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좋은 사람이다. 예수는 좋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은 좋은 말이다. 가장 좋은 말은 내가 하느님이라는 거다. 내가 하느님을 구성하는 일부라는 거다.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거다. 물리적으로는 이격되어 있지만 ‘의사결정’으로 보면 연결되어 있다. 의사결정구조를 같은 것으로 쓴다는 의미다. 그것이 복제원리다. 신을 복제한 것이 인간이다. 이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다. 종교의 용어를 쓰면 ‘영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하드웨어적 측면, 곧 유물론적인 측면은 논외다. 방송국과 라디오의 관계처럼 물질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종교의 입지가 있는 거다. 이런건 말 안 해도 안다. 누구라도 안다. 위험을 만나 엄마가 자신을 희생해서 자식을 구하는 것은 물질적인 작용이 아니다. 의사결정으로 보면 부모와 자식은 하나다. 그러므로 예수는 신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친자확인 하자고 덤비면 곤란하다. 물질로 보는 태도라면 곤란하다. 의미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종교인들은 유물론의 잣대로 예수의 친자여부를 논한다. 국과수에서 DNA 검사 해봤더니 하느님의 친자가 맞더라는 식이다. 이는 믿음이 없는 태도다. 왜 종교인이 종교를 부정하는 유물론의 방법을 앞세우느냐 말이다. 권세 때문이다. 본질은 대표성이다. 역시 의사결정에서의 대표성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냐 아니냐 하는건 하느님의 대표성이 있느냐는 말이다. 개나 소나 다 자기가 하느님 아들이라면서 신의 대표성을 주장하면 목사의 입지가 위태롭다. 교회의 존립근거가 소멸된다. 도무지 통제가 안 된다. 인간들이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를 않는다. ‘제발 말 좀 들어라. 인간들아!’ 이거다. 아들은 아버지를 대리하여 대표성을 가진다. 이것이 의미로 보는 것이다. 권리관계로 보아야 한다. 양자를 들였더라도 가문을 승계하면 친자와 같은 대접을 하고 비록 친자라 하더라도 관계가 파탄나면 남남이 되는 것이다. 부부관계라도 마찬가지다. 돌아서면 바로 남남이 된다. 유전자 따위는 필요없다. ◎ 영적으로 보는 것은 의미로 보는 것이요, 의사결정으로 보는 것이요, 대표성으로 보는 것이다. 연결된 전체로 보는 것이다. 대표성이 본질이다. 신의 의사결정을 대리하는 자가 신의 아들이다. 교회의 천국타령, 지옥타령, 원죄타령은 군중을 통제하는 기술에 불과하다. 군중을 통제할 의도를 가지는 즉 타락이다. 문제는 지성이냐다. 최고의 지성이라야 발언권이 있다. 그런데 교회만 논외다. 교회는 원래 아무나 떠드는 곳이다. 인간을 통제하는 방법은 둘이다. 하나는 장을 선발하는 것이다. 똑똑한 사람을 선발하여 특별히 발언권을 준다. 집단 내부에 만인장, 천인장, 백부장을 임명하여 편제를 두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혼란을 조성하는 것이다. 난장판을 만들면 인간이 통제된다. 집단에 질서를 제거하면 질서가 만들어진다. 교회는 후자의 방법을 쓴다.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군중은 결국 한 방향으로 가게 된다. 기세와 흐름을 따르게 된다. 이 수법은 초반에 먹히지만 반드시 역효과가 난다. 방향전환이 안 된다. 속도조절을 못 한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한 방향으로 폭주하게 된다. 나치의 돌격대처럼 절망을 향해 직진한다. 메뚜기떼의 이동과 같다. 메뚜기는 제멋대로 가지만 숫자가 많아지면 충돌하게 되고, 충돌을 피하다보면 결국 모두가 한 방향으로 이동하게 된다. 