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복제다. 세상은 복제로 이루어졌다. 원형에 에너지를 투입하면 복제된다. 복제의 원형이 구조다. 구조는 관계로 나타난다. 관계는 소통으로 파악된다. 소통을 조직한 것이 언어다. 언어는 소통의 원형을 복제한다. 그것이 문법이다. 그런데 문법을 모른다. 우리는 문법을 배우지 않고 언어를 익혔기 때문이다. 무의식에 지배되는 문법을 의식적으로 쓰는 것이 깨달음이다. 언어학의 낙후로 인해 학자들이 이 분야를 연구하지 않았다. 나라마다 다른 문법이 있지만 외국어 번역에나 쓰일 뿐 언어의 근본에는 닿지 않았다. 자연의 존재가 복제로 이루어졌듯이 인간의 지식도 복제의 방법을 써야 한다. 논리학의 용어로는 연역이다. 연역하려면 복제의 원형이 필요하다. 구조가 복제의 원형이다. 구조는 언어에도 있고, 관계에도 있고, 자연에도 있다. 인간이 언어를 쓴다는 것은 이미 연역을 쓰고 있다는 의미다. 단 낮은 수준의 불완전한 연역이다. 1+1=2를 배우면 2+2=4라는 것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안다. 이것이 연역이다. 이 정도는 수학을 배우지 않아도 언어감각으로 그냥 안다. 수학은 높은 수준의 연역이다. 수학이 도달하지 못한 더 높은 단계가 있다. 구조론이다. 단어를 말할줄 아는 아기가 소년으로 자라면서 문장을 말할 수 있게 되듯이 연역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자연의 질서에 반영된 복잡한 구조를 언어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의 복제는 패턴으로 관찰된다. 그 패턴을 낳는 배후의 구조는 은폐된다. 인간은 패턴을 통해 구조의 존재를 인식한다. 정작 구조는 모른다. 패턴이 있으면 반드시 구조가 있다. 패턴은 닮음이다. 구조를 파악하려면 하나의 사건 안에서 순서대로 작동하는 세 개의 닮음을 확보해야 한다. 에너지 입력측의 상부구조와 출력측의 하부구조에 각각, 그리고 둘을 연결하는 전체의 닮음이 있다. 세 개의 닮음을 확보하려면 다섯 개의 포지션이 필요하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라는 다섯차례 의사결정이 있다. 구조는 복제한다. 1회의 복제가 1사건이다. 어떤 하나의 구조를 완결하려면 최소한 셋의 닮음이 필요하다. 먼저 둘의 닮음이 있고 둘을 통해 세 번째 닮음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다섯 개의 포지션이 지정된다. 삼단논법이나 삼각측정이나 그러하다. 삼각측정은 두 각과 1거리를 쓴다. 각을 이루려면 두 선 2가 필요하다. 각이 둘이므로 거듭하여 4가 된다. 두 각 사이의 거리를 재야 하므로 5포지션이 성립한다. 하나의 각은 패턴이다. 두 각은 패턴 둘이다. 둘의 연결은 패턴 3이다. 두 개의 이퀄로 하나의 이퀄을 복제할 수 있다. 우리는 콤파스로 거리를 복제한다. 콤파스가 이미 삼각측정에 필요한 삼각을 이루고 있다. 삼각측정에 필요한 각 1은 이미 콤파스에 갖추어져 있다. 거리를 복제하려면 콤파스를 2회 작동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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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미국 여행 중에 오하이오의 어느 대학 영문과에 교수로 있는 시인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강의 중에 자기는 강사가 아니라 시인이라면서, 자기 강의 중에 신선한 아이디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이기를 그 신선한 아이디어도 남의 것을 훔친 것이라고 표현해서 청중들이 함께 웃었습니다.
원형을 잘 찾고 원형을 계속 복제할 수만 있다면 정말 인생이 쉬워지겠지요.
동렬님 글을 읽다보면 어쩜 저리 복제를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원형을 제대로 보는 눈에 대한 생각이 먼저 듭니다.
진짜를 제대로 알아보는 눈, 그게 구조눈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단한 글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