 말해야 한다. 군자의 얼굴이 맑은 이유는 자기 감정을 배제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반응도 무시하기 때문이다. 프로의 태도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어린아이를 얼르는 듯한 할아버지의 인자한 표정은 좋지 않다.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신경 쓰는 안철수의 맹한 표정이 좋지 않다. 남이 원하는 표정을 서비스해도 좋지 않고, 자기 감정을 들켜도 좋지 않다.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베테랑의 표정을 지어야 한다. 정보는 전두엽에 저장되어 있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의 눈동자는 45도로 각도 위를 가리킨다. 전두엽에 저장된 정보를 꺼내는 표정이다. 눈이 자기 이마를 보고 있다. 눈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를 보면 사기를 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제 2편 위정爲政 “열다섯에 ‘지학’의 뜻을 세우고, 서른에 깨달아 ‘이립’하고, 마흔에 ‘불혹’하니 유혹을 넘어섰고, 쉰에 ‘지천명’이니 하늘의 진리에 이르렀고, 예순에 ‘이순’이니 세상을 받아들였고, 일흔 살에 ‘종심’이니 자유로워졌다.” 소년이 열다섯이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게 하는 본능의 영향을 받는다. 많은 부족민은 자녀가 열다섯 안팎이 되면 집에서 내보낸다. 그러므로 열다섯이면 세상의 모순을 보고 뜻을 세운다. 세상에 빈대붙을 수 있는 근거를 찾는다. 서른이면 세상과 맞서는 나만의 무기를 획득한다. 세상과의 싸움을 벌일 수 있다. 마흔이면 자녀가 생긴다. 집단의 지도자가 되므로 세상과 맞서고자 하는 마음을 극복한다. 무조건 상대의 반대로 도는 대칭행동을 극복한다. 쉰이면 제자가 일을 물려받으니 내 안의 칼을 내려놓는다. 2선으로 물러나 제자를 키우게 된다. 예순이면 제자가 독립하므로 온전히 믿고 맡긴다. 일흔이면 제자의 제자가 생겨나 3대를 이룬다. 구조가 복제된 것이다. 일이 완결되었으니 자연스럽다. 창업하여 회사를 운영해도 이렇게 되고, 조직을 이끌어도 이렇게 되고, 결혼하여 자식을 키워도 이렇게 된다. 열다섯이면 이성에 눈뜨고, 서른이면 결혼하고, 마흔이면 자식을 키우고, 쉰이면 장성한 자식과 함께하고, 예순이면 자식에게 일을 물려주고, 일흔에는 손자를 돌보며 쉰다. 일의 한 사이클이다. 일은 시작에서 끝까지 다섯 단계의 의사결정을 거친다. 열다섯에 뛰어들만한 일을 발견하고, 서른에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고, 마흔에는 일에 능숙해지고, 쉰이면 일을 완성시키고, 예순이면 일을 내려놓는다. 예순의 ‘이순’과 일흔의 ‘종심소욕 불유구’는 같은 맥락이다. 제자나 손자나 부하가 일을 물려받으므로 완결된다. 일의 관점으로 이해하기다. 일의 관점으로만 ‘일이관지’할 수 있다. 일의 준비와 시작과 진행과 완성과 승계로 보면 완벽하다. 열다섯에 준비하고, 서른에 시작하고, 마흔이면 전성기고, 쉰에 성공하고, 예순에 물려주어야 한다. 나이를 맞출 필요는 없으나 단계적 접근은 알아야 한다. ### “온고이지신이라 하였으니, 옛것을 익혀 새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 옛것은 어떤 일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일은 복제, 조합, 연출된다. 복제는 자연의 완전성을 인간에게로 가져온다. 조합은 둘을 짝지어 대칭시키는 방법으로 의사결정한다. 연출은 마지막으로 현지의 실정에 맞게 변형하여 적용한다. 원인이 옛것이면 결과는 새것이다. 전략이 옛것이면 전술이 새것이다. 진보-합리주의가 옛것이면 보수-실용주의는 새것이다. 세력전략이 옛것이면 생존전략은 새것이다. 수비전술이 옛것이면 공격전술은 새것이다. 외연확대가 옛것이면 내부점령은 새것이다. 이것이 일머리다. 일의 머리와 꼬리가 있다. 머리는 옛것이고 꼬리는 새것이다. ‘일의 흐름’으로 보는 관점이다. 먼저 지반을 다져 토대를 든든히 굳힌 다음 건물의 층수를 올린다. 먼저 착수하는 일이 옛것이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수확한다. 봄의 파종은 작년에 수확한 옛것으로 하고, 가을의 수확은 올해 자라난 새것으로 한다. 교육은 옛것으로 하고 취업은 새것으로 한다. 옛날 교과서로 고전을 배우지만, 현장에 투입되면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실무를 배운다. 