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인의를 가르쳤고, 노자는 도덕을 가르친 걸로 되어 있다. 석가의 자비, 예수의 사랑, 소크라테스의 지혜도 알려져 있다. 인의라느니, 도덕이라느니, 자비라느니, 사랑이라느니, 지혜라느니 이딴 말은 사실 초딩도 할 수 있는 말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에 지혜가 없었고, 예수 이전에 사랑이 없었겠는가? 천만에! 노자 이전에도 도덕은 있었고, 공자 이전에도 인의는 있었다. 있을 것은 구석기 시절부터 다 있었다. 성인은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점이 각별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웃기셔들! 실천은 개뿔, 예수는 사랑도 해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다. 석가는 자기 나라의 멸망조차도 막아내지 못했다. 노자는 무위無爲를 가르쳤으니 도덕이라고 실천할 리 없다. 논어에 ‘공자는 이利와 명命과 인仁을 말하는 일이 드물었다.’는 대목이 했으니 공자를 두고 ‘인仁’을 가르친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이상하다. 사랑이니 자비니 하며 한가한 소리나 늘어놓을 만큼 그들은 삶은 여유롭지 않았다. 사실 절박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진짜는 따로있는 법, 공자, 노자, 석가, 예수, 소크라테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들이 성인으로 대접받는 근거는 무엇인가? 족보다. 공자에게는 십대제자가 있다. 명성을 얻은 제자만 70명이라고 한다. 부풀려진 점이 있겠으나 제자가 3천 명이라고도 한다. 석가에게도 십대제자가 있다. 예수의 열두제자도 있다. 노자는 직계 제자가 없지만 장자가 있고, 소크라테스에게는 플라톤이 있다. 생각하자. 이들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가르쳐서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족보가 있어야 스승이 된다. 학문은 인류의 공동작업이다. 만인이 참여하는 큰 작업장을 열어야 진짜다. ‘인의’ 같은 개풀 뜯어먹는 소리는 초딩들이나 하는 거다. 공자도 입에 담는 일이 드물었다는 인의仁義를 떠들면 안 된다. 바보냐? 정신차려야 한다. 이곳은 알만한 사람들이 알만한 이야기를 하는 곳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치려 한 진짜는 따로 있다. 그것은 ’의사결정능력’이다. 군자의 모습이다. 전국시대 조나라 재상 ‘인상여’가 군자의 모범이다. 임금과도 맞장뜨는 패기가 있었다. 부디 이르노니 공자에게서 ‘인의’를 찾지 말고, 노자에게서 ‘도덕’을 찾지 말라. 공자의 진면목은 임금과 당당하게 맞서는 패기에 있고, 노자의 진면목은 미국의 은자라 할 ‘월든’의 ‘소로’를 연상시키는 ‘불복종’에 있다. 도道니 덕德이니 똥같은 소리다. 중국사에는 요순시대의 허유許由로부터 시작하여 유명한 백이, 숙제에 이르기까지 정치참여를 부정하고 초야에 묻혀 은거하는 전통이 있었다. 논어에도 은자가 찾아와서 ‘거 알만한 양반이 개고생 하는구만. 헛심 쓰지 말고 우리처럼 은거하게.’하고 권하는 장면이 있다. 노자는 일체의 권력과 폭력에 더하여 논리와 지혜까지 모두 부정하는 극한의 논리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정치참여를 반대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극히 정치적인 기동이다. 노자는 무위를 표방하므로 제자를 둘 수 없지만 역시 역설적으로 가장 큰 무리를 만들어냈다. 