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과한 기댈 말자! 짜고 칠 수도 있다----
무성 아니 새누리 전체가 살려면 근헤를 잡아야 합니다.
근데 임기가 24개월 정도 어중간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쉽지가 않겠죠.
이명박 지지한 사람들, 박근혜 지지한 사람들
자기들이 대한민국에 무슨 대못을 박았는지 모를 거예요. 꿈에도 모를겁니다.
가장 얄궂은 건 승부가 안나고 질질끄는 겁니다.
지금 박근혜의 임기가 어중간하기에 어느 한쪽으로 힘이 안쏠리지요.
그래서 지지부진 계속 힘겨루기하다가 힘만 다 빼겠네요.
확실히 한쪽으로 결정되야 사람들이 몰려갑니다.
결정이 안되면 사람들이 복지안동하지요.
그게 최악이지요.
중국기사가 일부러 공격적으로 뒤흔들었는데도 졌다 하네요.
당장 이세돌이 이길 수 있나 여부도 재미있겠지만
이제 몇 년 뒤면 컴퓨터를 이기기는 불가능해질 수 있겠습니다.
컴퓨터들끼리의 대국 기보를 보며 즐기는 날이 올 수도.
"알파고의 실력은 아직 프로에 대응할 정도로 뛰어나지는 않다. 아마추어 중에서는 최고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라고 말하는걸 보니 이변이 없는한 프로중에서도 최고수인 이세돌이 이길듯 합니다.
만약 알파고가 이세돌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면
"같은 스피드, 힘, 그리고 기술의 두사람의 투사가 서로 싸울때에는 언제라도 페인트에 숙달된자가 승자가 된다." - 이소룡
이소룡역시 페인트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네요. 근데 이건 인간끼리의 경우고 동렬님 말씀대로 페인트가 컴퓨터에 먹힐지는 잘 모르겠네요. 페인트가 먹히면 역시 이세돌 승리 예상.
컴터를 이기게 장치해 놓으면 못 이기지!!
올래 병신년이 인공지능의 개화 원년이 될 것이라고들 하던데요...
인간지능의 천배, 만배...까지도 진화 가능한게 인공지능이라카고...^
2020년까지 5백만 일자리 대체되고(공장은 이미 진행중, 특히 비서 매니저등 일자리...),
대신 2백만 새일자리 창출되고(유럽연구 예측, 특히 독일 부터 개시...)
2050년이면 로보트로 모두 대체하고도 남는 것은 아닐지...
설기현이 숨은 구조론 고수네요.
'창의적 플레이도 기본적으로 정해진 틀 안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서구사회의 기본.
'운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체력이 막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각자 100이라는 맥시멈이 있다. 120은 없다."
운동권의 기본. (팔뚝질이 아니라...)
'누가 들어가도 전력 차이가 없는 팀을 만들고 싶다.'
요건 구조론적으로 가능.
스타성에 열광하고 주목하는 한국사회의 비뚤어진 시각에 가려진 우직함의 발현.
와! 설기현 선수가 이렇게 지적인 인물인지 몰랐습니다
근데 몸이 느린 선수들이 나중에 감독으로 자질이 생깁니다. 체력이 안따르고 몸이 느리다보니 뇌에서 시야와 관찰력을 보상하여 밸런스를 맞추는 것 같거든요.
정확하게 말하면 축구'선수'로서의 천재바디는 아닌거죠. 가수가 목소리가 안되면 작곡으로 넘어가듯(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선수역량이 딸리면 감독이 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 데이터와 제 예상이 맞다면 설기현이 국대 맡을 때쯤엔 성적이 꽤 올라갈 것 같네요. 황선홍처럼 자기가 빠른 사람은 감독이 안돼요.
박지성이 좀 느릿한게 감독하면 잘할것 같은데, 선수로서 커리어를 만족할테니 감독으로 전향할 리는 없고, 설기현이 한국축구 미래를 끌고가겠죠.
히딩크와 무리뉴를 보더라고 선수시절에는 별로 빛을 못 본 사람들이 감독으로서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는듯 합니다.
마오는 탑이었죠. 연아에게 밀린 탑.
김연아에게 밀렸기 때문에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았을 듯.
예술이 안되는 이유는 종교가 형편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형편없다는 얘기는 너무 고상을 떤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종교라는 것이 일상에 바람같듯이, 그림자 같듯이 은근하게 있어줘야 하는데, 그래서 그 속에서 사람의 내면을 좀 풀어 줘야 하는데
한국은 많은 종교들의 경연장이 되어 버려서 일단 종교에 들어가면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는 형식을 쫓아다니기 바쁘니까 그 질서속에 갇히게 되는거죠. 그러니 여유고 뭐고 없는 것이죠.
