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칭의 증오는 곧장 쳐들어오고 비대칭의 사랑은 주변의 모든 환경을 정비해놓고 마지막에 온다. 초반에는 악역이 먼저 나와서 활개를 치고 후반에는 주인공이 뜸들이다 와서 수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순을 착각하게 된다. 먼저 다투다가 정들면 사랑한다고 여긴다. 반대다. 비대칭의 관객이 먼저 와서 상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이 먼저 와서 자리 깔고 있었다. 사랑의 증거가 뒤늦게 포착되었을 뿐이다. 증거를 확인하려 하므로 진실을 보지 못한다. 수레바퀴는 바퀴축이 중심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하느님과 아담이 손끝이 만나는 접점이 중심이다. 중심이 가운데 끼어 있으면 입자가 되고, 외부로 노출되어 있으면 질이 된다. 대부분의 국가는 수도가 해안에 노출되어 있다. 깊은 산 속 명당자리 신도안에 수도를 두는 바보나라는 없다. 디지털은 중심이 내부에 은폐되어 있고 아날로그는 중심이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 중국은 디지털적 중심이고 한국은 아날로그적 중심이다. 아날로그로 보는 관점이 진짜다. 그것이 양자화다. 존재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기 애매한 불확정적 상태를 관측할 수 있다. 있기는 있는데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 중심이 없다. 중심이 위태롭게 가장자리에 노출되어 있어서 도무지 중심처럼 보이지 않는다. 부족민은 있는데 추장은 없다. 분위기는 있는데 선수는 없다. 에피소드는 있는데 주제가 없다. 그림은 있는데 그린게 없다. 그것은 마음에도 있고, 사회의 공론에도 있고, 집단무의식에도 있고, 시장원리에도 있다. 도처에 있다. 그리고 많은 것을 만들어낸다. 모든 사건은 애매한 질에서 시작되지만, 우리는 견고한 입자 상태로부터 사유를 시작한다. 눈에 보여야 생각을 시작한다. 즉 한 단계를 빼먹고 건너뛰는 것이다. ‘소문에 사고 뉴스에 팔아라.’는 증권가 격언이 있다. 애매한 상태가 가치있으며 명확하면 가치가 없다. 추상화를 보고 잘 모르겠다는 사람은 ‘그래서 가치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다. 그들은 예술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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