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어를 지구에서 사용하시면 안됩니다.
지구에서 사용하는 말도 구조론에서는 가려서 사용해야 합니다.
상무공단의아침님의 글은 제 글의 요지와 상관이 없습니다.
부모의 심리불안은 아이에게 전달되어 정서불안으로 치닫습니다.
제가 엄격한 가부장적 권위주의 교육을 주장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단 생존본능 측면에서 심리적으로 자녀에게 우습게 보인 부모는
그 순간 유전자적 생존본능 차원에서 부모의 지위를 박탈당합니다.
아이의 본능적인 독자생존 노력은 곧장 정신질환으로 치닫는 것이며
대부분의 어린이 문제행동의 배경에는 문제부모가 있습니다.
아이의 자유분방하고 창의적, 진취적 사유는
부모와 환경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엄격한 권위주의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모가 상태가 좋다/안 좋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눈치채는 문제 때문입니다.
이는 돈문제나 날씨를 비롯한 자연환경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환경이 안 좋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생존본능이 발동하여
세력전략 모드에서 생존전략 모드로 갈아탑니다.
전쟁이나 테러시기에 태어난 아기 혹은
부모의 폭력을 목격한 아기는 트라우마를 겪습니다.
아이와 논쟁하거나 혹은 똥개훈련 시키듯이 조건을 걸어
'네가 이걸 하면 나는 이걸 주겠다'는 식의 흥정으로 나오는
순간 아이가 눈치챕니다.. 아 엄마 상태가 안 좋구나..
독자생존이 살길이구나.. 그때부터 비극은 시작되는 거죠.
아기에게는 전쟁이나 폭력과 같은 천재지변입니다.
많은 애완견이 정신병에 걸려 있습니다.
개의 행동을 이해못한 주인의 잘못된 개훈련 때문이죠.
이런 현상이 비단 아기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닙니다.
기업이든 군대든 정부든 리더가 우습게 보인 순간 끝납니다.
권위주의는 억지에 불과하며 제대로 된 리더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권위를 내세워봤자.. 쟤 상태가 안좋구나.. 이렇게 되는 거죠. 더 불안해지는 거.
엄격한 교육은 전혀 필요없습니다. 다만 애들은 그냥 눈치로 압니다.
상태가 안 좋다는걸 다 들킨다는 거죠.
유전자는 환경이 안 좋다고 인식하고 생존전략으로 갈아타며
그 방법은 자기 지능지수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부족민 사회에서는 지능이 낮은 것이 생존방법 중의 하나가 됩니다.
문맥상 이해안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본문에서
"아이의 자유분방하고 창의적 사유는 부모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엄격한 권위주의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모가 좀 상태가 안 좋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눈치채기 때문입니다. "
는 문장을
아이의 자유분방하고 창의적 사유는 부모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엄격한 권위주의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좀 상태가 안 좋다는 사실을 아이가 본능적으로 눈치채기 때문에
아이도 상태가 안좋아집니다
라고 문장을 바꿔도 비슷한 뜻이 될까요?
네.. 그 부분이 이상해서 고쳤습니다만.
그 외에도 상당 추가했소.
개의 행동을 이해못한 주인의 잘못된 개훈련 때문이죠.
이런 현상이 비단 아기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닙니다.
기업이든 군대든 정부든 리더가 우습게 보인 순간 끝납니다.
권위주의는 억지에 불과하며 제대로 된 리더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권위를 내세워봤자.. 쟤 상태가 안좋구나.. 이렇게 되는 거죠. 더 불안해지는 거.
엄격한 교육은 전혀 필요없습니다. 다만 애들은 그냥 눈치로 압니다.'
아이가 우리 부모는 소신(믿는 바), 신념, 철학이 없는 것 같아 라고 느끼면 안 된다는 의미군요.
오늘도 한국말의 어려움을 절감하는 하루네요.
예컨대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인데 아이가 뛰려고 한다면?
막 야단치는 것보다 그냥 손목을 꽉 쥐고 있는게 좋습니다.
야단치면 아기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오해합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심리적 본능이 오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논하는 것은 5세미만의 영아입니다.
가장 좋은 교육은 생존본능 차원에서 '환경이 좋다.' 고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아기에게는 오히려 좋은 환경이고
부유해도 너무 큰 집이 오히려 불안한 환경입니다.
요람에 가둬두면 아기는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짜증을 내고 변덕스러우면 불안한 환경인 거죠.
좋은 환경이면 세력전략을 쓰는데 그것은 지능을 높이는 것입니다.
