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Vko-3LPGb_o
영어 관사의 비밀 A, An, The 초간단 구분법!
https://www.youtube.com/watch?v=gaVDJFwHzRk
영어 관사의 비밀 심화 편 (I go to the school vs. I go to school)
처음 영어를 배울 때 궁금했던 것 중 하나는 "영어는 왜 그렇게 단수형과 복수형, 추상형에 집착할까?"였습니다. 한국어는 대충 말해도 대충 알아들을 수 있는데, 영어하는 애들은 왜 굳이 쓸데없는 걸 만들었을까요?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영어 이전에 유럽에 흐르는 언어철학의 핵심은 무맥락contextfree입니다. 한국인이라면 주어진 어떤 한 문장만으로는 나의 의사를 100%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흔히 다비드 상의 고추만 떼어서 보면 외설이지만, 그 주변을 보면 예술이라고 하는 것을 잘 이해하는 거죠. 그러므로 한국인은 문장의 완성도보다는 전후 맥락의 완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왜냐하면 언어철학에 연역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이 말하려면 연역해야 하므로 잘하기는 어렵지만, 하여간 일단 연역합니다. 뒤따르는 문장의 의미는 이전에 뱉었던 문장에 상당히 종속적입니다. 그래서 한국어는 굳이 명사의 복수형과 단수형, 추상형을 구분할 필요가 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 문장에서 충분히 추론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한국어는 문장내 단위가 의미를 갖지 않고, 문장간 단위가 의미를 가지는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가 주목동의 어순이고요.
반면 영어는 문장 안에서 완성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단어의 의미를 스스로 완성시키려고 합니다. 이른바 원자론이 언어에 깊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죠. 그 결과 복수형인지 단수형인지 추상형인지를 단어에 표현합니다. 그게 맥락이거든요. 그래서 한국인이 영어를 잘 알아듣기도 어렵고 쓰기도 어렵습니다.
영어권에서 살면서 그들의 철학을 자연스럽게 익히지 않고, 한국에 살면서 영어를 배우려고 하니, 철학 충돌으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영어에도 맥락을 중시하려는 흐름이 역사에서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이죠. 괜히 러셀이 이발사의 역설을 말한 것이 아니며,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게임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발사의 역설은 개별 존재가 아닌 엮인 존재를 말하는 것이며, 언어게임은 단어에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 맥락(게임)에 의미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저작인 논고에서는 "단어 x의 정확한 의미는 필요한 경우 면밀한 분석에 의해 해명되어야 한다."라고 하지만,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그 단어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주: 맥락)를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합니다. 그의 후기 저작에서 나타나는 표현인 게임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단어를 쳐다보지 않고 게임(상황)을 쳐다보고 의미를 생각하라는 겁니다. 결국 그는 원자론에서 맥락론으로 갈아탄 겁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서양철학사의 스타가 된 거죠. 하지만 언어에는 여전히 원자론적 사고 습관이 남아있습니다. 그게 단수형, 복수형, 추상형이죠. 근데 골때리는게 현대의 대표적인 언어학자라는 촘스키는 무맥락론자입니다. 저런자가 목소리를 내는 걸 보면 환장하는 겁니다. 그의 사상을 받아들인 컴퓨터 언어학의 제자들(마이크로소프트)은 숱하게 망하고 있죠. 구글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받아들여(말이 그렇다는 거) 번역기를 만들어서 승승장구 하고 있고요.
물론 영어인도 연역을 합니다. 하지만 이론이 없으므로 그것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영문법이 개판이 됩니다. 뒤죽박죽 개판이죠. 촘스키가 저러는 것도 나름 고충이 있는 겁니다. 안 보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