진보는 생물의 진화와 마찬가지로 인류가 처음 지구에 출현한 20만년 전에 기획된 옛것에 의지하고, 보수는 당장 눈앞에 닥친 적을 제압하려 한다. 진보의 원칙주의를 익혀 보수의 임기응변까지 쓰게 되면 스승이 될 수 있다. 공자를 옛것에 집착하는 보수주의자로 본다면 실패다. 시대상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는 은나라의 낡은 농경민 문화가 주나라의 새로운 유목민 문화와 융합하여 일시적으로 흥성했다가 다시 농경민 전통으로 퇴행하는 시점이었다. 공자는 주나라 유목민의 새로움으로 은나라 농경민의 고루함을 혁신하려 했다. ‘옛것을 익혀’ 다음에 이어지는 ‘새것을 알면’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옛것과 새것을 연속적인 일의 전개로 보면 다음 수순을 알 수 있다. 옛것은 지켜야 할 자연법칙이고 새것은 현장에서의 임기응변이다. 둘을 연계시켜야 한다. ‘선원칙 후실용’이다. ### “군자불기라 하였으니, 군자는 쓰이는 그릇이 아니다.” 일의 ‘기승전결’이 있다. 군자는 기起에 선다. 군자는 처음 와서 판을 설계하고 일을 벌이는 사람이지, 마침내 일을 완성시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득을 취하고 이를 과시하여 우월함을 증명하려 하므로 인간이 작아지는 것이다. 집단 안에서 역할을 하려 들므로 작아져서 그릇이 되고 마는 것이다. 군자는 시스템 속의 존재다. 개인의 인격은 의미없다. 로마의 원로원처럼 군자는 한 곳에 모여있을 때 가치가 발생한다. 모여서 집단지성을 형성하기다. 역할을 얻으면 곧 자기 역할을 따라 흩어지게 된다. 지성에서 멀어진다. 군자는 처음 바둑을 발명하는 사람이지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아니다. 군자는 봄에 파종하는 사람이지 가을에 수확하는 사람이 아니다. 일은 복제, 조합, 연출된다. 복제는 자연에서 취하여 아이디어를 내고, 조합은 그것을 걸맞는 그릇에 담고, 연출은 웨이터가 홀에서 서빙한다. 군자는 자연의 것을 복제하는 사람이다. 그것을 조합하여 그릇에 담아 연출하여 남들 앞에서 인정받으려고 하므로 일의 흐름에 휩쓸려 작아지고 만다. 진보와 보수를 똑같이 중시하면 사람들은 전부 보수로 달려간다. 그것이 일의 흐름이다. 엔진은 차의 가운데서 중심을 잡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약간 앞에 있어야 자동차가 통제된다. 자동차가 달리므로 전방의 빈 공간까지 자동차에 포함시켜 판단해야 한다. 그러므로 가운데는 가운데가 아니다. 성과를 내서 당장 인정받으려는 실용주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 극기복례다. ### “군자는 말한 것을 실행하고, 이후에도 따른다.” 앞의 ‘군자불기’와 연결시켜 읽어야 한다. 군자불기는 기승전결의 기에 서라는 말이며, 여기서 말하는 실행의 강조는 기에서 그치지 말고, 승과 전과 결로 계속 이어가라는 말이다. ‘기起 서라’고 하면 기에 서겠다면서 일을 벌여놓고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 많다. 안철수처럼 의사했다가, 벤처했다가, 스펙쌓다가, 정치했다가 하며 계속 말을 갈아탄다. 이는 비겁한 도피다. 시작한 일은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지식인은 세상을 바꾸는 계획에 가담하는 사람이다. ‘군자불기’라고 가르치면 세상을 바꾸는 계획을 하는 사람의 그룹에 들려고만 하고 실제로 세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계획만 세우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 말을 앞세울 뿐 실행하지 않는 노자와 장자가 그러하다. ‘노무현 죽이기’를 전문으로 하는 사이비 지식인들 행태가 그러하다. 그들은 말로 논쟁할 뿐 결코 현장에 뛰어들지 않는다. 무지를 들킬까봐 겁내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것은 이념적 노선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해야할 일인데, 그 일에 착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꾸어야 한다’고 말로 선언하지 말고 실제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그 바꾸는 과정은 그 바꾸는 목적과 충돌할 수 있다. 흑인의 인권을 위해 일으킨 남북전쟁으로 너무나 많은 백인이 죽은 것이 그러하다. 전쟁이라는 수단은 인권이라는 목적과 배치된다. 