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호응呼應된다. 호呼는 부르는 것이요 응應은 응하는 것이다. 망둥이가 부르면 꼴뚜기가 응답한다. 안철수가 호呼하면 김한길이 응應한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하나의 사건이 또다른 사건을 촉발한다. 여기서 완전성이 성립한다. 언어 역시 하나의 생각이 또다른 생각을 복제하면 완전하다. 암수가 교미하여 새끼를 낳으면 완전하다. 새끼를 낳지 못하면 불완전하다. 언어도 그러하고 사건도 역시 그러하다. 이 구조에서 뇌가 반응한다. 전율하는 지점이 있다. 대칭 다음에 호응이라야 한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인간의 뇌는 한 꺼번에 두 가지 판단을 하지 못한다. 둘을 판단하려면 중첩시켜 하나로 만든 다음에 판단해야 한다. 이 절차를 어기는 방법으로 속임수가 가능하다. 망둥이가 뛰면 꼴뚜기도 뛴다. 여기서 망둥이가 뛴다는 사실만 이야기하면 명제다. 명제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망둥이가 왜 뛰었는지 말해야 판단이 가능하다. 그렇게 성의껏 말하는 사람이 잘 없다. 전제 빼고 진술만 읊조린다. 그리고 곧 호응을 요구한다. 안철수처럼 ‘죽어도 좋다’고 말하면서 누가 죽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말을 엉터리로 하는데 호응하면 낚인다. 신경통 환자는 날씨가 흐리면 무릎관절이 쑤신다. 기압이 떨어지면 관절내부의 압력이 높아져서 통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기압 이야기 해줘야 한다. 그것이 전제다. 판단할 수 있게 말해줘야 한다. 깨달음은 숨은 전제를 간파한다. 전제가 숨는 이유는 사람들의 관심이 호응에 쏠리기 때문이다.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 제비가 사건 1이면 비는 사건 2다. 안철수가 뛰면 김한길이 뛴다. 김한길로 주의가 쏠려버린다. 안철수가 왜 뛰었는지 들여다보지 않는다. 분위기를 띄워 호응을 하도록 유도한다. 낚인다. 흥분하면 당한다. 호응하지 말고 낚시질을 꿰뚫어봐야 한다. 영화감독들은 주로 가족이야기로 눈물을 짜서 관객의 호응을 유도한다. 배우가 눈물을 흘리면 관객도 눈물을 흘린다. 배우가 왜 눈물을 흘리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연 그게 눈물 흘릴만한 사정인가? 설득력이 없는데 말이다. 열 가지 의사결정 장애행동 곧 귀신, 종교, 증오, 혐오, 위세, 역할, 몸에좋다, 신경증, 중독, 망상은 모두 호응을 강제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호응이 꼭 ‘긍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해도 낚인다. 야바위꾼이라면 일체의 대응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도 저런 야바위가 있나. 하고 혀를 차며 멈춰섰다가 털린다. 대신 돈을 걸어준다며 지갑을 뺏는 사람이 있다. 이때 경찰이 나타났다고 소리치며 일제히 도주한다. 지갑을 되찾으려 하지만 행인1이 교묘하게 앞을 차단한다. 알고보니 모두가 한 패다. 사기꾼의 약점을 파악했으니 같이 혼내주자는게 사기꾼이 전매특허로 쓰는 수법이다. 합작으로 사기를 치는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기를 당한 거였다는 식이다. 자신이 범인이므로 신고도 못한다. 북한의 일거수 일투족에 일일이 반응하는 조중동과 박근혜 정권이 사실은 북한에 적대적 공생으로 호응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의 대칭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설계한 판이 아니면 돈을 걸지 말아야 한다. 주도권을 잃으면 찬성해도 낚이고 반대해도 낚이는게 법칙이다. 트럼프의 공약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는 생각하지 않는다. 트럼프의 다음 행동이 궁금하다. 어떻게든 호응하게 된다. 이미 낚여 있다. 트럼프를 비판해도 오히려 기름을 붓는 형국이 된다. 무엇인가? 사건은 기승전결로 이어진다. 누군가 기起에 서서 바람을 잡으면 찬성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거기에 대응하는 것만으로 승承이 되어버린다. 김종인이 기에 서버렸기 때문에 안철수의 반대든 김한길의 찬성이든 상관없이 승이 되었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가버린다. 에너지의 흐름에 휩쓸린다.
상대방의 말에 호응하지 말고 자기 언어 안에서 호응시켜야 합니다. 상대방의 말에 호응한다는 것은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고 의사결정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이유를 대도 자기 자신의 비전에서 이유를 대야지 상대방이 어떻게 했으니 내가 어떻게 응수한다는 식은 온당치 않습니다. 내가 천하통일의 비전을 세웠으므로 이렇게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자기 언어가 완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한국말은 동사가 뒤에 오기 땜시롱
전제 다음에 진술인데
영어는 동사가 앞에 오기 땜시롱
진술 다음에 전제가 됩니다.
그런데 영어가 더 논리적인 말입니다.
한국말은 직관적인데 그 직관이 위험하지요.
구조론은 과학적인 직관입니다.
호응 다음에 대칭 다음에 진술이라야 완벽한 언어가 되지만
실제 인간의 언어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전제 진술 호응이라도 무방합니다.
호응을 염두에 두고 전제와 진술을 구사해야 합니다.
호응이 뒤에 가더라도 반드시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거죠.
결론
호응 > 전제 > 진술이라야 하지만 문법이 이렇지 않으므로
전제>진술>호응으로 가도 되지만
인간의 아이큐 한계로 인해
앞에 오는건 제대로 생각을 못하므로 이렇게 하면
전제를 가짜로 깔게 됩니다.
거짓전제>진술.. 호응은 생략.. 멸망
호응>전제>전술
이 순서를 항상 생각해야 겠군요.
이제서야 조금, 아주 조금 구조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를 물어보면 열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삿말이 일종의 호응인데
인사를 먼저 해야 하는 거지요.
전제-->전술-->호응 이런순서로 말을 해야 완전성을 획득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