다만 그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이다. 비관주의자 노자가 은자의 족보를 만들었다면, 낙관주의자 공자는 군자의 족보를 만들었다. 노자는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임금을 견제하는데 성공했고, 공자는 현실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임금을 상대하였다.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서 은거하던 때가 1845년, 남북전쟁은 1860년이다. 알라모의 충돌을 계기로 미국이 멕시코를 짓밟고 사람 죽이는 재미를 깨달은 해가 1836년이다. 소로는 장차 일어날 남북전쟁을 예감하고 전쟁맛에 폭주하는 권력에 대한 불복종을 선언한 것이다. 그의 예견은 맞아떨어져서 남북전쟁으로 103만명의 사상자가 났으니 인간존재의 추악함에 낙담할만 하다. 겉으로 내세우는 아이디어에 대한 찬반을 떠나 그 이상의 눈으로 봐야 한다. 알만한 양반이 인의니 도덕이니 하며 등신같은 소리 지껄이면 안 된다. 공자의 진짜는 의사결정능력이다. 이에 대한 권력이다. 권력은 종교권력과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있다. 낙관주의자 공자는 이에 문화권력으로 맞섰다. 그것이 공자의 예악이다. 비관주의자 노자는 은거와 야유와 풍자와 조소로 맞서려 했다. 인간은 집단생활을 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의 사회성은 필연 권력의 잔인성을 연출하게 된다. 견제 들어가야 한다. 고삐를 당겨서 폭주하는 권력을 멈춰세울 것인가, 아니면 당근으로 유인하여 잘 달래볼 것인가? 이에 도가, 묵가, 법가, 유가의 다양한 해법이 제시되는 것이다. 공자든 노자든 예수든 소크라테스든 이 관점에서 봐야 한다.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낙관주의자였고 참여주의자였다. 마틴 루터 킹과 마르크스 역시 그러하다. 노자와 소로와 간디는 그 반대편에서 철저하게 혹은 적절히 견제하는 길을 찾았다. 권력이라는 사나운 야생마를 어찌할 것인가? 도망쳐서 몸을 보존하라고 말한 사람이 노자다. 그 말을 길들여 보겠다고 나선 사람이 공자다. 방법은 의사결정능력이다. ‘인의’만으로 야생마를 길들일 수 없다. 장난하냐? 진지하게 가자. 안회의 인의에 더불어 자공의 지혜와 자로의 용맹이 아니면 안 된다. 물정을 모르고 인의타령이나 늘어놓는 따분한 샌님의 이미지는 후대에 와서 권력자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공자는 안회의 인의 못지 않게 자공의 지혜와 자로의 용맹을 강조한 사람이다. 공자는 자로의 용맹을 부러워하고 한편으로는 재능있는 자공과 염구의 출세도 부러워했다. 공자 안에 셋 있다. 안회와 자공과 자로를 합치면 공자다. 인상여는 ‘인의’와 ‘지혜’와 ‘용맹’이라는 공자의 세 가지 미덕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다. 그 결과는 임금과 맞장 뜨는 패기다. 공자는 그런 사람이다. 세월이 흐르고 공자의 가르침은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게 변질되었다. 인의만 살아남고 지혜와 용맹은 무시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공자’라고 하면 ‘아 그 용맹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안회의 인의가 중요하다하나 자공의 지혜와 자로의 용맹이 오버하지 않도록 수위조절하는데 사용될 뿐이다. 답은 의사결정이다. 인의와 지혜와 용맹은 셋이 세트를 이루니 이 중에 하나가 빠지면 남은 둘도 죽는다. 공자의 가르침은 당대에도 옳게 전달되지 않았다. 