누구도 메뚜기떼의 이동을 멈출 수 없다. 집단의 가장 어리석은 자에게 권세를 주면 이렇게 된다. 지금 트럼프가 쓰는 수법도 대중의 무지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사회갈등은 이 두 가지 전략 사이에서 일어난다. 진보는 지식으로 차별하고 대신 돈으로는 평등하고자 한다. 반대로 보수는 돈으로 차별하고 지식은 하향평준화 시키려 든다. 보수는 진보 때문에 돈으로 하향평준화 되었다고 주장하고 진보는 보수 때문에 지식으로 하향평준화 되었다고 주장한다. 승부는 외부와의 비교에서 난다. 외국보다 더 돈이 많은가 혹은 외국보다 더 지식이 많은가이다. 외국보다 돈이 많으면 보수가 잘한 것이고, 외국보다 지식이 많으면 진보가 잘한 것이다. 종교는 초반에 지식보급을 경쟁력으로 삼았지만 지금은 돈을 보급하는 걸로 경쟁력을 삼는다. 종교의 입지는 약해졌다. 종교가 돈이 되던 시절은 지났기 때문이다. 포지션이 엉켰다. 과거엔 무신론자가 물질을 근거로 삼았는데 지금은 종교가 물질을 근거로 삼는다.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로 보고, 물질이 아닌 영적으로 보는 관점이 종교의 전유물일 수 없다. 지식의 입장에서도 역시 의미로 보고 의사결정으로 보아야 한다. 필자의 주문은 군중심리를 쓰고, 집단의 방향성을 쓰는 종교의 수법을 떠나 의사결정 메커니즘으로 보는, 지식의 차별로 보는, 깨달음의 관점을 얻으라는 것이다. 원래 깨달음은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막론하고 중요한 근거였다. 지금은 모든 종교에서 깨달음을 배척하고 유물론의 관점을 휘두르고 있다. 석가가 깨달아서 몸에 어떤 물질적 현상이 생겼다는 식은 최악이다. 석가가 외계인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인간에서 더 진화해서 해괴한 종으로 변했단 말인가? 바보같은 생각이다. 깨달음은 석가의 내부에서 일어난 깨달음 사건이 아니라 깨달음 내부에서 일어난 석가의 사건이다. 깨달음이 주인공이다. 깨달음이 인류에게 전염되었다. 석가는 최초로 전염된 숙주에 불과하다. 깨달음은 석가를 통해 인간에게로 옮겨왔다. 깨달음에 의해 지식에 차별이 생겼다. 군대에 편제가 있듯이 지식에도 편제가 생겼다. 고수와 하수가 분별되었다. 회사에 노동자와 사용자가 분별되듯이 깨달음에도 지식의 분별이 생겨났다. 의사결정 하는 자와 결정된 것을 집행하는 자로 나누어졌다. 프로와 아마의 차별처럼 그것은 커다란 간극이다. 아마들은 닥쳐! 프로만 자격이 있다. 프로에게만 발언권이 주어진다. 바둑초짜는 복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못 믿는다. 기보를 적지도 않았는데 그대로 복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말이 돼? 그러나 아마 고수들도 복기는 쉽게 한다. 영화 ‘신의 한 수’에서 안성기는 장님을 위한 특수 바둑판을 사용했다. 그거 하수가 쓰는 거다. 대단한 고수가 아니라 중수만 되어도 맹기를 둘 수 있다. 영화의 설정이 잘못된 거다. 바둑알은 많이 놓여도 의사결정은 몇 차례가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정석대로 둔다. 훌륭한 피아니스트는 딱 세 번 연주해보고 30분짜리 곡을 왼다. 그게 가능하냐고? TV쇼에서 암산하는 것처럼 가능하다. 엄청나게 큰 숫자의 곱셈과 나눗셈을 그냥 한 번 쑥 훑어보고 셈한다. 보통사람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물론 유리 겔러는 엄청난 손가락 힘으로 숟가락을 휘어버린다. 그것도 못 믿는다. 스푼이 휘어진다고? 동전도 휘는 사람이 많다.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간극은 크다. 언어가 다르다. 사유체계가 다르다. 그 간극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것에 딴지를 걸고 의문을 던지며 다수의 공감을 얻으려 한다면 문제다. 