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두 가지 근본은 열역학 2법칙과 1법칙이다. 공자의 깨달음은 2법칙이다. 노자의 논리는 1법칙이다. 만물의 순환을 설명하는 1법칙은 누구나 안다. 달이 차면 기울고, 꽃이 피면 지고,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듯이 모든 것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런데 위태롭다. 조금 아는게 위험하다. 2법칙이 1법칙에 앞선다. 2법칙 안에 1법칙이 들어있다. 음식은 그릇 안에 담겨 있어야 안심된다. 2법칙은 1법칙의 그릇이다. 무엇이 달을 기울게도 하고 차오르게도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무엇이 꽃을 피게도 하고 지게도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무엇이 밤을 조절하여 또 새벽을 운행하는가? 자연의 모든 것은 순환하나 그 순환시키는 주체는 순환하지 않는다. 순환한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위태롭다. 움직이는 것의 움직이지 않는 안전장치는 무엇인가? 그 안전장치가 움직인다면 우주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움직이는 바퀴를 버티는 움직이지 않는 축은 무엇인가? 움직이는 문을 지탱하는 돌쩌귀는 무엇인가? 그것은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순환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2법칙이다. 2법칙은 순환하지 않음으로써 순환하는 1법칙을 지탱하는 토대가 된다. 웹에서 검색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뻘로 아는 것과 제대로 아는 것은 다르다. 깨달아야 한다. 자연의 에너지는 동動의 상태로 존재한다. 움직인다. 그 움직임을 멈춰 세우면 그 동은 어디로 갔을까? 이쪽으로 옮겨온다. 인간은 그 옮겨진 동을 사용한다. 그것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 에너지다. 그런데 아뿔싸! 멈추면 동이 옮겨오지 않는다. 멈추었기 때문이다. 동이 멈췄으므로 옮겨올 수가 없다. 인간이 에너지를 사용하려면 ‘동動동動’이 되어야 한다. 자연의 동에 인간 역시 동으로 받아 ‘동동’을 이루면 가속도다. 동을 정으로 바꿔 에너지를 쓰지만 사실은 동동을 쓴다. ‘가속加速’에서 ‘가加’를 빼서 쓰는 거다. 이거 헷갈리면 무한동력 아저씨가 되는 것이다. 작은 차이로 보이나 큰 차이다. 열역학 1법칙은 동을 정으로 바꿀 수 있고, 반대로 정을 동으로 바꿀 수 있다는 논리다. 확실히 그렇다. 자연은 무수히 모습을 바꾼다. 그러나 사실은 변화상태로 정지해 있다. 돌고 있는 팽이는 회전상태로 정지해 있다. 지구는 태양을 돌지만 사실은 태양 주변 원형궤도에 꼼짝 못하고 잡혀 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보면 차는 정지해 있다. 반대로 정지해 있는 것도 사실은 달리고 있다. 태양은 제 자리에 멈춰 있지만 지구 기준으로 그렇고 우주 기준으로 보면 태양은 빠르게 달리고 있다. 그러므로 동이냐 정이냐는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며 오직 ‘동의 동’만 진실하다. 가속도가 진짜 동이다. 우주는 에너지로 되어 있다. 에너지는 동이다. 동은 움직인다. 움직이면 흩어진다. 그런데도 우주가 흩어지지 않고 지탱되는 것은 ‘동動동動’ 때문이다. 동을 동으로 막으면 대칭된다. 멈추게 된다. 움직이는 바퀴가 움직이지 않는 바퀴축에 잡히는 것과 같다. 우주는 오직 ‘동동≫동’의 한 방향으로 간다. 우주는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날아간다. 시작에서 끝으로 가고, 원인에서 결과로 가고, 과거에서 미래로 가고, 봄에서 가을로 가고, 탄생에서 죽음으로 간다. 그 역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별개의 사건이다. 빗물이 되어 강을 거쳐 바다로 간다. 바다에서 다시 하늘로 올라려면 태양이 개입해줘야 한다. 중력에 의해 바다로 가는 것과 태양에 의해 하늘로 가는 것은 별개다. 하나의 사건은 다섯 개의 동動을 쓴다. ‘동동동동동≫동동동동≫동동동≫동동≫동’으로 한 단계에 하나씩 동을 잃어먹는다. 결국 멈춘다. 그 멈춘 동을 모아서 원래위치로 되돌릴 수 있지만 에너지가 추가된다. 저절로는 안 된다. 세상은 ‘동’과 ‘정’으로 되어 있는게 아니라 ‘동동’과 ‘동’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정’이라고 여기는 것은 상대적인 ‘정’이다. 동이 정이라면 동동이 동이다. 동동이 정이면 동동동이 동이다. 동동동이 정이면 동동동동이 동이다. 이 패턴이 5회 반복된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날아가는 비행기가 동이다. 버스 밖에서는 버스가 동인데 버스 안에서는 버스가 동이 아닌 것이다. 헷갈리기 딱 좋은 이야기다.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투수가 공을 던지면 동動이다. 타자가 받아치면 ‘동動동動’이다. 포수가 받아버리면 정靜이다. 그 차이를 헷갈린다. 풍력발전을 하는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바람은 멈추어 버린다. 바람개비가 바람을 막아서므로 바람이 멈춘다. 계속 돌아간다면 태양이 공기를 데워서 추가로 에너지를 투입해주기 때문이다. 수력발전이 가능한 것은 추가로 비가 내리기 때문이다. 