벼슬하지 않고 3년을 진득하게 배우는 자가 없다고 공자가 탄식했으니 그 사정을 알만하다. 공자의 교과서는 그다지 두껍지 않았다. 육예는 예절, 음악, 활쏘기, 마차몰기, 서예, 산학이니 쉽게 배운다. 머리 좋은 사람은 시경의 300편 시도 금방 외운다. 석가의 방대한 가르침도 죄다 암송되는 시절이었다. 입문하기 전에 육예를 미리 배우고 오는 사람도 많았으니 공자에게서 직접 예악을 배운 고참제자 ‘신진’과, 뒤에 스펙쌓기로 찾아온 신참제자 ‘후진’ 사이에 갈등이 있었을 정도다. 자로의 거문고 연주 솜씨를 보고 후진들이 무시한 사건이 그 예다. 진정한 배움은 하나다. 구조론 용어로는 ‘신과의 일대일’이다. 춘추시대라면 제정일치 시대의 전통이 남았으니 왕이 곧 신이다. ‘왕과의 일대일’이다. 그래서 임금 군君 자를 붙여 군자君子다. 사신으로 타국에 파견되어 임금의 일을 대리한다. 임금망신을 시키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천하인이 되어야 한다. 천하관을 가져야 천하인이 된다. 인류의 대표자 마음을 가져야 천하관을 얻는다. 곧 호연지기다. 임금의 마음을 가져야 사절의 임무를 옳게 수행할 수 있다. 임금과 같은 집단의 대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사실이지 인류 모두에게 있다. 그것이 인간의 사회성이다. 대개 사회적 신분상승 욕구로 나타난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신분상승이다. 명성이나 금전이나 지위는 신분상승을 입증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진짜는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에 서고 싶은 것이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이거다. 누구도 이 본능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학생이 대학에 진학하는 이유도 신분상승에 목적이 있다. 신분상승은 지식을 머리 속에 집어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인들의 배타적인 인적 네트워크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야 신분상승이 이루어진다. 대학의 가장 큰 의미는 대학생 동료를 얻어 세상의 의사결정 중심과 연결되는 것이다. 왜 사법고시는 폐지되어야 하고 로스쿨은 받아들여져야만 하는가? 사법고시 출신들은 자신을 편들어줄 만만한 동료가 없다. 선배의 지배를 피할 수 없다. 기수대로 서열이 생겨나서 독립적인 의사결정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한국의 검찰이 떡검으로 타락하는게 이유가 있다. 선배가 시키면 시키는대로 노무현에게 개기고, 이명박 밑을 핥는다. 진짜 검사는 한국에 없다. 로스쿨 출신은 동료와 세력을 이루므로 쉽게 굽히지 않는다. 이것이 대학의 존재이유다. 공부가 중요한게 아니다. 지식은 책 속에 다 있는데 구태여 그것을 머리 속으로 옮겨놓을 이유가 없다. 뇌 속의 하드디스크 낭비다. 한솥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함께 데모하여 추억과 감정을 공유하는게 중요하다. 못 배우면 지식이 없는게 아니라 동료가 없게 되고, 동료가 없으면, 약해져서 당당한 의사결정을 못한다. 세력이 없는 아웃사이더는 언제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초조해져서, 지름길을 찾아 윗선에 줄대고 아부하며 꼼수를 쓰다가 한 방에 저격당한다. 아웃사이더의 몰락공식이 있는 것이다. 홍준표가 걸핏하면 아웃사이더인척 하는게 이유가 있다. 홍준표 역시 그 바닥에서는 겉도는 신세인 거다. 무엇인가? 