다수가 틀린다. 보통사람의 보통판단은 보통 틀린다. 지식인은 툴을 쓰기 때문이다. 바둑 고수는 정석이라는 툴을 쓴다. 피아니스트는 음의 밸런스를 쓴다. 고가 있으면 저가 따르고 장이 있으면 단이 따른다. 프레이즈들 사이에서 고저장단이 춤을 춘다. 작곡가의 작곡의도를 알아채기만 하면 곡을 욀 수 있다. 반면 작곡가의 의도를 모르면 절대 곡을 욀 수 없다. 역시 툴을 써서 곡을 암기한다. 암산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방법을 쓴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방법을 쓴다. 방법은 언어의 완전성 안에 있다. 언어가 담론≫명제≫주어≫명사≫동사로 가는 길이 있음을 깨달으면 환히 보인다. 언어는 지하철 갈아타기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선으로 가다가 저 선으로 갈아타는게 핵심이다. 한국영화는 병사들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을 묘사한다. 관객들은 공감한다. 과연 죽음이 무서울까? 신병들은 군인들이 모두 죽음을 겁낼거라고 착각한다. 그런 생각이 다수의 공감을 얻어 영화가 흥행하지만 과연 그럴까? 천만에. 그건 첫 사흘동안이다. 사흘만 지나면 다들 눈이 뒤집어져서 죽음을 넘는다. 남자는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고 말하면 조선시대에는 모두가 공감한다. 남자도 공감하고 여자도 인정한다. 여자는 바깥 일을 안해봐서 자신이 없고 남자는 여자들 하는 방식이 자기네와 다르니까 납득하지 못한다. 여성차별이 훨씬 더 공감과 지지를 많이 받는다. 아랍에서는 지금도 그렇다. 대중이 틀렸다. 그게 가짜라는건 선진국이 입증한다. 30년 전만 해도 남고애들 성적이 여고보다 더 좋았다. 이것은 확실한 팩트였다. 성적표로 증거가 딱 나온다. 그때만 해도 여학생은 설거지 전담이라서 공부를 안 했다. 지금은 남고생들이 게임하느라 성적이 곤두박질이고, 여학생 성적이 더 좋다. 이것이 확실한 팩트다. 학교공부는 여성이 우월하다는게 확실한 진리다. 사유에도 전문가의 입지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확실한 차별이다. 보통사람의 보통주장은 보통 개소리다. 공감툰으로 가면 150킬로 속도로 날아오는 공이 무섭다는 사람이 다수다. 프로야구 선수는 못된다. 철학이라도 마찬가지다. 죽음이 무섭다는 사람은 지성인의 자격이 없다. 철학자의 자격이 없다. 그 정도는 중딩 때 떼고와야 한다. 무려 고딩이 되었는데도 죽음이 겁나는 사람은 철학은 포기하는게 맞다. 종교는 죽음의 두려움을 팔고 있다. 보통사람에게는 맞는 이야기다. 보통사람은 당연히 죽음이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러분도 전투에 투입되어 백전노장이 되면 죽음을 뛰어넘는다. 안 그럴 것 같지? 천만에. 여러분도 잘못 걸려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윈터스 중대에 들어가는 불상사를 맞게 되면 죽음 따위는 우습게 본다. 그게 인간이다. 최고의 지성이 아니면 이 분야는 발언권이 없다. 예수가 최고의 사람이면 어떻게 말했을까? 그게 정답이다. 그건 정해져 있다. 에베레스트 정상의 높이는 정해져 있다. 1등이 아니면 모두 꼴등인 것이 진리의 세계다. 진리에 2등은 없다. 베트콩 500명 때려잡은 베테랑이 아니면 닥쳐! 죽음이 두렵다면 쳐맞아야 한다. 천국타령? 원죄타령? 지옥타령? 죽음이 무서운 하수들의 무대다. 하수들은 꺼져!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과 불꽃처럼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 발언권이 있다. 지구의 대표자가 아니면 애초에 발언권 없다. 인류 모두가 인류의 대표자로 살아야 한다는게 선비정신이다. 이순신 장군 찜쪄먹을 호걸들의 무대라야 한다. 용감하지 않은 병사는, 이성적이지 않은 지식인은 무대에서 퇴출되어야 한다.
