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깨달음으로 받아라 근래에 논어를 해석하다보니 공자 역시 말귀를 도통 알아먹지 못하는 자들 때문에 개고생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잼있는 것은 공자 역시 말귀를 못 알아먹는 자에게는 오백 방의 방법을 썼다는 것이다. 공자 좀 세다. ### “나의 도는 일이관지다.”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깨달음은 깨달음으로 받아야 한다. 토 달고 설명하려는 새뀌는 쳐죽여야 한다. 역시 오백 방 밖에 없다. 깨달음을 깨달음으로 받지 않으면 게시판에서 보기 흉한 일이 일어난다. 깨달을 때까지 얻어맞을 수 밖에. ###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이미 저녁을 지나 밤중인데도 버젓이 살아있는 자들은 도를 듣지 못한 자이다. 역시 오백 방이 정답이다. ### "나는 어진 것을 좋아하는 이를 보지 못했고, 모진 것을 미워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하루를 어진 것에 쓰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나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공자의 제자가 3천 명이나 된다는데 그 중에 어진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역시 오백 방으로 해결할 밖에. 깨달음은 깨달음으로 받아라. ### “말린고기 열 장의 적은 수업료를 내더라도 내가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스스로 분발하지 않으면 지혜를 열어주지 않고, 배운 것을 스스로 표현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격발해주지 않으며, 한 모퉁이를 가르쳐서 세 모퉁이로 반응하지 않으면 다시는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구조론연구소는 말린 고기 한 장만 내도 된다. 외상도 무방하다. 그러나 스스로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 자는 추방하는게 맞다. 과연 한 모퉁이를 가르쳐서 세 모퉁이로 반응하고들 있는지 묻고 싶다. 세 모퉁이로 반응하지 않는데 내가 더 대화하고 싶겠는가? ### “중간 이상인 사람에게는 깨달음의 높은 경지에 대해 말할 수 있으나 중간 이하인 사람에게는 깨달음의 높은 경지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공자도 중간 이하인 사람은 상대하지 않았다. 나라서 상대하겠는가? ### “문을 통하지 않고 나갈 수는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도를 통하지는 않는가?” 깨달음을 통하지 않고는 여기서 얻는 것이 없다. 왜 깨달음을 깨달음으로 받지 않는가? ###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뭉개진 담장은 손질할 수 없으니 내가 재여를 어쩌겠는가? 깨달음은 상호작용이다. 박자가 맞아야 한다. 호흡의 반은 내가 돕지만 반은 스스로 해내야 한다. 싹수가 노란 자는 상대하지 않는다. ### 공자도 똥통들에게는 가르침을 주지 않았는데 공자보다 두어 술을 더 뜬다는 내가 가르침을 줄 리가 없다. 과연 한 모퉁이에 세 모퉁이로 응답하고 있는지 자문할 일이다. 문을 통하여 나가려고 하는지 아니면 뒷문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지 자문할 일이다. 문 외에는 문이 없다. 동문서답을 오래할 이유는 없다. 하긴 공자도 오직 안회 한 명이 말귀를 알아먹었는데 그래도 구조론연구소에 눈팅이 많으니 최소 두 명은 있지 않겠나 싶다. 이 사이트에서 반복되는 아름답지 않은 장면들은 동일한 형식이다. 깨달음을 깨달음으로 받지 않는 자들을 졸라리 구박하는 것이다. 애초에 말상대가 안 된다. 상대해주지 않는게 방법이다. 그러나 링사이드에는 관전자가 있는 법이니 당사자는 못 알아먹어도 옆에서 지켜보는 관전자는 얼떨결에 눈치를 채곤 하는 법이다. 깨달음은 스타일이고 미학이고 예술이고 인상주의이고 낭만주의다. 여기에 중간은 없으며 오직 정상의 극점이 있을 뿐이다. 미학은 조금 안다거나 그런게 없다. 만점 아니면 모두 영점이며 94점은 없다. 피아노콩쿨이라고 치자. 클래식 연주는 작곡가의 곡을 재현하는 것이다. 재현에는 완벽한 일치가 있을 뿐이다. 오직 한 명이 만점이며 나머지는 모두 탈락이다. 그게 예술이다. 이해 안 되는가? 뭐 심심풀이로 가작이나 장려상이나 준우승을 두기도 하지만 격려의 의미다. 깐깐한 데는 아예 장원을 정하지 않고 전원탈락시키기도 한다. 재현되거나 재현되지 않거나이며 예외는 없다. 이 말의 의미를 진짜 모르겠는가? 대화가 안 되면 대화할 이유가 없다. 제자가 3천명이나 된다는 공자도 단 한명의 인仁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 뜻을 헤아려 보기 바란다. 공자 본인과 안회까지 일단 두 명이 있어주는데 왜 아무도 없다고 했을까?
학교에서 공부하던 주입식 방식으로 여기에 오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확 쫓아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분위기 파악하고 정신차리는 거죠. |
읽기만 하고 깨달음으로 받지 않으면 무슨 소용?
모두다 그렇다는 말.
이리보니 구조론 사이트에 와서 엉뚱한 소리 하는 사람과 같았군요.
공자님 좋은 말씀 깨달아 실천하기도 모자란데 딴지걸기만 한 재여.
재여는 머리가 좋은 사람인데
공자의 얼마 안 되는 책.. 요즘으로 하면 단행본 서너권 분량
이 정도는 뭐 일주일만에 다 외어버리고 더 배울 것이 없다고 낮잠을 자는 겁니다.
공자는 시경의 시에서 현실사회의 비유를 즉각 뽑아내는 사람인데
시경이라는게 사실은 요즘 유행가 수준입니다. 대단한 예술이 아니지요.
공자처럼 시에서 혹은 예술작품에서, 음악에서 즉각 현실상황의 비유를
뽑아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없다고 봐야죠.
그건 일의 기승전결 패턴을 아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기껏 이건 새옹지마 아냐 이거 읍참마속이네 하고
사자성어에서 비유를 뽑아내는 정도인데 그 범위를 무한대로 넓혀서
일상생활에 까지 두루 적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거죠.
중국인들은 요즘도 그런 비유뽑기를 하고 있다더군요.
재여는 공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거 원래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겁니다.
난 죽어서 답이 없다. 지금 하는 답은 죽었다가 살아서 하는 답이다.
리더나 스승의 의도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자공이 화답한다.
“사형은 언제부터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인류가 생긴 이래 우리 선생님 같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自生民以來未有夫子也) -(<맹자>‘공손추 상’편⑭)
그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높아져야 합니다. 노무현은 스스로 높아져 진보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동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