평생에 성당이나 교회를 3번 정도나 간다는 프랑스 사람들 정도 되줘야 예술이 되고, 교양이 쌓인다고 봅니다.
절대 가치가 무언가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그냥 "가족이 최고다"로 퉁친 느낌
헐리우드 영화는 일단 팔려야 수익이 나니까,
아시아의 가족주의를 겨낭한 느낌이 있습니다.
서양이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그렇게 가족주의를 강조하지 않죠.
돈 나오는 곳의 비위에 철저하게 맞쳐준다는 게
헐리우드의 공식인 듯...
내부적으론, 베터리하고, payload (수송가능 용량)에 문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http://media.daum.net/digital/device/newsview?newsid=20160126152008227
시행착오가 있을건데, 해외의 사례도 배우면 좋을텐데요...
직관적으로는, 드론 사이즈에 맞는 공항이 없다는게 가장 크죠. 송수신국없는 이동수단은 무용.
겁먹은 실무진 위로하고 쥐가 백의 종군하면 될 일을....
공직선거법 제250조 제1항
당선되거나 되게 할 목적으로 연설·방송·신문·통신·잡지·벽보·선전문서 기타의 방법으로 후보자에게 유리하도록 ... [특정인 또는 특정단체로부터의 지지여부] 등에 관하여 허위의 사실...을 공표하거나 공표하게 한 자와 허위의 사실을 게재한 선전문서를 배포할 목적으로 소지한 자는 5년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안철수 지금 철수하면 징역 5년 안살아도 된다는데요?
철수여정의 마지막 종착역은 어디인가..그것이 궁금하다.
1.개그맨 대기실 2. 깜옥소 3. 변똥옆 사무실
아는게 없는 놈은 아는 척을 하고,
모르는게 없는 놈은 모르는 척을 한다.
- 딱 철수 -
그 남인들이 해방이후에는 좌익이 되고 나중에 쿠데타의 주범 박정희를 뽑는 주요 기반이 되죠. 김형욱의 말대로 민정이양 후에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올린건 좌익이었습니다.
해방 이전이든 이후이든 우리나라 지식인중에 좌파 계열 지식인은 매우 많았습니다.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그렇게 한 사람도 많았구요.
물론 지역에 따라 좌파계얼 지식인의 숫자는 차이가 날 수는 있겠지만, 남인이 좌익이 되었고 이들이 박정희의 지지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김동렬 선생이 그간 날카롭게 지적해 오신 것은 남인들의 문제와 그에 연계된 잘못된 지역주의의 문제이지, 이것을 좌익 문제와 결부시켜 해석하는 피콜로님의 견해는 아닌 것 같고 아직 논거 역시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해방직후 대구사태 때를 상기하며, 그 때 대구는 좌익적 성향이 강했다거나, 박상희가 그 지도자 중 하나였다거나 하는 지점을 상기하실 지 모르지만, 일제 시대 이후 국내 지식인의 사상적 성향을 돌아볼 때, 좌익을 남인계열과 연결시키고 이를 박정희와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은 아직은 과도한 일반화로 보여집니다. 물론 박정희 정권 초기, 일부 좌익계열이 상대적으로 박정희에 호의적이었다는 사실들도 아직 이를 남인정서와 연결시키기 위한 논거로는 충분치 않다고 보입니다.
1. 우선 을사5적은 서인계열입니다. 조선의 4대사화처럼 왕이 중신들을 처형하던 것은 16세기 중반 이후엔 잘 없었습니다. 임진란 이후 선조의 도망은 왕권의 추락의 신호탄이었고, 서인들은 득세한 후에 줄곧 정권을 맡아왔죠. 안동김씨도 실은 장동김씨이고, 서인계열이었죠. 게다가 서인들이 같은 호남의 호남벌을 전략적으로 매입하고 호남지방 호족과 혼맥을 이루며 정치적 토대를 강화했을 때는 왕도 어쩌지 못했죠. 이들의 말기가 을사 5적으로 나옵니다.
2. 한국좌파의 시조들은 서얼출신이거나 (박헌영) 중인계급의 영남 일본 유학파들이 많았습니다. 영남의 유학자들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조선복권운동을 펼쳤습니다.왕정복고운동을 벌였지 공화정부의 수립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3-1운동 때 유학자들의 참여가 적었던 이유였습니다.
