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은 옆에서 누가 대꾸해줘야 한다. ‘배가 고프다.’고 말하면 ‘점심 뭐 먹었니?’하고 물어줘야 한다. 미완성의 불완전한 언어다. 그러나 언어는 본래 이렇게 시작한다. 어쨌든 언어는 명사와 동사 혹은 주어와 술어가 대칭을 이룬다. 하나의 대칭이 하나의 ‘=’를 성립시킨다. 말할줄 아는척 하는 사람은 조건문을 쓴다. 비교판단이 가능하게 한다. ‘= =’로 나타낼 수 있다. ‘옆집 애는 백점인데, 너는 왜 0점이니?’ 하는 식이다. 옆집 애의 백점과 너의 0점을 대칭시켜 보인다. 정치인이나 평론가의 언어가 이런 식이다. 이런 식으로 비교판단하게 하면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매몰차다. 따지기만 잘 하고 답을 내지는 못한다. 반드시 반박당한다. 모든 비교판단은 상대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저항감 느낀다. 이 방법으로 토씨만 바꾸어서 되치기 들어온다. 깨달음은 아니다. 깨달음은 느낌으로 아는 것이다. 완전성의 느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두 개의 이퀄이 큰 하나의 이퀄에 담겨진 것이다. 이쪽이 옳다거나 저쪽이 옳다며 선택하면 곤란하다.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경기장에 관객이 몇이나 모이냐에 주목해야 한다. 둘을 하나로 묶어내는 경기장이 두 팀의 대칭으로 일어난 불안을 해소한다. 논리적인 문장은 ‘= =’의 형태이나 대칭을 이룬 두 이퀄이 분리되어 불안한 느낌을 준다. 둘을 통합하는 이퀄이 추가되어야 한다. ‘산이 높으면 강은 깊다.’ 여기서 끝내면 안 된다. 하나의 비가 산을 깎아 강을 이루니 둘을 연결한다. 옛시조의 종장은 초장과 중장이 일으킨 불안한 대칭을 통일하여 해소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언어에 계급이 있다. 맞는 소리를 하는지 허튼소리를 늘어놓는지는 순간에 판단된다. 언어 안에 대칭이 있다. 전제 없이 진술을 휘두르는 초짜는 몽둥이로 두들겨 내쫓아야 한다. 조건을 제시하고 진술로 대칭시키는 자는 글자 배운 자다. 그러나 언어를 무기로 남을 해칠줄 알 뿐 스스로 완성할 줄은 모른다. 언어 안에 칼 같은 긴장이 있다. 긴장을 일으키는데 능할 뿐 연주할 줄은 모른다. 내 안에 언어가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세상을 향해 발언할 자격을 얻는다. 발언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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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느끼는 글입니다.
두고 계속 읽고싶고, 많이 이야기해오셨던 내용이다 싶지만 더 깊게도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