바둑초보와 고수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씁니다. 같은 방법을 더 발달시킨게 아닙니다. 무작정 열심히 노력한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정석을 모르면 절대 기보가 암기되지 않습니다. 그건 원래 안 되는 거에요. 툴을 써야 합니다. 툴을 쓰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가 불통입니다. 함께 복기가 안 된다는 거죠. 고수들은 연장을 씁니다.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의사결정구조를 씁니다. 일반인과는 굉장히 큰 간극이 있습니다. |
"여러분도 잘못 걸려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윈터스 중대에 들어가는 불상사를 맞게 되면 죽음 따위는 우습게 본다. 그게 인간이다."
예측이 가능하다는 의미로도 다가옵니다.
감사히 읽기만 합니다.
요거 명문인데....
참 인간이 곧 참 신이요.
제대로 된 신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종교는 껍데기고,
그 안에 진리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참과 거짓이 나뉜다.
가르치기 전에 깨달아야 한다.
예수는 애초 시작부터 큰 거 깨닫고 시작했지,
살다보니,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신의 아들이 된게 아니다.
이미 수는 스스로 정하고 움직였다.
물론 깨달음의 순간은 있는거다.
석가처럼 자기만의 왕국에서 살 때는 깨달음이 없다.
예수는 처음부터 신의 형상이 있음을 전제하고 간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기독교는 원래 신의 형상을 전제로 하는데,
요즘 기독교는 전적 타락을 전제한다.
인간은 아무리 타락했다고 해도 그 안에 신의 형상이 있다는게 전제다.
그러나 성경에도 없는 원죄론을 몇천년동안 가르쳐온 기독교는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무조건 죄인임을 고백하라고 강짜 놓고 있다.
겁박이다.
21세기에 이런 겁박이 통한다는 건, 나 원래 무식하오 하고 고백하는 꼴이다.
어쨌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 예수를 제대로 따른다면 누구든 하나님의 아들이다.
신의 한수를 두듯,
신의 아들, 딸로 살아가라는 게 예수의 가르침이다.
예수에 대한 부분은 길어질 것 같으니 이틀 후에 쓰겠습니다.
바둑에 대한 부분만 본다면 요즘 바둑은 극초반 10수 정도만 빼면
한수 한수 마다 의사결정의 연속이라고 봐야 합니다.
예전 일본기원이 세계최강을 자처하던 시대에는 자신의 형태를 먼저 갖추고
경험칙 상의 효율적인 수(정석)들이 자주 두어졌지만
한국최강시대에는 자신의 형태는 좀 덜 갖춰져도 상대의 형태를 어그러뜨리는
일명 잡초바둑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잡초바둑에서는 수읽기 센놈이 이깁니다
그리고 자신의 형태를 먼저 갖출려고 하는 바둑을 화초바둑이라고 욕합니다)
응수타진이라 불리우는 간보기가 자주 일어나고
(상대방이 이렇게 하면 나는 여기두고 상대방이 저렇게하면 나는 저기 둔다는 식)
(저 같은 저급자는 응수타진을 한번도 못 해봤습니다.
다만 그때그때 가장 효율적이고 급한 수를 둔다는 마음으로 둡니다.)
해설하는 프로바둑사범도 바둑이 급전으로 인해 끝날거 같다고 하는데
절묘한 타협이 몇번씩 이뤄지기도 합니다.
큰 집 모양을 만들어 놨다가도 그 집모양은 전혀 없어지고 전혀 딴곳에 집모양이 생깁니다.
(아마츄어 바둑에서는 이러한 유연함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큰 집모양은 꼭 지키려합니다.)
또 두터움이라는 개념이 옛날보다 훨씬 중요해져서 정석보다는 수읽기가 중요해졌습니다.