즉 강물이 흐르므로 그 동으로 발전하는게 아니라 강물이 계속 추가되므로 그 가속된 동동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 도리를 알면 순환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공자는 이것을 알았고 노자는 이것을 몰랐다. 아주 모른 것은 아니다. 긴가민가 하며 헷갈려하고 있다. 문제는 조금 아는 것의 위험성이다. 가속과 등속의 차이를 모르면 초두효과에 속는다. 개업집효과에 낚이는 것이다. 초반에 조금 되다가 멈춘다. 초반에 조금 되니까 흥분해서 아마 계속 잘 되겠지 하고 안철수처럼 무모하게 밀어붙이다가 망한다. 움직이는 물체를 세워보자. 힘이 느껴진다. 그러나 속았다. 그 힘은 사실 당신의 팔에서 나온 것이다. 개업집이 장사가 잘 되는 것은 당신이 개업하여 동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목이 좋아서가 아니다. 목이 좋은 장소의 동과 당신이 개업한 동이 맞물려서 동동을 이루었기 때문에 며칠 잘사가 잘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계속 개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다. 그러므로 김한길처럼 개업집효과를 노려서 창당만 다섯 번 하게 된다. 자영업자가 업종을 바꿔가면서 계속 개업하다 망하는 것과 같다. 자연에서 어떻게 동동을 얻는지가 중요하다. 에너지를 확산에서 수렴으로 바꾸어 얻는다. 몇 년 전 힉스입자의 발견으로 세계가 떠들썩했던 일이 있다. 힉스장에서 물질이 생성되는 원리가 구조론의 ‘질≫입자’ 전개와 같다는 사실을 구조론을 공부한 사람은 알 것이다. 구조론은 40년 전에 알았다. 초등 3학년 때 과학도서 읽기 수업이 있었는데 만유인력 항목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뉴턴은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는데, 나는 왜 호박 굴러가는 것을 보고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이것이 존재의 사실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언어적 표현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보통은 동사 위주로 진술한다. 사과가 떨어진다면 ‘떨어진다’는 동사에 주목하게 된다. 동사가 명사를 앞서면 보나마나 속임수다. 동사는 명사를 칠 수 없고, 술어는 주어를 칠 수 없고, 진술은 전제를 칠 수 없다. 동사 앞에 명사를 붙이고, 술어부 앞에 주어부를 붙이고, 진술부 앞에 전제부를 붙인다. 자동으로 만유인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럼 만유인력 앞에 하나를 더 붙이면 어떻게 될까? 물리학으로는 차원 개념이다. 매개변수를 추가한다. 뭔가를 앞에 붙이면 신통한게 생긴다. 막대기에 하나를 붙이면 바퀴다. 바퀴 앞에 하나를 붙이면 수레가 된다. 수레 앞에 하나 붙이면 마차다. 마차 앞에 하나를 붙이면 자동차다. 문제와 응답은 대칭된다. 대칭되므로 레벨이 수평이어야 한다. 질문과 응답이 수평이 될 때까지 매개변수를 계속 추가한다. 별로 어려울 건 없다. 그냥 갖다붙이면 된다. 수평이 안 되면 언어가 어색하므로 알 수 있다. 언어가 평화로울 때까지 매개변수를 추가한다. 그래서 나도 하나 붙여본 것이 만유척력 개념이다. 암흑에너지의 존재로 입증되고 있다. 간단하다. 에너지의 확산방향을 수렴방향으로 바꾸는 거다. 인력은 수렴방향이므로 확산방향으로 바꾼다. 너무 쉽다. 에너지가 확산방향이면 장이 형성된다. 물이나 기름, 공기와 같은 유체는 확산방향이다. 수렴방향으로 바꾸면 곧 입자가 만들어진다. 힉스장이 물질 입자를 만드는 원리와 같다. 이해가 안 되면 지하철 계단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밀려 내려올 때 그 반대방향으로 뚫고 가보라. 신도림역에서 가능하다. 잽싸게 빠져나가는 놈은 전자다. 할배들은 못 가고 서 있는데 양성자와 중성자다. 올라가는 할배 앞에 내려오는 할배 선다. 대칭원리에 의해 물질이 탄생하는 것이다. 언어가 동사 앞에 명사 오고 진술 앞에 전제가 오듯이 추상은 항상 앞에 하나가 더 오게 되어 있다. 그냥 매개변수 하나를 더 던져넣으면 된다. 하나의 일은 다섯 개의 매개변수로 이루어진다. 여섯은 없다. 하나의 일 안에 차원은 다섯 밖에 없으며 6차원 이상은 일의 내용이 다르다. 일에다 일을 덧붙인 것이다. 일단 인간의 언어가 다섯 개의 매개변수로 되어 있다. 다섯 개를 지시하지 않으면 대화가 안 통하게 되어 있다. 윙크만으로 대화가 통하기도 하지만 그 경우에는 반드시 숨은 전제가 있다. 미리 약속해둔게 있으므로 윙크로 소통이 된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는 윙크로 소통할 수 없다. 깨달음은 언어감각으로 그냥 아는 것이다. 누구든 말을 배우면 문장을 조직함에 따라 매개변수가 추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공자는 나면서 아는 사람이고 육조 혜능도 나면서 아는 사람이다. 단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므로 공부를 해야 한다. 지식은 불을 끄는 것이고 깨달음은 불을 붙이는 것이다. 지식은 이미 불이 붙어 있으므로 불이라는 단어가 있다. 깨달음은 아직 불이 붙지 않았으므로 불이라는 단어가 없다. 단어가 없으므로 말할 수 없다. 말을 못하므로 깨달아야 한다.
한국말 아는 사람은 다 깨달아 있습니다. 단 그것을 의식적으로 쓰지 못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가 없으니까요. 제가 하는 일은 쉬운 표현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조금 쉬워졌을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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