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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376 vote 0 2016.02.11 (12:09:00)

     

    43,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리고, 형체가 없는 것이라서 틈이 없는 곳까지 들어간다. 나는 이를 행위없는 이득이라 부른다. 말없는 가르침과, 행위없는 이득, 여기까지 오는 자는 천하에 드물다.


    에너지는 유체의 성질을 가진다. 유체가 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계는 내부가 균일하다. 작고 부드러운 것이 내부를 균일하게 할 수 있다. 돌은 큰 돌과 작은 돌이 있지만 물이나 공기나 점토는 크기가 균일하다. 균일하면 에너지를 전달한다. 유압장치를 떠올릴 수 있다.


    수압이나 유압, 기압은 특정한 방향으로 에너지를 보낼 수 있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부린다고 말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위치에너지가 확산을 수렴으로 바꾸는 것이다. 유체는 잘 확산된다. 물이나 기름이나 진흙에 힘을 가하면 잘 확산된다.


    유체를 깔때기에 넣어 수렴시키면 견고한 형태가 빚어지니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부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구조론의 질 단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입자나 힘으로 가면 다르다. 질이 당근이라면 입자는 채찍이다.


    부드러운 당근과 단단한 채찍을 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근을 먼저 쓰고 채찍을 나중 써야 한다. 북한을 다룰 수 없는 이유는 당근도 없이 채찍을 먼저 썼기 때문이다. 먼저 넉넉하게 챙겨줘놓고 말 안들을 때 빼앗으면 통제된다. 일제가 조선을 무너뜨릴 때 이 방법을 썼다. 많은 돈을 빌려준 다음에 상환을 독촉하는 수법이다. 무작정 당근만 쓰거나 무작정 무위만 쓰면 망한다.


    결론은 부드러운 당근과 강경한 채찍을 겸하되 선당근 후채찍이 정답이라는 말이다. 노자는 당근책만 강조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채찍을 겸해야 먹힌다.


    44,


    명성과 건강 중에서 어느 것이 가까운가? 건강과 재산 중에서 어느 것이 중요한가? 얻음과 잃음 중에서 어느 것이 병인가? 그리하여 너무 사랑하면 반드시 낭비가 있고,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망한다. 만족을 알면 욕됨이 없고, 끊음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오래간다.


    영혼은 영혼을 따르고, 몸은 몸을 따른다. 영혼은 천하를 따르고, 몸은 건강을 따른다. 눈은 멀리 보고, 입은 가까이 먹는다. 사냥을 해도 먼저 눈으로 먹잇감을 보고, 나중 가까운 입으로 먹는다. 일은 먼 곳에서 시작하여 가까운 데서 끝난다. 명성은 천하의 것이고, 건강은 개인의 것이다.


    천하의 명성을 먼저 찾는 것이 맞다. 젊은이는 천하의 명성을 찾고, 노인은 개인의 건강을 찾는다. 젊은이가 노인보다 먼저다. 젊은이가 늙으면 노인이 된다. 일의 순리로도 젊은이의 결을 따르는게 맞다. 노자는 노인의 입장에 치우쳐 있다.


    45,


    크게 이루면 찌그러져 보이지만, 써도 망가지지 않는다. 가득 차면 비어보이지만, 써도 닳지 않는다. 매우 곧으면 휘어 보이고, 매우 정교하면 엉성해 보이고, 매우 잘하는 말은 어눌해 보인다. 움직임으로 추위를 이기고, 차분함으로 더위를 이기고, 맑고 고요하면 천하를 바르게 한다.


    크게 이루면 찌그러져 보이는 이유는 소인배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은 깨달음의 안경을 쓰고 있으므로 똑바른 것을 똑바로 본다. 물론 바보들에게는 똑바른 노무현이 도리어 굽어 보이는 법이다. 역사를 배워서 똑바로 보게 해야 한다. 어리석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지 말고 대중을 교육시켜야 한다. 노자의 언설이 정치가의 처세술은 되나 진리를 찾는 사람의 길은 아니다.


    움직임으로 추위를 이기는 것과, 차분함으로 더위를 이기는 것은 모순된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한다면 어느 쪽일까? 오히려 세상이 혼탁하고 시끄러워야 천하가 바르게 되지 않을까? 시끄러운 시위와 개혁이 세상을 바르게 한다. 움직임으로 추위를 이긴다고 했으니 촛불시위를 벌이는 군중의 혼탁함의 움직임이 천하를 바르게 한다. 도는 생명이므로 활동해야 산다. 고요하면 죽는다.


    46,


    천하에 도가 있으면, 말이 있어도 말똥이나 쓰게 되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군마는 전장에서 새끼를 낳는다. 만족을 모르는 것만큼 큰 화가 없고, 얻으려는 것만큼 큰 허물이 없다. 그러므로 만족을 아는 만족감은 항상 만족스럽다.


