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일대일 어제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일대일이다. 토대를 공유한 채로, 너(자연, 목적, 신)와 내(의사결정 주체)가 일대일 대칭을 이룰 때, 유체의 바탕을 유지한 체로 강체의 성질을 획득하여 의사결정의 핵을 이루고 형체를 얻어 존재로 비약한다. 그 이전까지는 무존재다. 그러므로 문학성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정답은 다 나와 있다. 옛날 할배들이 다 해먹었다. 재탕 삼탕에 사골 고아먹듯이 골수까지 완전히 해치워버렸다. 정답을 베끼면 당신도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다. 물론 글재주는 타고 나야 한다. 무작정 노력한다고 되는게 아니다. 열심히 노력한 신경숙을 본받지 말자. 너는 혹은 나는 혹은, 그 무엇은 존재하여 있는척 하지만, 사실은 가우스전자의 나무명씨보다 더 존재감이 없다. 우습게도 말이다. 그러므로 없다. 사실 존재는 이등병에게 세면백 지급하듯이 하나씩 할당되어지는게 아니고, 삶의 무대에서 연출되는 것이다. 무대를 어떻게 세팅할 것이냐가 문학성을 결정한다. 정답을 베끼면 된다. 톨스토이는 손을 뻗어 신을 가리킨다.(신을 기독교의 신으로 해석한 사람은 저기 가서 대가리 박고 있을 것.) 나는 여기에 있고 신은 저기 어딘가에 있다. 그러나 신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거기에 있다고 톨스토이는 부득부득 우긴다. 설득력은 없지만 재미는 있다. 신과 나 사이에서 그 거리간격의 조절에 강한 긴장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성은 죽는다. 여기서 신은 일대일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매 순간 목숨걸고 신과 대결한다. 굳이 신을 찾아갈 이유가 없다. 바위 벼랑에 서면 누구나 신을 만나야 한다. 단 그 벼랑에서 잡은 나뭇가지를 놓을 정도의 배짱은 있어야 한다. 신이라는 귀찮은 녀석은 쫓아버려도 계속 주인공의 주위를 맴돈다. 도스토옙스키가 하수 주제에 거듭 올인 승부를 걸어가기 때문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신을 완벽하게 부정한다. 인생의 목표를 부정한다. 희망과 야심을 말소한다. 그럴 때 눈처럼 하얀 백지가 준비된다. 영혼은 투명해진다. 완전히 비워버렸을 때 완전히 균일해진다. 완전히 균일해졌을 때 신과의 거리는 0이 된다. 신이 완전히 부정되었을 때 오히려 강렬한 신의 존재감을 느낀다. 문학은 끝끝내 희망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희망이 여기에 있다고 글자로 써버리면 도리어 절망이다.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원고지 위에 절대로 쓰지 말고 희망을 암시해야 한다. 희망이야말로 불균일을 일으키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신과의 거리는 당신의 희망과 야심 때문에 멀어진다. 진짜 희망은 하나 뿐이다. 그것은 희망을 버릴 수 있다는 희망이다. 영화 매드 맥스는 신은 저기에 있다고 선언하고 열심히 뛰어가다가 다시 변심해서 아냐 여기에 있어 하고 자기 집으로 되돌아온다. 이건 순수한 문학적 실패다. 똥이다. 영화로는 괜찮지만 말이다. 영화는 그림으로 승부하는 거다. 그러므로 무대만 잘 꾸미면 되는 거지 내러티브는 필요없다. 특히 구조론적 영화는 그렇다. 내러티브는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의 몫이지 영화감독의 몫이 아니다. 신은 당신을 초대한다. 지옥의 묵시록과 같다. 주인공은 악당을 죽이러 갔지만 사실은 악당이 주인공을 그리로 초대한 것이다. 기이한 무대를 갖추어놓고 말이다. 희망이 철저하게 깨지는 희망을 얻기에 성공한다. 걸작이다. 반면 터미네이터 3은 최악이다. 지옥의 묵시록과 비슷하게 주인공을 명박이 벙크로 유인하는데 그게 희망이다. 주인공은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그 희망을 없애란 말야. 그러므로 살아남으려는 희망을 없앤 터미네이터 2가 걸작이다. 희망을 완벽하게 부정하는 것이 실존주의 시대 이후의 문학계 유행이다. 2차대전으로 인류의 희망은 완벽하게 박살난 것이다. 설국을 읽고 프랑스인들은 일본인들이 마침내 희망을 버렸다는 시실을 알고 안도했다. 일본이 희망을 버려서 참 다행이야. 