문제해결능력이 문제라면 공부하면 된다. 책을 달달 외우면 된다. 머리 좋은 제자는 3개월 안에 공자의 모든 교과서를 외운다. 목간으로 엮은 책이라서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으나, 천하에 큰 불을 지르지는 못한다. 새로 일을 벌이지는 못한다. 일을 벌일줄 모르는 사법고시 출신은 떡검들처럼 권력의 얌전한 개가 된다. 지식만 있으면 그렇게 된다. 인의는 지식의 편협에서 벗어나 천하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며, 공론을 일으켜 큰 세력을 이룬다. 대담하게 일을 벌여가는 것이 인의다. 그 일은 천하의 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공자의 많은 제자들은 스펙이 목적이었다. 3천 명의 제자가 있었다 하나 실무를 배워 벼슬하는게 목적이었다. 임금이 벌여놓은 잘못된 일을 수습하는게 그들 사士와 대부의 일이다. 공자의 십대제자에도 속하는 염구가 대표적이다. 제나라를 물리치고 세입을 늘리는 등 실무 일을 잘해서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나 세금을 올리는 불인한 행동으로 공문의 입장에서는 배신자가 되었다. 이런 식이다. 고생해서 제자를 키워놓으면 다들 자기 출세에나 골몰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공자의 참뜻은 전해지지 않았다. 뜻을 이을 안회는 먼저 죽었다. 인간의 진짜 바램은 인류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쳐들어가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세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대개 지식으로 그 연결하는 라인을 꾸리지만, 지식은 일의 말단단계에나 소용되니 시다바리 밖에 못하는 현실이고, 인맥으로 어찌한다 해도 중간단계가 한계다. 더 이상 못 간다. 인맥은 결국 정치다. 지식은 정치를 이기지 못한다. 정치는 종교에 밀린다. 진정한 연결은 천하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는 것이며 그것이 공자의 인의다. 인의는 종교를 이긴다. 그래서 안회의 인의가, 자공의 정치와 자로의 용맹에 앞선다. 그냥 사람 좋은 인의는 가짜다. 착한 사람이 되라는게 아니다. 천하가 아플 때 내가 아파야 한다. 소통능력과 공감능력이다. 지식만으로는 필부의 용맹과 다를 바 없다. 활쏘기 마차몰기도 공자의 육예에 속하는 지식인데 이는 항우의 주특기가 아닌가? 유방의 인맥이 항우의 지식을 이긴다. 필부의 용맹이 선비의 기개를 이기지 못한다. 필부는 혼자이고 선비는 다수다. 소승과 대승의 차이와 같다. 필부의 지식은 소승이고 선비의 인맥은 대승이다. 다수가 여론을 만들고 백년 동안 줄기차게 상소를 올려대면 임금도 물러설 수 밖에 없다. 조선왕조의 반역자인 사육신도 나중에 신원되는 편이다. 인의는 그 대승의 인맥을 능가한다. 예수가 보여준 특별한 소통능력이 그러하다.
◎ 인의 - 일의 시초 단계에서 의사결정을 촉발한다. 공부하는 이유는 셋이다. 첫째 지식을 얻는다. 둘째 인맥을 얻는다. 셋째 인의를 얻는다. 첫째의 지식은 9급 공무원 정도 된다. 둘째의 인맥은 간부로 출세하게 한다. 요령있게 정치를 잘해야 간부가 된다. 셋째 인의는 인류의 대표자로서 새로 일을 벌이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참으로 드물다. 공자는 의사결정능력을 가르쳤다. 의사결정은 첫째 일 벌이기, 둘째 일감 얻어오기, 셋째 일 완수하기로 완결된다. 일벌이기는 공자 밑에서 진득하게 인의를 배운 사람이 할 수 있고, 일감 얻어오기는 인맥을 쌓은 간부가 잘하고, 일 완수하기는 전문지식인이 할 수 있다. 의사나 검사도 시킨 일은 잘 해낸다.