정석적으로 두다가 몇번씩만 의사결정이 이뤄진다는 말은
너무 옛날 이야기인듯 싶습니다.
그러니까 하수지요.
하수가 달리 하수겠어요?
두터움이든 응수타진이든 수읽기든 다 필요없고
상대방의 전략을 간파하는 순간
고수의 머리 속에서는 모든 것이 정석대로 움직입니다.
바둑이 몇 수를 두든 승부처는 몇 차례입니다.
결정적인 승착이나 패착은 많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밸런스에 갇힙니다.
요즘 응수타진하시는 맛이 매우 찰지신 듯합니다.
보통사람의 보통주장은 보통 개소리다.
'좋은 사람' 보다는 '아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낳지 않을지.
인간은 직관력으로 그냥 압니다.
말 안해도 그냥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어리석어지는 이유는 자기 언어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있을 때는 자연스러운데 둘이 있으면 어색해집니다.
둘이 있어도 편안해지려면 데이트를 다섯 번은 해야 합니다.
언어와 언어가 충돌하기 때문에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언어는 다섯가지 계급이 있습니다.
보통사람은 그 중에서 세번째를 씁니다.
아기는 네번째, 동물은 다섯째 언어를 씁니다.
세번째는 주어를 앞세우는 자기소개형 언어이며
이 언어는 말대꾸해주는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모르는 사람과 첫 번째 데이트는 당연히 실패인게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게 말대꾸를 해줘야 하는데
농담을 받아주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가 어색해지는 것입니다.
이 언어로는 진리를 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언어로 진리를 전하는게 아니라 언어에 진리를 가둡니다.
진리가 100이라면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50으로 깎아먹습니다.
예수가 100이라면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50으로 전달합니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100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의 진면목을 알아도 자기수준에 맞추어 왜곡된 예수를 전달합니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예수보다 세습 예수를 주장합니다.
로마황제들은 모두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면서 카이사르 이름을 씁니다.
카이사르에게서 세습한게 아니고 경쟁자를 죽이고 빼앗은 거지요.
예수는 세습된 신의 적장자인가?
이게 좋은 그림인가? 예수가 세습되어 기분이 째지는가?
중세에는 글자 아는 사람이 적었으므로
똑똑한 사람만 논의에 끼었고 그러므로 깨달은 예수를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개판이 되어 아는넘이나 모르는넘이나 개나 소나 말이나 당나귀나 다
한마디씩 끼어드니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세습 예수!
후진국이 세습 정치인을 뽑는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왜? 멍청하니까. 다수가 합의가능한 방향으로 기동하니까.
그러므로 깨달음어를 써야 합니다.
가야바의 언어를 버리고 예수의 언어를 써야 합니다.
둘이 있어도 편안해지려면 데이트를 다섯 번은 해야 합니다.
많은 남편들이 부인이 얼마간 출타중이라면 그렇게 편안해 한다는데
그것은 어인 일입니까?
남편들이 훈련이 덜 되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게 부인의 탓인가요?
소크라테스든 부처님이든 모든 남자는 여자를 힘들어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악처 크산티페에게 많이 당한 것은 유명하고
정말로 여자와 소인은 대하기가 어렵다. 가까이하면 공손치 않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본인께서 여자와 함께 하기 힘들다고 여자 탓을 한다면 그건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문제입니다. 그걸 인정하냐 못하냐가 본인의 그릇입니다. 괜히 위인들 말 한마디 갖고 와서 합리화하지 마세요. 그건 상무공단님의 말이 아닙니다.
맞아요.
애인있는 사람, 아내있는 사람에 대한 시샘은 진심이에요.
그럼에도, 아직 종교를 감싸안을 지성이 나오지 않으니 문제.
구조론은 할까요...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지요. 그리고 완전한 신이시기도 합니다.
아담을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 아담을 잠재우고 갈비뼈를 꺼내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의 부인으로 삼게 하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약속한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약속을 범하였을때 양을 잡아 옷을 지어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신 하나님도 예수님이시지요.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시며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곧 생명의 근본이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바로 그분이 생명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에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변화하여 새로운 육체를 주실것인데 바로 하나님과 같이 영원히 죽지않고 늙지 않고 썩지 않고 아프지 않고 배고프지 않는 육체를 주실것입니다.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부활하여 변화한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그리고 승천하여 하늘에 계십니다.