그러나 긴 호흡으로 보면 합당한 결정이었다. 일은 기승전결로 이어가며 거듭 반전을 일으킨다. 의도와 반대로 되기 다반사다. 그래도 일단 일을 시작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변두리 지식인들은 바른 노선을 찾겠다며 말로 타인을 비판할 뿐 결코 일에 착수하지 않는다. 일에 착수하지 않으므로 옳고 그름이 검증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옳거나 그르다 하는 판단은 의미없다. 일하느냐 일하지 않느냐가 있을 뿐이다. 혁명도 일이고 진보도 일이다. 이상주의도 일이고 꿈도 일이다. 일해야 한다. 일은 사람이 도모하고 답은 천하가 낸다. 내가 일을 시작했는데 결과가 잘못되면 내가 이기고 세상이 진 것이다. 신과의 일대일이다. 내가 옳았는데도 결과가 나쁘다면 신이 진 것이다. 내가 이기면 된다. ###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罔하니 실속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깨달음을 강조한 말이다. ‘생각’을 깨달음으로 바꾸어도 좋다. 배우기만 하고 깨닫지 못하면 남 좋은 일 하게 되고, 깨달음만 있고 배움이 없으면 위험하다. 그런데 깨달음이 배움에 앞선다. 배움도 필요하지만 깨달음이 더 중요하다. 배우는 것은 일이다. 일 잘해봤자 남 좋은 일 하기 십상이다. 실속이 없다. 배움으로는 유능한 직원이 될 뿐 창업하지 못한다. 성과를 내봤자 대주주 배만 불린다. 일은 자연법칙이다. 깨달음은 그 일에 올라탄다. 배움 말이다. 깨달음은 기수가 말에 오르는 것이다. 기수가 말 보다 중요하지만 배우지 않으면 낙마한다. 당신이 만약 100을 원한다면 그 주변 1000에 조치해야 한다. 당신이 말을 타려면 그 말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쓰다듬어줘야 한다. 말과 친해두어야 한다. 말 앞에 늑대가 돌아다니지 않는지 그 주변까지 챙겨야 한다. 말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곧장 말잔등에 오르려 하니 말은 당신을 떨어뜨린다. 이론적 배움이 없는 깨달음의 위험이다. 깨달아도 구조론을 모르면 그렇게 된다. 깨달음이 있으나 배움이 없는 사람은 100을 원하면 곧장 100으로 간다. 반드시 주변에서 태클 들어온다. 자빠지고 나서 남탓한다. 태클은 원래 들어오게 되어 있다. 일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므로 내 생각대로 하는게 아니라 먼저 환경에게 물어보고 일에 착수해야 한다. 환경이 먼저다. 환경에 먼저 조치해 두어야 한다. 배우기만 하고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일의 첫 시작점을 찍을 수 없다. 창의할 수 없다. 새로운 일을 벌이지 못한다. 일의 시작점은 저울의 축이 되는 특이점이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만나는 지점이다. 강한 에너지로 그 지점을 돌파할 수 있다. 내 인생의 백퍼센트를 거기에 올인해야 한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 정도 에너지를 끌어올리려면 사전에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마침내 여기가 내 죽을 자리라는 사실을 알아채야 한다. 안중근 의사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고, 윤봉길 의사의 폭탄을 던질 수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에너지로 승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단하는 에너지는 깊은 생각에서 얻어진다. 배우기만 한 사람은 절대 결단하지 못한다. 운명의 한 순간에 의사결정에 실패한다. 정청래가 SNS세력 등 외곽세력과 손잡은 일은 잘한 일이나, 그게 원래 저격 들어오는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야 했다. 이렇게 될줄 몰랐다는 식이면 아둔한 거다. 21세기는 SNS시대라는 깨달음은 정청래에게 있었으나 정치판 돌아가는 법칙에 대해서는 초보적인 배움이 없었다. 알잖는가? 정치판에서 튀면 죽는다는 사실을. 죽을 각오하고 튀어야 한다. 깨달음은 에너지를 끌어올리고 배움은 현장에서 순조롭게 풀어낸다. 지식인은 배움이 있되 깨달음이 없어서 에너지를 끌어올리지 못한다. 창의하지 못한다. 자기 분야의 좁은 구석에 갇혀 있다. 안철수 하는 짓이 그렇다. 두루 배우기만 하고 하나라도 깨달은 것이 없다.