3. 일제는 남한지역에 거의 유일하게 대구지역에 방직공장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만주군의 군복을 만들기 위해서 였습니다. 따라서 많은 노동자들이 대구지역에 몰렸고요, 박헌영류의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서 많은 노동자들을 좌익으로 전향시킵니다. 그래서 대구는 한때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리기도 했죠. 이들이 해방후에 대구폭동을 일으킵니다. 이 폭동은 나중에 진압되지만 주범자들은 산속으로 도망쳐서 빨치산의 전신인 야산대가 되고. 단순가담자들은 전향서를 쓰고 육군에 들어갑니다. 대구 66연대.
4. 영남지역에서는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은 광범위 했습니다. 임진란 때 결정적인 오판을 한 김성일과 그를 추천한 유성룡의 후손들은 조정에 출사를 못합니다. 유성룡을 따르던 남인들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지도 못했으므로 서인정권에 대한 반감이 아주 강했습니다. 게다가 광해군 후에 거세된 북인들 그룹도 반정부 진영에 참여했지요. 영남에는 이런 광범위한 정서가 있었고, 이것이 해방 이후에 좌익이 득세하는 동력이 됐습니다.
5. 박정희가 민정이양 이후에 윤보선과 맞붙은 5대대선의 대선의 결과는 정확하게 남북대결이었습니다. 영남과 호남은 박정희 지지 그리고 충청도 이북은 윤보선 지지. 이런 선거결과를 두고 당시 중정부장 김형욱은 박정희의 당선은 남한 좌익계열의 지지에 힘입은바 크다고 했다.
"그 남인들이 해방이후에는 좌익이 되고 나중에 쿠데타의 주범 박정희를 뽑는 주요 기반이 되죠."
" 민정이양 후에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올린건 좌익이었습니다. "
--> 남인 유생들이 해방 이후에 좌익이 되었다는 근거는 님의 글 2,3,4에 충분치 않습니다. 남인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고래로 내려온 반중앙정부적 기질이 좌익사상가들이 운신하기에 좋은 여건이 되었다고 표현하셨으면...모를까.. 남인 엘리트 가문에서 좌익사상 시조들이 나왔다는 것 역시 적절한 논거가 되기 힘든게, 당시 우리나라 좌익계열 지식인들 적잖이 일본유학파에서 나오고, 일본유학파들 굳이 영남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영남에 좌파가 세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의 직접적 논거는 님의 글에도 나오듯이 공장과 노동자, 조직 의 측면이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겁니다. 당시 노동자 조직이 전국적으로 대대적 파업을 일으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확인되니까요. 그리고 그 배후에 조선노동당 등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분석들도 존재하지요.
그리고 박정희에 좌파가 우호적인 분위기였었다는 60년대 초의 상황이 "좌파가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올렸다"고 일반화하여 진술할 충분한 논거 역시 되지 않습니다.
'박정희를 올린 건 좌파'라고 강한 주어식 서술을 할 게 아니라
'박정희의 60년대 초 집권에 좌파 역시 우호적 분위기를 형성한 요인 중 하나이다'라고 서술을 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더 나았을 겁니다.
그리고 피콜로님은 다른 글에서도 보이듯
자주 박정희의 역할..
이부분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박정희를 직접 언급하는 글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글에
굳이 박정희를 연계하여 꼭 이야기하실 필요는 없지 않나 싶네요
택후님: 젊쟎게 댓글을 주셔서 앞으로 유의하겠다는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남인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요. 양반들도 대대로 벼슬을 못하면 가세가 기울면 신분하락이 됩니다. 중농인 사람들도 과거 남인의 후예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영남의 양반계급은 을사조약 이전에 반일 의병활동을 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피해가 3-1운동에 유림이 많이 참가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공화정부 수립 자체에 반대한 유림들도 많았지만요.
아무튼 대구의 양반계급들은 을사조약 이후에 대구를 많이 뜹니다. 북간도라든지 하는 곳으로 말이죠. 그래서 이때 대구주민들의 구성도 많이 바뀝니다.
그러므로 남인이라는 말은 이젠 의미를 잃거나 존재하지 않은 사어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조선시대 때 정철의 탄핵을 받아 죽은 화담학파의 자손들은 호남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갔을 경우가 많고, 또한 북인계열도 경남쪽 지리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서인정권에 대단한 원한을 가진 사람들었습니다. "화개장터"라는 곳이 영호남의 화합을 상징한다고 하나 실은 같이 지리산에 들어간 북인들과 화담학파 사람들이 동병상련을 느끼며 교유하던 곳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아무튼 대구지역과 지리산 지역 일대에 광범위하게 거주하고 있던 반정부적인 사람들은 좌파사상에 휩쓸렸을 가능성이 많고, 이들을 "남인"이라 지칭해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한번 뒤집으믄 무대 살고 근헤 죽고
또한번 뒤집으믄 근헤 살고 무대 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