승천하실때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물었다는것을 아십니까?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때입니까? 할때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만이 그 때를 아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회복할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그냥 한사람으로서 이땅에서 살았던 위대한 인물로 알겠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님은 생명이고 길이고 진리이며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생명의 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그분이 진정으로 생명을 주실것임을 알기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도 인간입니다. 그들은 완벽하지 못합니다. 100% 지혜롭거나 100% 지식을 갖고있지 않습니다. 연약한 인간들입니다. 지혜도 지식도 짧습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완전하지 않는 우리를 그저 아무런 댓가도 조건도 없이 사랑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지식이 부족하고 철학이 부족하고 지혜와 지식이 부족해도 예수님은 그런 나를 경멸하거나 멸시하지 않으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의 모습 지금 그모습 그대로 꽤죄죄하고 냄새나고 아프고 더럽고 추한 이 모습까지도 예수님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고 증거입니다.
기독교인을 하수니 미련하니 철학이 없느니 인간이 덜됬다느니 그런 말들을 마구 쏟아내도 내가 당당하게 그 말을 받아들일수 있는건 이런 인간조차 인간들은 멸시하겠지만 예수님은 사랑하고 위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변함없고 영원히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저는 아무런 조건없이 바라는것없이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구조론이 기독교인을 멸시할수 있을 만큼 그렇게 철학이 높고 생각이 깊고 기독교인들을 하수니 하고 무시할수 있을 만큼 그렇게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구조론도 창조주 아래 있는 것이고 인간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위에 있는 학문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로서 인간의 어떠한 조건도 보지 않고 무조건 사랑하는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내 자식이 뇌성마비에 걸렸다고해도 나는 그 아들을 버리지 않고 사랑할수 밖에 없는 것이 부모의 존재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창조주는 우리의 부모요 우리는 피조물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것은 당연하고 우리 피조물도 한피를 나눈 형제들이니 서로 사랑하는것이 마땅한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인간의 그 짧은 지식으로 판단하는건 웃긴짓입니다.
아침에 새 글 궁금해서 들어왔다가.. 참 내..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그렇게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가 뭐라고 하지 않듯이.......
서로 인격을 존중해주는것이 맞습니다.
믿는다고해서 인격침해를 당할 이유도 없고 무시당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믿지 않는다고 해서 뭐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개인적인 문제일뿐......
무시당할 이유가 있습니다.
IS의 개판짓도 잘못된 믿음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북한의 꼴통짓도 종교적 광신과 같은 것이고
믿는 자는 스스로 의사결정 안 하는 자이니
적어도 글자 아는 어른들 사이의 대화상대가 못됩니다.
노벨 종교상이 없듯이 아는 사람의 진지한 논의에는 끼워주지 않는거.
믿는걸 나무라지는 않지만 그걸로 대화하자고 하면
'닥쳐!' <- 이러게 됩니다.
믿는건 자유이나 공개장소에서 마이크는 안 줍니다.
노래부를 사람은 노래방으로 가시고
믿음 자랑 하실 분은 교회로 가시고.
섹스하는건 자유이나 모텔로 가시고.
지랄하는건 자유이나 병원으로 가시고.
똥 싸는건 자유이나 화장실로 가시고.
지하철에서 밥 먹는 행위가 허용되지 않듯이
눈치껏 하는 수는 있지만 그거 원래 안 되는 거에요.
우리의 믿음은 교회안에 갇혀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믿음은 빛과 소금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어둠에서 구하고 썩음에서 썩지 않게 해야 하는것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교회가 이미 어둠을 좋아하고 교회가 썩어 소금의 역활을 하지 못하니
더이상 우리 믿는자들은 교회안에 머물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안에서 믿음을 자랑하는것은 결국 어둠을 좋아하고 부패를 좋아한다는 말밖에 안됩니다.
