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의 “진리는 하나이다” 라는 아래 글 중에 궁금한 부분이 있어 질문 드립니다
마음에 영감이 떠오를 때 그 순수한 마음속에 시가 있는 것이며
언어에 의해 제조되었다면 이미 관계한 즉 타락한 바 순수를 잃은 것입니다.
마음속의 순수함을 유지하고 찾는 방법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치를 아는 것과 병행하여 매일 조금이라도 자신의 순수를 느끼는 시간이 된다면
익은 공부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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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관계 맺을 줄 알아야 하지만 자기를 지키려는 노력 또한 끝내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한 개의 사과는 먹혀지기 위해(관계 맺기 위해) 존재하지만 먹혀지고 말면 그 뿐
사과는 사라지고 내 존재 또한 사라지고 맙니다.
인간은 관계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관계함과 함께 그 자신도 소멸되고 맙니다.
사과라는 진리는 인간의 입으로 먹혀지는 순간 더 이상 사과가 아닙니다.
배설된 찌꺼기는 사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결단코 사과가 아닙니다.
요리된 사과, 소화된 사과, 썩은 사과는 사과가 아닙니다.
고로 인간은 관계 맺기에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영감이 떠오를 때 그 순수한 마음속에 시가 있는 것이며
언어에 의해 제조되었다면 이미 관계한 즉 타락한 바 순수를 잃은 것입니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물론 유행가자락도 시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과통조림이거나 사과요리거나 사과맛탕이거나 간에 사과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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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사과로 존재해야 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사과는 사과이기 이전에 물이고, 흙이고, 빛이고, DNA입니다.
그러나 사과가 먹혀지고 없어진다고 해서 똥이 된다고 해서 사과가 사라진 건 아니지요.
관계는 존재며 존재의 울림이며 흐름입니다.
명상록이 어디 있죠?
순수함이란 구조론의 질 입자 힘 운동 량에서
입자 힘 운동 량으로 전개하기 전의 질 상태 곧 에너지를 말합니다.
에너지는 관계를 맺기 전, 앞으로 관계를 맺게 될 가능성에서 얻어집니다.
그러므로 남녀가 관계를 맺었다면 이미 에너지는 소모되고 타락은 시작된 것입니다.
자석은 붙기 전에 끌리는 것이며 붙은 후에는 이미 쓸모없게 된 것입니다.
쓸모는 앞으로 쓰이려는 것이며 아직 쓰이지 않은 것입니다.
팔리지 않은 상품이 가치가 있듯이 인간은 쓸모를 쓸수록 버려집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규정하는 여러가지 것들.
나는 남자다 나는 아버지다 나는 무엇이다 하는 여러가지 규정들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닌 무규정의 존재, 그러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라야 합니다.
만화작가들도 돈 벌면 대부분 에너지가 고갈되더군요.
10억 있는 만화가 아저씨가 가난한 소년을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그건 아니죠. 돈 많은 허영만처럼 골프만화나 그려야 맞죠.
배부른 허영만처럼 식객이나 그려야 맞죠.
돈 많은 이문열에게서 그럴듯한 소설을 기대한다면 무리.
순수로 돌아가는 방법은 신과의 일대일입니다.
답변 감사드립니다
순수로 돌아가는 방법은 신과의 일 대 일 이해했습니다
문제는 이해의 수준이 아니라 실천하는 힘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삶의 무게 무시할 수 없는 갈등들
수준은 산수인데 신과의 일대일은 미적분입니다
해서 드린 질문입니다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언어가 영감을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언어가 영감을 죽인다
잃어버린 기억을 그리워했습니다
지금은 그것도 단지 걸어온 하나의 걸음이구나 생각합니다
사이트의 글들은 사명감을 느끼게 합니다
오늘 질문은 오래전 부터 궁금해 했던 것입니다
구조론을 이렇게 읽습니다
하루를 주도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주도적인 삶은 만남을 통해 나아가야 한다
나의 주도와 너의 주도가 관계하면서 더 나은 나와 너로 소통되여야 한다
언제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을 쓴 이경숙이란 분에게 말입니다
진리란 말로 설명이 가능한지요 라고 말입니다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가능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제가 묻는 질문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1. 진리는 말로 설명이 불가하다 - 최선
2. 문제는 진리는 말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 - 차선
3. 최선과 차선의 사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없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사이트에서 이경숙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수준 떨어지는 이야기는 곤란합니다.
알겠습니다
마음에 영감이 떠오를 때 그 순수한 마음속에 시가 있는 것이며
언어에 의해 제조되었다면 이미 관계한 즉 타락한 바 순수를 잃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독자는 무조건 좋아합니다.
독자 자신들의 무능을 고통스러워할 이유가 없어지므로. 모두가 편해집니다.
그걸 의식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죠.
순수를 찾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의 진리를 따라가는 방법 하나뿐이죠. 결따라 가는거.
시라고 한다면 시의 핵심 뻐대가 뭘까 찾아보는겁니다. 시의 소실점을 찾는거죠.
지하철시처럼 내 꼴린대로 막 갖다 쓰는게 아니고. 시란 무엇일까. 그 마지막까지 가보는겁니다.
나는 뭐뭐가 하고 싶다. 뭐뭐를 쓰고 싶다가 아니고. 시 자체의 논리를 탐구하는거죠.
음악이라면. 보통 나는 이런 음악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이런 음악을 하고 싶은건 없고
음악이란 뭘까 리듬은 뭘까. 멜로디란 뭘까. 그걸 어떻게 연주하면 아름답게 느껴질까.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그 음악안에 결이 있는데. 그 결을 찾는거죠. 결을 찾으면 어떤 곡도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좋은 답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