◎ 일의 초반 복제단계 – 인의를 배운 군자의 소통능력이 소용된다. 학교에 가는 것은 직장잡기 위함이 아니라, 집단의 공론형성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인류의 의사결정그룹에 드는게 목적이다. 그런 사람이 선비다. 국가의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선비는 무엇이 다른가? 귀천이 다르다. 의사결정그룹에 들면 귀貴하다고 하고, 의사결정그룹에서 배제되면 천賤하다고 한다. 지금은 누구나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하여 의사결정에 가담하지만, 민주주의 형식이 그러할 뿐 실제로는 몇몇 어둠의 세력이 설계해놓은 판에 낚여서, 맹목적으로 1번에 투표할 뿐, 의사결정에 가담하지 못한다. 그들은 천하다. 사회적 신분의 귀천은 지금 없어졌으나 인간의 본질에서는 귀천이 없어지지 않았다. 오유는 귀하고 일베는 천하다. 민주는 귀하고 새누리는 천하다. 군자는 귀하고 소인은 천하다. 군자는 의사결정그룹에 들고 소인은 들지 않는다. 보수는 의사결정한다 해도 역사가 뒤에 뒤집어 버리므로 무효가 된다. 보수가 뭔가 결정한다해도 인간의 결정이 아니라 동물의 생존본능이므로 논외가 된다. 천하관이 있어야 한다. 천하단위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귀하다. 귀천의 구분으로 군자와 소인을 가른 것이 공자의 진짜 가르침이다. 의사결정그룹에 가담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지식과 인맥으로도 세상의 의사결정 중심과 연결될 수 있으나 가짜다. 인의로 연결되어 있어야 진짜다. 천하가 아프면 나도 아파야 인의로 연결된 것이다. 안회는 천하와 연결되었으니 칭찬받았고 자공은 연결되지 않았으니 꾸지람을 들었다. 기독교의 원죄설은 거짓이나 세상의 중심과 다이렉트로 연결하고픈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한다. 죄는 아담이 지었고 예수가 갚았는데 내게 원죄가 있다고 한다. 내가 아담과 예수의 상속자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죄를 상속했지만 왠지 왕좌를 상속한 기분이 든다. 아버지의 빚을 상속했는데도 기분이 좋다. 내게도 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부모가 없는 고아인줄 알았는데 말이다. 먼 조상과 연결된다는 것은 기분좋은 소식임에 틀림없다. 불교의 면벽 9년과 같은 고행, 무슬림의 라마단 고행, 기독교의 희생은 모두 인류의 중심과 연결되고 싶은 원초적 본능을 자극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도리어 배가 아프지만 사촌이 죽으면 그 고통이 공유된다. 어린이가 유괴되면 전 국민이 함께 고통을 느낀다. 세월호 희생자의 고통은 널리 공유된다. 그 고통에 의해 연결된다. 그 자리에 신을 초청하고 신과 직접 연결되고자 하는 심리다. 신의 의사결정에 가담하고 싶은 것이 본질이다. 의사결정에 의해 인류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천하관이며 이 천하관을 얻은 사람이 군자다. 천하단위로 의사결정할 수 있다. 혁명은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 모두가 연결되고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역사다. 내가 역사에 남을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려면 절대로 개인주의가 있어야 한다. 집단평가에 대해 개인평가라야 한다. 비뚤어진 우월주의는 강한 집단에 소속되어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하지 않고 묻어가려는 것이다. 인종주의, 성차별, 지역차별, 공격적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는 모두 의사결정하지 않고 집단에 묻어가려는 소인배의 비겁한 심리가 숨어 있다. 집단에 묻어가려는 자는 먼저 집단을 결속시켜서 집단의 존재를 드러내려 한다. 집단의 권력을 부각하기 위하여 마녀사냥과 같은 부족민의 종교행동을 저지른다. 트럼프 행동이며 매카시즘 행동이고 일베충행동이다. 대중을 겁줘서 다른 집단을 미워하게 하는 방법으로 자기집단을 결속시킨다. 증세가 심해지면 신격호와 같이 히스테리를 부려 부족의 구성원들이 24시간 내내 자기를 쳐다보고 있게 만든다. 