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묻기를
일은 복제, 조합, 연출되고 인간은 종교, 정치, 문화로 인생을 대한다. 부족은 구성원이 100명이 넘는다. 부족원 수백 명을 혼자 상대하는 마인드로 살아가면 종교적 열정행동 혹은 종교적 퇴행행동을 하게 된다. 가족은 10여명이다. 10여명을 상대하는 마인드로 살아가면 정치적 서열행동 혹은 정치적 위세행동을 하게 된다. 혼자 자신의 길을 가면 문화적 행동을 하게 된다. 자기 스타일을 찾게 된다. 반대로 고집을 피우며 자신을 고립시키기도 한다. ### “사람에게 신의가 없으면 쓸모가 없다. 수레에 마구리가 없고, 바퀴에 연결고리가 없는 것과 같으니 무엇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인이 있어도 의가 없으면 쓸모가 없고, 의가 있어도 예가 없으면 쓰이지 못한다. 공자는 일의 우선순위로 일이관지하였다. 대지가 있어도 기둥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고, 기둥이 있어도 천장이 없으면 비를 가리지 못한다. 큰 전략이 있어도 세부적인 전술이 없으면 시합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바른 원칙이 있어도 마무리짓는 테크닉이 없으면 일을 완성시키지 못한다. 정치적 진정성만으로 안 되고 현장에서 유연하게 임기응변하는 협상능력, 의사결정능력이 있어야 한다. ###
자장이 묻기를 일의 기승전결 구조를 알면 일의 다음 단계를 예측할 수 있다. 일은 준비, 시작, 진행, 완성, 승계된다. 예법에 있어서 하의 준비, 은의 시작, 주의 진행으로 보면 공자가 맡고자 한 일의 다음 단계는 완성이다. 공자가 예를 완성하였다면 이후 왕이 1백번이나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제사를 지낼 조상도 아닌데 제사를 지낸다면 아첨하는 것이며, 옳은 일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 제사는 여러 사람을 한 자리에 모으는 부족의 종교행동이다. 오늘 날은 국가의 소임이다. 학생은 학교에 모으고, 노동자는 일터에 모으고, 병사는 부대에 모으고, 시청자는 TV로 모으고, 네티즌은 인터넷으로 모으고,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모은다. 학생의 소임은 공부가 아니라 학교에 모이는 것이다. 학생은 의사결정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공부다. 병사는 외박를 나가도 위수지역 안에 있어야 한다. 병사는 적과 대치하여 긴장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전투다. 다만 의사결정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으면 그 뿐 오버행동은 필요없다. 의사결정이 되었다면 실행해야 한다. 새로운 소식은 전파해야 하고, 새로운 문화는 창의해야 하고, 새로은 트렌드는 개발해야 한다. 생명은 숨쉬어야 하고 사회는 의사결정의 에너지를 순환시켜야 한다. ### 제 3편 팔일八佾
계씨가 여덟사람이 추는 천자의 팔일무를 무대에 올리는 것을 보고 천자는 8렬, 제후는 6렬, 대부는 4열, 사는 2열로 춤을 추는게 예법이라고 한다. 천자는 8*8로 64명의 무용수를 쓰는데 대부인 계씨는 16명의 무용수를 쓰는게 맞다. 대부 주제에 천자의 위세행동을 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결혼식에 외제차 수십대로 행렬을 만들어 위세행동을 하고, 한국인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2대까지 지내는 제사를 4대를 넘어 8대까지 지내는 경우가 있다. 잔뜩 차려먹는 한정식은 임금의 수랏상을 모방한 것이다. 이런 것이 소인배 특유의 위세행동이다. 부족주의적 퇴행행동이라 하겠다. 다른 사람이 심리적으로 자신을 조종하게 하면 망한다. ###
대부 가문에서 천자의 제사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서양사람들은 지하철에서 어깨를 부딪히지 않는 것이 예禮라고 여긴다.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 듣고 방문했다가 경악하게 된다. 한국인은 어깨치기는 기본이요 등을 마구 밀어대기 때문이다. 진정한 예는 위세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제사를 요란하게 지내지 않는 것이 예다. 호화결혼식을 하지 않는 것이 예다. 부조금을 받지 않는 것이 예다. 일체의 남을 기죽이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예다. 한국인은 예를 반대로 알고 있다. 무례를 예로 여긴다. 동방무례지국이 맞다. ### “사람이 어질지 않으면 예의가 바른들 무엇하겠으며 음악으로 즐거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이 의에 앞서고 의가 예에 앞선다. 인이 종교라면 의는 정치, 예는 문화다. 음악은 예술이다. 예술 역시 예에 속한다. 놀 때는 노는 것이 예다. 슬플 때는 우는 것이 예고, 반가울 때는 웃는 것이 예다. 입을 때는 깔맞춤이 예고, 클럽에서는 흔들어 주는 것이 예다.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예다. 그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다. 그것이 인이다. 사람을 사랑함은 작은 인이며 널리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연을 받아들이고, 진보를 받아들여서 변화하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긴밀히 하는 것이 인이다. 내가 네 안으로 들어가고 네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인이다. 그렇게 타자의 내부로 침투하여 우주의 일부가 되면 인의 완성이다. 그 인의 표현은 자연스러움이다.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맞춰주는 것이 예다. 서로가 서로의 안으로 침투하여 긴밀할 때 자연스러운 예는 가능하다. 요란한 보여주기식 예는 가짜다. 남을 겁주려는 예는 가짜다. ### “예는 사치라기 보다 검소다. 부모의 상을 당하면 형식을 갖추기보다는 슬퍼해야 한다.” 한국인은 예禮를 반대로 알고 있다. 남을 기죽이는 요란한 정치적 위세행동을 예禮로 잘못알고 있다. 이 시대에 예는 형식으로 하지 말 것이며, 마음으로도 하지 말 것이며, 자연스러움으로 해야 한다. 만나서 인사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만 해야 한다. 남의 눈에 띄도록 요란하게 큰 절을 하거나 90도 인사를 한다면 방자하기 짝이 없는 추태라 할 것이다. 아름다워야 진짜다. 아름답게 고개만 까딱 하는게 맞다. 간절해야 아름답다. 겨우 보일락말락해야 간절하다. 공자를 오해하고 공자를 비난하는게 한국인들이다. ### “군자는 다투지 않으나 활쏘기라면 예외다. 서로 읍하고 양보하며 올라가고 내려 와서는 술을 마시니 실로 군자다운 경쟁이다.” 다툼은 정치적 위세행동으로 타인을 제압하여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에 서려는 본능 때문이다. 서열이 정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군자는 학문으로 자연히 서열이 정해지므로 다툴 일이 없다. 그러나 스포츠라면 다투어도 상관없다. 스포츠로 의사결정 중심이 정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군자는 쿨하고坦蕩蕩 소인은 찌질하다長戚戚'고 했으니 공자는 쿨한 사람입니다. 쿨한 사람은 단호하게 의사결정하는 사람입니다. 깨달음에 기초한 의사결정능력이 있다는 거지요. 증자처럼 전전긍긍하고 좌고우면하는 안철수, 정동영 부류 소인배와는 다르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공자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
심지어 YS마저도 결단할 시점에는 쿨했습니다.
안철수 부류들은 그마저도 못하니
언급할 가치마저 없습니다.
예전부터 YS는 그다지 높지 않게 평가했었지만
정동영 이후 찌질이들의 시대가 열리니
그 YS가 새삼스럽게 다시 보일 지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