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는 일이관지다.”
증자가 일이관지를 충서忠恕로 설명한 것은 잘못이다. 충忠과 서恕라면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일이관지는 오직 서恕 하나이며, 서는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이다. 서恕는 용서가 아니다. 군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서恕는 대칭원리에 따른 균형감각 곧 밸런스 개념이다. 공자는 밸런스의 원리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 밸런스는 중용의 법칙이다. 중은 가운데가 아니라 저울의 축이다. 중은 두 번째로 오는 것, 중복되는 것, 겹치는 것이다. 바퀴축과 같다. 바퀴살과 바퀴살이 겹친다. 마디와 같다. 자리와 자리가 겹친다. 겹치는 부분이 대칭의 축이다. 축을 깨달으면 중용을 깨달을 것이며 중용을 깨달으면 서恕를 깨닫는다.
용서하라는 말은 사건 전체를 봐야 하므로 곧 나서지 말고 조금 더 지켜보라는 말입니다. 사건은 부분이 아닌 전체에서 일어납니다. 하부구조가 아닌 상부구조에서 일어닙니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개입하면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치더라도 드러난 표피보다 감추어진 배후를 쳐야 합니다. 성급한 ‘자로’에게는 부형이 있으므로 곧바로 나서지 말라고 말했고, 신중한 염유에게는 불의를 보면 곧 나서라고 말했습니다. 용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단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
용서라는 말은 봉건사회에나 쓰던 무식한 단어입니다.
어린이들에게나 하는 말이지요.
용서는 봉건노예제 시대에 노예들이 주인의 물건을 훔치므로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놔야 되는데
노예가 재산이니 재산이 축나서 못 부러뜨리는걸 말합니다.
근데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죠?
노예가 주인을? 주인이 노예를?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노예제 자체가 범죄인데?
노예주인은 있는데로 때려죽여야 정의인데?
용서라는 단어를 쓴다는 사실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이가 잘못했다면 용서가 아니라 부모를 징벌해야죠.
누군가 잘못했다면 당사자가 아니라 박근혜를 징벌해야죠.
아이는 잘못한게 아니라 배운대로 한 것이므로 가르친 부모가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용서한다는건 어불성설이죠.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헛소리.
배고픈 사람이 빵을 훔쳤다면 장발장을 징벌할게 아니라 박근혜를 조져야죠.
장발장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굶주린 사촌을 먹여살리기 위해 빵을 구하려 한 건데.
교회의 은촛대를 가져간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어차피 교회가 신도들 사기쳐서 훔친건데? 필요한 사람이 쓰는게 맞죠.
용서라는 단어는 애초에 어불성설.
초딩들 한테나 하는 말.
예기에는 부모의 원수는 이웃나라까지 쳐들어가서 죽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자는 예기를 실천한 인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용서는 역설적으로 "징벌"입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싸움이 나서 원한이 생겼을 경우, 원한을 품은 사람이 상대방을 용서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받은 사람은 아무 일도 없는척 자기 길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는 용서를 한 사람의 길을 동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사람 씩 한 사람 씩 모여 사회를 이룹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각 개인이 따로 노는 야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피해를 받은 사람이 용서할때 그 피해자들의 길에 동참하지 않은 죄인들은 그 사회에서 제외해도 마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