    폭주하는 임금을 견제하는 용도로는 좋은 가르침이나, 이 말을 불의에 맞서 싸우는 지사를 끌어내리는 용도로 쓴다면 좋지 않다. 그런데 후자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은게 불행이다. 임금은 도덕경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47, 


    나가보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창을 내다보지 않고도 천도를 본다. 멀리 나갈수록 더욱 적게 안다. 이렇듯 성인은 나가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 이름을 알아보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


    성인이 현장에 나가보지도 않고 천하를 어떻게 아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성인은 추론으로 안다. 추론은 추상을 쓴다. 추상은 일의 순서다. 성인은 일의 원리, 곧 의사결정원리로 한다. 일은 기승전결로 이어 간다. 기를 보면 승을 알고, 승을 보면 전을 알고, 전을 보면 결을 안다. 추상은 법칙대로 간다.


    노자는 추상적 사유의 힘을 강조하고 있으나 추상을 추상어로 말하는 방법을 모른다.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명칭을 추상개념에다 억지로 붙여놓고 어색하니까 ‘명가명 비상명’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도는 이름이 없는게 아니라 도는 물질어가 아니라 추상어로 이름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수학적 사유가 필요하다.


    48,


    배우면 날마다 더하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낸다.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른다. 하는 것 없지만 못하는 것도 없다. 언제나 하지 않음으로서 천하를 얻는다. 하는 수준이 되면, 천하를 얻기에 부족하다.


    앞부분은 좋다.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세상은 마이너스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이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더한다 함은 에너지를 추가로 투입한다는 것이며, 이는 계가 둘로 나눠진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계가 통제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실패한다. 구조론의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순서는 마이너스다. 질 단계에 100이라면 입자단계는 90이라야 한다. 뒤로 갈수록 에너지 준위가 낮아진다.


    논어로 보더라도 ‘인, 의, 예’의 순서는 마이너스다. 하늘에서 임금으로, 제후로, 대부로, 사로, 민으로 점차 내려간다. 내려가면 강물이 바다와 합치듯 하나의 계로 통일되므로 순리다.


    단계를 지날때마다 낮아지므로 그만큼 남는다. 앞단계에서 쓰고 남은 것으로 뒷단계를 진행한다. 반면 플러스로 가면 앞단계에 쓰고 남은 것이 없어서 에너지의 추가투입이 필요하다. 아파트에 수돗물을 공급해도 옥상의 물탱크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1층에서 쓰고 남은 물을 2층에서 쓴다면 수돗물이 안 나온다. 플러스는 실패한다.


    도덕경은 언제나 그렇듯이 앞부분이 좋고 뒷부분이 나쁘다. 앞부분은 자연의 대칭성을 따르므로 좋고, 뒷부분은 임금에게 아부하므로 나쁘다. 천하를 얻는다 함은 이 글이 제왕학으로 씌어졌다는 의미다. 천하를 얻음取天에서 얻음은 더하는 것益이지 덜어내는 것損이 아니다. 자기 말과 모순된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덜어내서 임금자리를 얻는 것은 좋지 않다. 일관되게 버려야 한다. 배움은 날마다 무지와 탐욕과 버릇을 덜어내는 것이다.


    49,


    성인은 정해진 마음이 없고,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착한 이를 나는 착하다고 말하고, 나쁜 이도 나는 착하다고 말하니, 나는 착함을 얻게 되고, 믿는 이를 나는 믿고, 믿기 어려운 이도 나는 믿어주니, 나는 믿음을 얻는다. 성인은 천하를 깔대기로 모으는 마음으로 천하를 흐리멍텅하게 하니, 백성은 눈귀를 세워 성인을 주목하고, 성인은 모두를 어린아이로 취급한다.


    무서운 이야기다. 이를 처세술로는 써먹을 수 있겠으나 참으로 고약하다. 실제 만주족은 이 악랄한 방법으로 300년간 한족을 통제했다고 한다. 나쁜 자에게는 더욱 벼슬을 올려주어 더 날뛰게 하는 방법으로 한족의 기를 꺾었다. 탐욕스러운 자에게는 더 탐욕할 기회를 주고, 아부하는 자에게는 더 아부할 기회를 준다. 말하자면 친위대를 만든 것이다. 히틀러도 이 수법을 썼고, 김정은도 이 수법을 쓰고 있다. 친위대가 날뛸수록 공포정치의 효과는 극대화 된다.


    임금은 민중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예측불가능한 존재여야 한다. 벼락이 위엄이 있는 것은 예고없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우스는 벼락의 신이다. 착한 자에게 상을 주고 나쁜 자에게 벌을 주면 천하에 법도가 바로 서서, 미래가 예측가능해지고, 예측가능하면 기어오른다. 민중이 뻔뻔해져서 임금을 우습게 알게 된다. 법도가 임금보다 높다고 여긴다. 민주화가 되어버린다. 임금의 입장은 곤란하다.