저는 교회를 버렸으며 교회를 떠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교회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건물과 교회안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일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세상안에 들어갔고 세상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빛이요 소금이되어서 세누리당같은 부패당이 이땅에서 활개치는것을 두고볼수 없어서
내가 가는 곳마다 그들의 더러움과 언론의 부정부패와 세상의 더러움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정치에 참여해야하는것이 우리들이 할일이고 깨끗하고 바른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것이
내 사명입니다.
믿음은 교회안에 갇혀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나가서 세상을 변화시키는것이야 말로
진짜 믿음입니다.
빛의 아들님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침례)를 받으신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야바와 말씀하시다가 가야바도 아니고 가야바의 종에게 싸데기를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요한을 제외하고 11제자가 세상사람에게 미움을 받다가 돌에 맞아죽었습니다.
본래 낮아지고 비천해져서 섬기는 것이 예수님 제자의 기본자세입니다.
맞아 죽어서 밀알이 될수 있으면 죽겠지만...
지금이 2000년전 시절은 아니지요.
이젠 인권도 존중되는 시대입니다.
시대에 맞게 살아가야합니다.
할말은 하고 살아야 하는게 현시대입니다.
할말한다고 겸손하지 못하다고 하면 그건.....
살지 말라는것과 같습니다.
사람들 다 보는 공원에서 똥싸면 안됩니다.
믿는 자들을 똥과 비유하는것은 믿는자들의 인격을 또한 무시하는 짓이지요.
당신이 인간이면 이말은 취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것이 똥싸는 짓입니까???? 당신 눈에 보일때는 똥사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나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에 그 믿음을 버릴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당신은 당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을 믿는것이 똥싸는 짓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를 위해서 죽으신 분을 믿지는 못할망정 믿는자들을 욕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알고 보면 참으로 거룩하지요.
알곡은 죄 내어주고 쭉정이만 착 착 뭉쳐서 돌아가는 똥이야말로
지극히 자기희생적 존재이지요.
그러니 똥을 욕으로 여기거나 비하하거나 하지 마시길.
다만,
아무리 거룩한 똥이라 하더라도 똥 쌀 땐 화장실에서 싸야한다는 동렬님의 지적은 지극히 옳습니다.
화장실에서 똥 사는 거야 흉이 될 리가 없겠으나,
공개된 자리에서 물똥 싸는 소리 찍찍 낸다면 결코 칭찬받을 만한 일은 못되지 않습니까.
똥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참인간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는 거짓도 가식도 더러움도 없었습니다.
통장에 수백억도 없었고 배부르게 먹는것을 탐하지도 않았습니다.
집도 없었고 누울곳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러나 참 인간이셨습니다.
진실한 분이셨습니다.
참된 분이셨습니다.
진리를 깨우친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참 인간이신 이유는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이시기에 온전한 인간이 될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참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흙으로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생명과 호흡은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온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과 호흡은 죽음이 없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생명체로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이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들로 창조되었으니 때가되면 죽은자들도 일어나고
산자들도 변화될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잔다고 표현합니다.
잠은 죽음이며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고 그리고 아침이되면 부활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죽음과 생명을 허락하심으로
우리가 죽지 않는다는것을 날마다 보여주고 계십니다.
인간의 피는 특별한 피로 모든 동물들의 피와 전혀 성분과 내용이 다릅니다.
진화되었다면 인간의 피는 동물의 피와 비슷하거나 같아야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창조된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이 존귀한 존재인 인간을 우리는 사랑해야합니다.
사랑해야할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고수는 바둑알 한 수 한 수가 전체의 대표성을 띈다고 하는데
하수는 바둑알 한 수가 전체와 연결시키지 못합니다.
즉,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한 수에 대표성을 담을 수 없습니다.
예수는 참 좋은 사람인데 예수를 빙자한, 부처를 빙자한 장사꾼들이 설치는 시대.
내가 살아 남는 길은 스스로 신과 직접 통하여(깨달음) 대표성을 지니는 길에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