그럼 뼈다귀라도 하나 던져줘야지. 귀여운 일본넘들. 노벨상 줘라. 미시마 유키오. 이 쉐키는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어. 그렇게 철저하게 깨지고도 말이다. 이런 새퀴는 죽여야 해. 정치적 희망을 버리고 미학적 탐미주의로 바꾼 척 했는데 알고보니 거지새끼였어. 알고보니 이문열이었어. 설국열차의 실패는 빌어먹을 설명충 때문이다. 신이 사실은 내가 꼬리칸에 있는 너를 머리칸으로 불렀지롱 하고 친절하게 제 입으로 설명한다. 난 1대 신인데 너 2대 신 할래? 최악이다. 설명하면 문학이 아니다. 신이 제 입으로 설명하다니 말이나 돼? 그건 만화 작가가 수시로 내용에 개입하는 이말년짓 아닌가? 설국열차의 제대로 된 전개는 주인공이 악당을 죽이고 2대 독재자가 되었을 때 기차는 파괴되고 주인공이 죽어가면서 악당이 자신을 그리로 유인했음을 희미하게 깨달을동 말동 하면서 관객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지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독자들의 뇌를 간지럽게 하는 것이다. 물론 문학적으로 우수하면 대신 재미는 없고 관객은 오지 않는다. 신이 서식할 은밀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문학의 목적이다. 신은 선과 악 사이의 미묘한 지점에 숨는다. 악당이라고 정체를 밝히면 곤란하다. 중요한건 문학적 장치다. 수준이 있다. 신과의 일대일이다. 신과 내가 분리되면 실패고 완전히 겹쳐야 한다. 완전히 균일해졌을 때 그 경지에 도달한다. 모든 작품들이 신과의 일대일을 고민하고 있다. 뒤마의 삼총사처럼 인간이 신을(희망 혹은 목표) 보물찾기 하듯이 찾아나서 마침내 발굴하는데 성공하면 인간에게 들킨 신의 체면은 완전히 똥 되는 것이다. 똥개보다 못한 신이 된다. 신은 꽁꽁 숨겨둬야 한다. 당신은 실패해야 한다. 스탕달은 신을 인간의 내면에 숨긴다. 적과 흑의 충돌지점이야말로 신이 서식하는 널널한 공간이다. 신의 사이즈가 커졌다. 발자크는 활력있는 도시의 거리에 신을 숨긴다. 신의 거주공간은 더 넓어졌다. 영화감독은 비쥬얼에 숨겨야 한다. 내러티브에 숨기면 그냥 들킨다. 신이 똥된다. 신의 체면을 생각해줘야 한다. 신은 끝내 들키지 않음으로써 콧대를 세우는 것이다. 신의 서식지를 늘려주는 것이 정답이다. 애매하고 모호한 공간, 모순된 상황, 선인데 악이고, 악인데 선이고, 적인데 아버지라는 얄궂은 상황이야말로 신이 은밀히 숨쉬기 좋은 공간이다. 그런 공간을 발굴하면 노벨상이다. 김기덕 감독의 이상한 공간들처럼 말이다. 공간의 구조 자체가 뒤틀려 있어야 한다. 그 공간은 자연에도 있고, 미학에도 있고, 도시에도 있고, 내면에도 있고, 판타지에도 있고, 황야에도 있다. 한국인은 유교주의 훈련을 받아서 목적지향적 인격을 얻었으므로 그 목적을 버리라는 문학을 얻지 못한다. 주제에 남을 가르치려드는 유교냄새를 씻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사회는 문학적 토양이 없다. 서식지가 없다. 숨쉴만한 공간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알면 도리어 문학을 얻을 수 있다. 문학은 광산에서 캐는 것이다. 문학적 수준은 재미와 별개다. 한류드라마의 부분적인 성공은 문학적 수준이 낮기 때문일수도 있다. 문학성은 허무주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므로. 재미는 문학이 아니라 상품이다. 소설가도 밥은 먹어야 하잖아. 물론 진짜 소설가는 이슬만 먹고 살지만 말이다.
당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익명의 군중으로 묻혀지는 즉 이차대전의 파멸입니다. 알고보니 개인은 전혀 의사결정단위가 아니었더라는 사실의 폭로가 이차대전의 실패, 근대문명의 실패입니다. 이명박근혜들의 환멸입니다. 그래서 구토 메르스. 신이 숨을만한 공간을 발굴하지 못한 즉 아직 당신은 이 무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신에게로 다가간 즉 실패입니다. 반대로 신이 당신에게로 방문해야 합니다. 당신은 신을 초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희망을 향하여 한 걸음이라도 떼는 즉 실패입니다. 당신에게 야심이 눈꼽만큼이라도 남아있다면 실패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의 무대를 세팅할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