    노자의 견해는 마키아벨리즘과도 통한다. 임금은 민중을 겁줘서 심리적으로 제압해야 한다. 독재자의 귀에 달콤한 속삭임이다. 중국사의 끝없는 혼란이 도덕경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50,


    삶으로 나오고 죽음으로 들어간다. 멀쩡히 잘 사는 사람은 열에 셋, 병으로 일찍 죽는 사람도 열에 셋이다. 멀쩡히 잘 살다가 갑자기 죽는 자도 열에 셋이다. 어찌 그런가? 잘 살려고 하니까 죽는다. 잘 사는 사람에게 들어보니, 산을 다녀도 호랑이나 코뿔소를 만나지 않고, 전쟁터에 나가도 무기에 다치지 않는다고 한다. 코뿔소가 들이받을 곳이 없기 때문이며, 호랑이가 할퀼 곳이 없기 때문이며, 무기가 찌를 곳이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죽을 곳에 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헛소리다. 이런 유치한 말장난에 낚이면 안 된다. 오래 살 궁리를 하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고,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이유는 자기 삶의 미학적 스타일을 개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스타일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바로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바로 알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다. 이미 죽음은 저 멀리에 있다.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안다는 것은 의사결정원리를 안다는 것이다. 일의 기승전결에서 ‘기’에 서는 것이다.


    자식을 낳은 사람은 두렵지 않다. 자식이 ‘승承’이면 자신은 ‘기起’다. 이렇게 ‘기起’에 선다. 제자를 가진 스승은 두렵지 않다. 제자가 자신을 계승하는 ‘승承’이기 때문이다. 열사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투쟁의 성과가 자식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 작품이 자식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은 두렵지 않다. 예술로 세상과 내가 긴밀히 연결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죽지 않으므로 나는 죽지 않는다. 인간은 그렇게 죽음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공자는 예악禮樂을 강조하였다. 예악禮樂은 세상과 나를 긴밀하게 연결한다. 고대인은 예악으로 기起에 선다. 현대사회라면 개인주의로 기起에 선다. 미학적 삶의 스타일의 완성이다. 예술가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자식이라는 작품이 승承으로 이어가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없다.


    51,


    도道는 낳고, 덕德은 기르니, 물物은 모양되고, 세勢는 이룬다. 그러므로 만물은 도를 받들고 덕을 귀하게 여긴다. 억지로 도를 높이고 덕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그리된다. 그러므로 도는 만물을 낳고, 덕은 만물을 기른다. 자라게 하고, 길러준다. 키우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며, 돋우기도 하지만 뒤집기도 한다. 낳지만 가지지 않고, 기르지만 기대지 않고, 자라게 할 뿐 지배하지 않는다. 그윽한 덕이다.


    우선순위 개념이 중요하다. ‘도≫덕≫물≫세≫만물’로 가면 구조론이다. 공자와 노자의 차이는 이 순서개념에 있다. 도가 덕에 앞선다. 이 점에 철저해야 한다. 도道는 에너지다. 덕은德 에너지의 작용이다. 물物은 에너지 작용의 결과이며, 세勢는 물物의 움직임이다. 만물은 최종적인 결과다.


    도道가 신용이면, 덕德은 자금이고, 물物은 그 자금을 빌려 차린 가게, 세勢는 그 가게의 번창이다. 만물은 거기서 얻어지는 이익이다. 신용이 있어야 자금을 융통하고, 자금을 융통해야 가게를 내고, 가게를 내야 물건이 팔리고, 물건이 팔려야 이익이 있다. 이 순서를 명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도의 불개입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좋지 않다. 도는 큰 틀에서만 한 번 개입한다. 그러므로 도는 무위無爲가 아니라 대위大爲다. 문학작품이라면 작가의 스타일이 도다. 작가는 한 작품 안에서 여러 스타일을 뒤섞으면 안 된다. 독자를 짜증나게 하기 때문이다. 일관되게 한 가지 스타일로 밀어붙여야 한다. 옷을 입어도 깔맞춤으로 입는 것과 같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성이 도다. 도는 가끔 한 번씩 일어나 정권을 뒤집고 세상을 뒤집는다. 천지개벽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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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긋난 것을 통해서 도리어 바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허튼소리이나 감히 바른 것에 도전하고 있으므로 역으로 도덕경을 비판하여 진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공자 말씀은 당연히 맞는 말이라서 사람들이 어디가 맞는지 잘 모릅니다. 공자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공자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못해도 쓸 수 있는게 진리이긴 합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을 누구나 알지만 그것으로 현장에서 직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써먹지 못한다는 거지요. 사실은 잘 모르는 겁니다. 피상적으로 알기는 쉬워도 제대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깨달음을 피상적으로 알아도 미학적 스타일의 큰 흐름이 만들어지면 대충 써먹을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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