공자는 집단차별이 아닌 개인평가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개인을 평가하는 방법은 예악禮樂이다. 예악은 문文이니 문화다. 현대의 용어로는 교양과 매너와 에티켓이 예禮이고, 패션. 디자인, 트렌드, 예술이 악樂이니 합쳐서 문화예술이다. 예로써 개인을 평가하고 악으로써 개인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석가는 인생을 고苦로 규정했지만 공자는 락樂으로 규정했다. 논어 첫줄부터 즐거움이 언급된다. 즐거운 이유는 만나기 때문이다. 학이시습지면 학문과의 만남, 유붕이 자원방래하면 친구와의 만남, 인부지이불온이면 자기 자신의 진면목과 만남이다. 인류의 의사결정중심으로 쳐들어가서 모두 만난다. 그것이 군자다. 사람을 평가하기로 하면 합격자와 불합격자로 나뉜다. 합격자는 군자가 되어 의사결정그룹에 들고 불합격자는 예악을 통해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서 군자가 된다. 음악가는 음악의 군자가 되고, 화가는 그림의 군자가 된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군자가 된다. 못해도 오타쿠가 된다. 서구의 니체는 막연히 권력의지를 부추겼다. 야생마를 풀어놓고 통제하지 못했다. 히틀러가 니체를 찬양하는 것이 이유있다. 세계대전의 비극은 니체에게도 책임이 있다. 소로와 노자는 야생마 길들이기를 포기하고 대신 이를 경고했다. 장차 큰 비극이 있으리라. 그들의 예견은 맞았다. 전국시대의 중국과 근대의 유럽은 끝없는 전쟁의 참화속으로 뛰어들었다. 도처에서 인간이 죽어나갔다. 전쟁 앞에 인류의 지식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공자는 낙관주의자였다. 일부 야생마를 통제해 보였다. 군자가 해낼 수 있다. 21세기에 무엇이 필요한가? 현실도피로 가서 세상을 바꾸는 일에 가담하지 않고, ‘내가 뭔가를 안다’고 우기면서, 지식자랑을 한다면 똥이다. 도道를 알아도 똥이다. 지식이 현실도피의 수단이 되고, 실용주의가 현실도피의 수단이 된다. 천하의 큰 일을 벌이지 않고, 남과 비교하여 조금 낫다며 오십보로 백보를 자위하는 판이다. 괴력난신은 소인배의 종교행동이다. 무례한 위세과시는 소인배의 정치행동이다. 공자는 이를 금지시키고 대신 개인주의로 가서 예악을 베풀었다. 그러나 증자는 종교행동을 버리지 못했고 자공이나 맹자는 정치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안회는 죽고 가르침은 끊어졌다. 공자의 예禮는 주로 신분이 낮은 사가 위세를 부려 대부의 행세를 하며, 대부가 위세를 부려 제후의 행세를 하고, 제후가 위세를 부려 왕의 행세를 하는 것을 견제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를 정반대로 알고 있다. 가난해도 장례나 혼례는 임금처럼 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중국인들의 결혼식은 참으로 요란하다. 외제차 수십대로 퍼레이드를 벌이는 짓은 공자가 비난한 무례다. 방자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180도로 왜곡되어 전달되었다. 당신이 아는 공자는 가짜다.
◎ 인의 – 괴력난신을 추구하는 부족민의 종교행동을 하지마라. 부족민의 종교본능은 위태롭다. 부족은 원래 집단의 실체가 없다. 국가는 법도 있고 정부도 있고 군대도 있고 학교도 있으므로 그 실체가 있다. 그러나 부족민 세계에는 원래 추장이 없고 족장이 없다. 단지 유력자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부족민은 집단의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만행을 저지른다. 심청을 인당수에 빠뜨린다. 가족을 죽이는 아랍의 명예살인도 같은 원리다. 누군가를 죽이는 방법으로 집단에 센세이션을 일으켜서 결속을 유지한다. 죽으면 고통이 전달되고 그 고통이 유대감을 깊게 하기 때문이다. 부족은 국가와 달리 권력의 실체가 없으므로 종교수준의 더욱 강한 믿음이 요구된다. 정부는 국민이 믿지 않아도 독재자의 권력이 유지되지만 부족은 부족원이 믿지 않으면 바로 깨진다. 내분이 일어난다. 유력한 마을의 주술사나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말려보지만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누군가 빨갱이사냥과 같은 악랄한 소동을 벌여서 사람을 죽이고 괴력난신을 불러들이면 부족이 결속된다. 