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불, 물, 흙, 나무 따위로 되어 있다는 것은 고대인의 관찰이다. 산소와 수소, 헬륨 따위로 되어 있다는 것은 근대인의 관찰이다. 양성자, 중성자, 음전자로 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면 17가지 소립자의 영역이다. 거기서 다시 한 걸음 더 내듣으면 초끈이론으로 모색되는 근원의 세계다. 거기서 또다시 한 걸음 더 갈 수는 없다. 양파껍질을 까면 양파껍질이 나온다. 최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도 무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다.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다. 그렇다면? 유는 일에서 나온다. 일은 시간을 타고 이어진다. 공간의 껍질을 계속 까면 시간의 연결이 나오고 거기가 끝이다. 일은 시간순서대로 전개된다. 처음에는 어떤 둘의 통합이 있다. 더 이상은 없다. 있다 해도 다른 세계다. 그 통합의 지점에 공간의 한 점이 있다. 특이점이다. 거기서 일은 시작되며 그 이전은 다른 세계다. 그래도 거기 무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거기에 에너지가 있다. 에너지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왜 규정할 수 없는가? 확산방향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아는 사유의 영역이 수렴방향이라는 거다. 무엇인가? 수렴방향은 대칭이 있다. 반드시 짝이 있다. 톱니바퀴의 이가 있다. 대칭의 요철凹凸이 맞물려 돌아간다. 그러나 확산방향으로 가면 그 요철이 없다. 톱니가 없어 이가 서로 맞물리지 않는다.
◎ 근원의 세계 – 확산에서 수렴으로 트는 에너지 셋째 공간의 힘은 사건의 진행방향을 트는 것이며, 넷째 시간적 순서는 나이테가 시간이 지날수록 두꺼워지듯이 원자량의 축적이 반복되는 것이다. 다섯가지 대칭이 있다. 이들은 대칭된 짝이 있으므로 추적할 수 있다. 뉴턴의 결정론을 떠올려도 좋다. 그러나 근원의 세계를 넘어서면 다르다. 짝이 없다. 모든 논리의 어머니는 확산방향을 수렴방향으로 틀어 특이점을 연출하는 것이다. 확산방향은 불확정성 영역이다. 가족이 결정되기 전에는 남녀가 확산방향으로 움직인다. 수렴방향으로 틀면 결혼이다. 국가의 성립 전에는 사람들이 확산방향으로 움직인다. 국가는 그 방향을 튼다. 이야기는 시작된다. 모든 가치있는 것은 처음 확산방향으로 존재한다. 계속 확산방향으로 두면 그 가치를 취할 수 없다. 가치는 있는데 가치가 버려져 있다. 금은 있는데 땅 속에 있어서 금을 캐는 비용이 더 들어간다. 방향을 틀어야 가치가 실현된다. 공자는 확산방향으로 있는 지식을 도서관에다 모았다. 학교에다 모았다. 흩어져 있는 것은 가치가 없다. 좋은 그림이라도 미술관에 있어야 가치가 있다. 도록에 올라있어야 위조를 방지한다. 좋은 곡이 노래방 기계에 들어있어야 저작권을 인정받는다. 좋은 집도 길이 없으면 갈 수가 없다. 황금을 연방준비은행에 모아놓아야 달러가 가치를 획득한다.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체계와 시스템과 네트워크 안에 있어야 한다. 공자가 위대한 이유는 처음 그것을 해냈기 때문이다. 이후 동양에서는 공자방법의 대학술사업이 유행했다. 사마천의 사기나 여씨춘추가 그 일을 했다. 명나라와 청나라 역시 대대적인 학술사업을 일으켜 국가의 위신을 세웠다. 고려의 삼국사기도 그러하다. 서구는 헤로도토스가 처음 사료를 수집했다. 그 이전에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수준 혹은 아라비안나이트 수준이었다. 헤로도토스가 준엄한 춘추필법을 적용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꼼꼼하게 모아놓아서 가치를 이루었다. 일본의 고사기는 제대로 모으지 않았기에 욕을 먹는다. 욕먹기 좋게 써놨다. 현세를 부정하고 내세에만 집착하는 인도인들은 역사를 기록하지 않아서 많은 손해를 보고 있다. 현세를 긍정하고 내세에 무관심했던 공자와 반대다. 중세 서구문명은 사실 인도아랍문명이 견인했다. 서구의 것은 대개 출처를 따져보면 인도의 것이다. 이슬람이 침략하기 전에 기록된 인도사가 없다. 게다가 아랍이 징기스칸에게 깨졌기 때문에 아랍사 역시 맥이 끊어졌다. 이에 유럽이 은근슬쩍 인도의 것을 자기것으로 둔갑시켰다. 르네상스는 그냥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고 인도에서 아랍을 거쳐 서구로 들어갔다. 특히 중세 유럽의 제법 발달된 야금기술은 남인도의 제철기술에서 빼먹은 것이다. 바이킹들은 흑해까지 와서 인도의 철을 사들였고 유명한 다마스커스 검은 인도의 철괴로만 만들 수 있었다. 지금도 인도는 제철강국이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진리다. 반드시 한 자리에 모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연결되어 상호작용해야 한다. 상호작용의 장 안에 있어야 한다. 공자가 무엇을 가르쳤다는둥, 공자의 사상이 어떠하다는둥 하는건 유치한 태도다. 글자 아는 사람이 그런 똥같은 소리 지껄이면 안 된다. 십계명처럼 도둑질하지 마라거나 간음하지 마라거나 이런건 인류의 스승 입에서 나와도 되는 소리가 아니다. 유치원에서나 할 이야기다. 