논어는 분량이 많아서 일부만 발췌 해석합니다. 구조론을 설명하는데 목적이 있으므로 적극적인 의역을 했습니다. 구조론이 목적이고 논어는 수단이며 논어가 목적은 아니라는 점 양해해 주시길! |
역할분담은 매우 위험한 말입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모두 역할분담을 통해서
단번에 강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강해져서 뭘 하느냐 하면 전쟁을 합니다.
포드시스템처럼 역할을 분담하면 단번에 강해질 수 있지만
그 강하다는 사실은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역할을 나누면 강해지지만
그 후에도 계속 역할을 고정시키면 안 된다는 거지요.
CEO가 CEO의 역할만 하면 회사가 망합니다.
대한항공 땅콩언니와 땅콩아빠처럼 되는 거지요.
베테랑은 CEO와 이사와 팀장과 실무자와 고객의 역할을 겸해야 합니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역할을 나누면 굉장히 강해집니다.
그런데 나는 질만 맡겠네 하면 일본처럼 세습왕조가 됩니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을 겸해야 합니다.
구조론은 질을 강조하고 장기전을 강조하고 오자병법을 주장하지만
급할 때는 량도 하고 단기전도 하고 손자병법도 합니다.
구조론은 바둑의 포석을 강조하지만 중반 전투와 막판 끝내기도 합니다.
나는 포석만 하겠다는 식은 망해먹기 딱 좋은 생각입니다.
서울대, 인서울, 지방대 하는 식으로 나누면 강해지지만
그것이 동시에 거대한 몰락의 징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넥센 감독은 초반에 선수들 역할을 딱 정해주는데
그게 큰 장점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결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역할을 나눠주되 그 역할을 바꿔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남존여비 부부유벌 장유유서 이런건 굉장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커다란 재앙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조직의 장이라고 치고
어떻게 조직을 장악하고 효율을 끌어낼 것인가?
실력대로 서열을 정하고 칸을 나누고 선후배 하는 식으로 차별하면
단번에 강한 조직이 되지만 그것을 고정시키면 망합니다.
메이저리그라면 실력에 따라 연봉차별, 마이너리그 차별로 차별합니다.
차별만 계속하면 당연히 망합니다. 물갈이 해줘야 합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고정시키지 않고 물갈이한다.
이부분의 실제적인 행동이 어떠해야 하나 조금은 감이 안오기는 합니다.
행동의 시기와 방법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네요.
1. 사람에 맞춰 눈높이교육이라 생각했는데 먼저 생각좀 하고 그다음 행동하라는 순서가 있었군요. 일의 순서!
군자가 질, 입자, 힘, 운동, 량 모든 단계를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은 어느 단계에 있어도 그 맡은바를 처리할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2. 군자는 일을 벌리는 사람이다.
떠오르는 것은 세계의 표준을 만들어내는 기구들, 그리고 프로그램이 아닌 플랫폼을 만들고 지배하는 회사들이네요.
3. 깨달음과 배움의 구분에 고개 끄덕입니다.
"마침내 여기가 내 죽을 자리라는 사실을 알아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