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으로 이겨라 사람의 인격을 규정하는 것은 의사결정능력이다. 의사결정능력은 깨달음에 의해 획득된다. 동양사상에는 그 깨달음이 있고 서양사상에는 그 깨달음이 없다. 그들은 기독교에 매몰되어 성직자에게 의사결정을 위임해 버렸다. 말하자면 의사결정하지 않기로 의사결정한 것이다. 그 어떤 서양 철학자도 기독교의 한계를 온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니체가 한 번 슬쩍 째려봤을 뿐이다. 실존주의와 구조주의가 있으나 기독교의 답을 부정했을 뿐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들은 회의하고 의심할 뿐 능동적으로 일을 벌이지 못했다. 뒤에서 풍자하고 야유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마르크스가 있다하나 기독교의 사유를 변용했을 뿐이다. 근본 사유의 틀을 깨트리지는 못했다. 동양사상의 경쟁력은 깨달음에서 나온다. 깨달음Bodhi은 불교용어로 출발하고 있으나 중국의 선종불교에 와서 더욱 세련되어졌다. 중국에는 도道, 성性, 리理 등으로 말해지는 고유한 깨달음의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깨달음을 이루어 ‘일이관지’ 했지만, 정작 깨달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주역의 밸런스 개념을 지나가는 말로 언급했을 뿐, 자신이 어떻게 ‘일이관지’ 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반면 노자는 깨닫지 못했기에 깨달음 그 자체에 천착했다. 노자는 열싦히 깨달음을 말했으나 화두를 던지고 단서를 남겼을 뿐 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깨달음은 인간의 언어감각에서 유래하므로 아는 사람은 그냥 안다. 공자의 표현으로는 ‘나면서 아는 사람’이다. ‘生而知之者 上也’라 하였으니, 나면서 아는 사람이 으뜸이라고 했다. 이는 공자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석가는 나면서 아는 사람이다. 육조 혜능도 나면서 아는 사람이다. 수행은 깨달은 후에 그것을 표현할 언어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돈오는 불필요, 돈수도 불필요, 깨달음의 길이 앞에 있으니, 그 길을 갈 것이냐 말것이냐 용맹한 결정이 있을 뿐이다. 깨달음은 위대한 결단이며, 결단은 만남에 의해 이루어진다. 만남이 중요하다. 갈림길을 만나면 시키지 않아도 결단하게 되어 있다.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막다른 길 앞에서 그대는 어찌할 것인가? 되돌아가든 아니면 절벽을 기어오르든가 선택하게 된다. 나면서 아는 사람은 그 절벽을 오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먼저 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오른다. 되돌아가는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 폴리네시아의 부족민들은 19세기에 바다를 가로지르는 큰 범선을 무수히 보고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작은 카누가 지나가면 잘만 발견한다. 수평선 위를 지나가는 콜롬부스의 범선을 보았지만 구름을 보거나 신기루를 본 것처럼 자연현상의 하나로 여기고 무시한다. 아예 뇌가 반응하지를 않는다. 소실점은 그냥 보면 보인다. 화음은 그냥 들으면 들린다. 그러나 동양인은 5천년 동안 그 누구도 소실점을 보지 못했다. 피타고라스가 대장간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은 화음을 동양인들은 5천년간 아무도 듣지 못했다. 눈도 같은 눈이고 귀도 같은 귀인데 뇌가 반응하지 않는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만나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는다. 방아쇠처럼 깨달음을 격발하는 장치가 있는 것이다. 두 시선이 중첩하는 곳에 소실점이 있다. 두 소리가 중첩하는 곳에 화음이 있다. 두 의미가 중첩하는 곳에 깨달음이 있다. 그것은 만남이다. 깨달음은 만남이다. 만나면 격발한다. 공이가 뇌관을 만나 소총을 격발하듯이. 선이 선을 태워 소실점을 이루고, 음이 음을 태워 화음을 이루고, 언어가 언어를 태워 깨달음을 이룬다. 우리는 단어에 뜻이 있다고 여긴다. 사실은 언어에 뜻이 있다. 그 단어를 태우는 명사, 그 명사를 태우는 주어, 그 주어를 태우는 전제, 그 전제를 태우는 조건문에 뜻이 숨어 있다. 우리는 수레에 화물이 실려있다고 믿지만 알고보니 그 수레가 곧 화물이었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태워야 한다. 공자는 ‘일’에 태웠다. 유목민들은 목축을 떠나기 앞서 목초지를 분배하는 일에 태워 신뢰를 얻고, 사냥꾼들은 명적을 쏘아 몰이꾼에게 신호를 보내는 일에 태워서 신뢰를 얻고, 축구선수는 패스에 태워 신뢰를 얻고, 민주주의는 토론에 태워 신뢰를 얻는다. 그것은 모두 현재진행형의 ‘일’이다. 일의 흐름에 태우면 깨닫게 된다. 태워진 물건이 아니라 태우는 구조에 뜻이 있다는 사실을. 인삿말을 하면 메시지를 전달받는다고 여겼는데, 사실은 연락상태의 유지 그 자체가 메시지였다는 사실을. 수레에 짐을 싣는게 아니라 수레가 곧 짐이라는 사실을. 퍼포먼스로 메시지를 전하는게 아니라 퍼포먼스가 메시지임을. 그림에 뜻이 있는게 아니라 그림 자체가 뜻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림을 보고도 소실점을 모르고 소리를 듣고도 화음을 모르고 말을 하고도 깨닫지를 못하고 그런 식이라면 지나가는 범선을 두 눈으로 뻔히 보고도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폴리네시아 부족민과 무엇이 다릅니까? 안 보이는건 그렇다 치고 보이는 것은 좀 봅시다. 보이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