믿을만하지 않는 말을 해야 도리어 믿음이 깊어지는 역설이 문제다. 1+1은 2라고 하면 다들 시큰둥하지만 ‘1+1=3’이라고 하면 믿는다. 왜냐하면 이해되지 않으므로 지도자에게 의사결정권을 위임하며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무질서한 대중의 종교본능을 자극하려면 의도된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임금이 법대로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자에게 벌을 주면 법을 우러러보고 대신 임금을 우습게 본다. 임금의 다음 행동이 예측되기 때문이다. 이순신장군이 공을 세웠으니 당연히 상을 주겠지. 이 예측을 깨뜨려야 권력이 유지된다. 그래야 24시간 신경을 곤두세워 임금을 주목하고 있게 된다. 봉건 군주의 신상필벌은 절대 공정하지 말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백성의 마음을 묶어서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면 착한 사람도 대접하고 나쁜 사람도 대접해야 한다는게 노자의 무서운 가르침이다. ‘천지불인’ 노자의 이 한 마디에 요약되어 있다. 도교를 숭배한 진시황이 이를 실천했음은 물론이다. 이 비뚤어진 가르침을 2500년간 실천한 결과 중국은 망했다. 공자에게 배우지 마라. 공자가 학생 가르치는 교사냐? 공자가 가르친 마차몰기, 활쏘기 따위는 안 배워도 된다. 대신 공자가 벌인 일을 승계하라. 공자가 만들어놓은 족보에 들어라. 그 족보는 군자의 족보다. 천하인의 족보다. 족보가 공자의 진짜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신과 다이렉트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개인은 집단의 의사결정에 참여함으로써 집단과 연결됩니다. 천하가 아파하는 것을 내가 아파함으로써 감정으로 연결됩니다. 문화예술을 통하여 그러한 자연과의 공감능력, 세상과의 소통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공자의 진짜 가르침입니다. 세상의 중심과 연결되어 족보를 구성하는 것이 진짜입니다. |
공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무위는 요순시대의 허유 때부터 있었습니다.
노자가 발명해낸 것은 아닙니다.
숨가쁘게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논어는 거의 끝이 난거 같은데, 혹시 다른 책도 해석하실 의향은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논어는 1만자 쯤 되는데
그 중에서 공자와 관계없는 내용은 배제하고
해석할 가치가 있는 절반만 풀이했습니다.
지금 절반 넘게 진도가 나가 있습니다.
도덕경은 5천자 쯤 되는데 내용이 짧아서 전문을 해석했지만
거의 진도가 다 와서 마지막 한 편 분량이 남았습니다.
장자나 맹자는 해석할 가치가 없다고 봅니다.
장자는 그 시대에만 통하는 유행어가 넘 많은데다
게다가 소설 수준이라서 가치없고
맹자는 쓸데없는 말싸움 논쟁인데 언어가 구차합니다.
깨달음의 언어가 아니라 기교의 언어입니다.
그 외에 생각나는건 없네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맘이 있었는데....
역시 수준이 그렇죠
죽어라 팠다기 보다는 잼나게 판거라고 봐야겠지만...
명문이오!
김동렬 선생의 글빨이 제대로 묻어나 요즘 올라오는 글이 점점 더 재밌어 집니다.
소로가 월든 호숫가의 한 농부집을 찾아가 그 농부의 인생을 5분짜리 인생으로 간략 정리한 것에 전율을 느낀 적이 있는데,
이곳 구조론에서 김동렬 선생은 5백방 맞을 인생으로 그걸 달리 표현했지요.
소로가 킹 목사와 케네디, 간디와 톨스토이에게 끼친 영향은 가히 선각자적인 면모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깨달음 책을 주문했는데, 기다리는 동안 읽는 깨달음의 대화 글이 재미집니다.
죽비로 뒷통수를 갈겨대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냥 몇 마디 변죽을 울려도 전율하는 인생이 있음에 하루하루가 재밌을 따름입니다.
노자의 무위는
공자의 위=[임금님 말 잘 들어라/시키는 대로 해라] 에 대한
반발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