창의성은 일종의 어리광인데 어리광을 받아줄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환경이 안전하다고 느끼면 의사결정에서 자기 영역을 챙겨가는데 그게 창의성이죠.
가장 안전하고 좋은 환경은? 부모가 천재이고 박사이고 도사인 거죠.
즉 아기는 엄마가 천재에 박사에 도사라고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거죠.
근데 원래 세살 아기는 엄마아빠가 척척박사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어요.
물론 여섯살이 되면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걸 알고 환상이 다 깨지는 거.
특히 징벌과 포상으로 세 살 아기를 가르치려는건 최악입니다.
그러나 산만한 아기에게 물리적 제압은 필요한 조치입니다.
아버지가 힘이 세다는건 아기가 믿고 의지할만한 환경인 거죠.
동렬 선생께서 하신 영유아기 환경은 일반적인 상황인 것이고
공자, 아이작 뉴턴 같은 극단적으로 나쁜 영유아기 환경은 나쁜 환경만의 다른 구동원리가 존재하나요?
(욕망이 많고 스트레스가 많을수록 그 개체는 머리가 좋아진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공자나 뉴턴의 환경이 나쁘다는건
현대인의 관점이거나 전기 작가들이 날조한 거지요.
인간의 생존본능으로 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유한 집안의 대저택이나 낯선 얼굴의 많은 하인들은 최악인 거죠.
인간은 원래 세 평짜리 동굴이나 움집에 살았습니다.
가난과 연결된 불행은 어른의 것인가 보군요.
할머니는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고 아버지의 부재는 별 영향이 없는 듯 합니다.(영유아에게는)
이웃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했더라도
절대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라고,
정부가, 국가가, 대한민국이 강요하고 있는 꼬라지.
이건 나라가 아니다! ㅆㅂ
고려대학교는 1905년 민족자본가 이용익선생이 설립한 보성전문학교가 시초입니다. 그후 1933년 김성수에게 넘어 갔습니다. 그 전까지는 김성수와 무관합니다.
한 단어만 고쳤습니다.
예전에 고대 본부 건물에 들어 가면 한켠에 이용익 선생의 흉상이 조그맣게 있었죠. (지금은 하도 가 본지 오래되서 어떤지 모름) 그 건물 바깥에는 김성수의 동상이 커다랗게 있고. 고대를 김성수가 세웠다고 널리 잘못 알려져 있는데 역사가 이렇게 왜곡되어 있으니. 소시적 그 역사를 좀 알려고 해도 자료가 충분치 않아서 (그 당시는 인터넷도 없던 시대라. 그후로는 관심을 잃었고) 잘 기억은 나지 않으나 대략 돈 문제로 호남의 부호 김성수에게로 넘어 간 것으로 알고 있소.
저랑 생각이 정말 다르십니다.
부모는 아이의 죄성(못된 마음)에 져주게 되어 있습니다. 더 사랑하는 자는 의견충돌에서 질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부모로서 옳은 길을 가르쳐줘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부모의 옳은 길이 (하나님이 보셔도 부모의 길이 옳다해도) 항상 아이에게 관철되리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기 의사결정은 자기의 존재 이유 그 자체이고
심지어 죄성(악마성)에 기반한 자기 의사결정이라고 해도 그 잘못된 결정도 그 아이의 사는 이유입니다.
부모가 무조건 자기의견만 관철시킬 경우 부모와의 의사소통이 막힐 것이고
그 아이의 죄성도 꺾이겠지만 세상에 대한 도전의지도 같이 꺾일 겁니다.
부모를 꺾어보지 못한 아이는 세상을 꺾어보겠다는 의지도 약해집니다.
(5살 아이가 부모를 졸라서 부모의 금전적 힘을 통해 먹은 알사탕 맛은
성인이 되어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큰 꿈을 이뤄내는데 성공했던 케이스가 되어줍니다.)
건축학개론에서 아빠는 없고 엄마는 가난해서 어려서 알사탕을 부모로부터 잘못 빼앗아먹은 이제훈이는
훌륭한 허우대에도 불구하고 수지라는 목표 앞에서 들이대는 힘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고 그 선악과를 딸 자유를 사람에게 주신 것처럼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에게 유산을 토해낸것처럼 (탕자가 유흥비로 탕진할 줄 알았지만)
때로는 져주어야 하는 것이 더 사랑하는 자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엄격한 교육에서 판사, 검사, 교수는 잘 나올지도 모르지만
싸이같은 양아치 새끼는 그런 교육 속에서 자기재능을 잃게 될겁니다.
부디 아이의 무조건적인 방종을 옹호하는 글로 읽지 말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