제자를 대접해야 한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은 제자를 도둑취급 하는 거다. 창피한줄 알아야 한다. 공자의 위대성은 대중의 저급한 기호에 영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옷도 깔맞춤이 아니면 입지 않았고 음식도 덜익히거나 너무 익힌 것은 먹지 않았다. 일체의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튀려는 행동을 공자는 하지 않았다. 석가는 고기를 먹었다. 고기를 절대를 먹을 수 없다는 당시의 분위기와 치열하게 싸운 것이다. 이 일로 한때 500명의 제자들이 둘만 남겨놓고 모두 도망쳤다. 한국의 대중들은 스님이 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 줄로 잘못 알고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양고기 몇 점을 먹어보고 비린내가 나서 토했다고 한다. 무엇인가? 석가는 성난 대중들에게 끌려다닌 것이다. 불교경전이 8만대장경으로 불어난 것도 그러하다. 대승경전에서는 개나 소나 한 마디씩 집어넣는 분위기다. 왜인가? 노자나 예수나 석가나 마호멧은 소수의 지식인을 양성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인류전체의 문제를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본인은 빠져야 한다. 자동차를 발명하면 그 뿐 운전은 각자가 한다. 운전까지 대신해주려고 하면 곤란해진다. 요리사는 요리한 후에 빠져줘야 한다. 밥을 대신 먹어주겠다고 나서면 곤란하다. 공자는 지식인을 양성하여 문명의 뼈대를 이루었다. 살은 각자가 알아서 붙이는 거다. 살까지 붙이려들면 곤란하다. 도둑질하지 말라거나 간음하지 말라거나 하는 식으로 일일이 간섭하면 피곤하다.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행동이 아니라 의사결정능력이다. 환경이 변하기 때문이다. 2500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변발이 오랑캐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머리를 깎는게 위생적 행동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집단의 대표자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가이다. 죽일 공자는 죽여야 한다. 공자의 언행 중에서 걸러내야할 시시콜콜한 것만 주워섬기는 대중의 저급한 행동이 문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목적은 의사결정권의 위임에 있다. 이는 반지식행동이다. 종교는 학문의 적이다. 종교화된 공자는 공자가 아니다. 우상화된 공자는 죽은 공자다. 공자로부터 배울 것은 인류 대표자로서의 합리적인 의사결정능력이다. 나머지는 똥이다. 천하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호연지기를 가져야 한다. 위기에도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 태연자약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는 지도자의 덕목이자 지식인의 덕목이다. 군자君子는 지도자다. 이 지점에서 노자, 예수, 석가, 마호멧들과 차별화된다. 노자, 예수, 석가, 마호멧은 대중의 저급한 기호에 영합한 인물이다. 그래서 대중적 인기가 있다. 그들은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 ‘니들이 원하는게 이런거 아냐?’ 이런 거다. 그들은 대중의 마음을 읽고 그 시대의 대중이 원하는 말을 해준 것이다. 이건 거래다. 일본서기는 걍 자기들이 원하는 말을 써놓은 것이다. 그런 식이면 환경이 변할때 곤란해진다. 그 시대에는 필요한 가르침이었을 터이나 환경이 변화된 지금은 아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시대를 뛰어넘어 호환성이 있다. 노자, 예수, 석가들은 확산방향을 수렴방향으로 틀지 않았다. 사건 기승전결의 기에 서지 않았다. 인류문명이라는 일대사건을 일으키지 않고 반대로 수습하려 했다. 환경의 변화를 막으려 했다. 노자는 무위를 가르쳤으나 공자가 연출하는 시대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무위다. 그들은 인류를 하나의 단일한 개체로 묶어내지 않았다. 누구든 성경에서 자신이 원하는 단어와 문장을 찾아낼 수 있다. 대중들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하는데 성경의 문구를 따옴표로 이용한다. 틀렸다. 위대한 방향전환을 일으켜야 한다. 인류는 여전히 진보니 보수니 하며 흩어져 있다. 틀어야 한다. 영화감독을 키우는 감독이 진짜 감독이다. 관객을 키우는 감독은 스필버그다. 스필버그의 아카데미용 영화들은 글자 아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 그래서 타란티노가 스필버그보다 격이 높다. 스승을 생산해야 진짜 스승이다. 제자를 키우는 스승은 가짜다. 내게 좋은 것은 진짜 좋은 것이 아니다. |
"스승을 생산해야 진짜 스승이다."
김대중의 제자 - 권노갑, 한화갑, 한광옥, 박지원
김대중이 만든 스승 - 노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