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gujoron.com/xe/600923 - 엊그제 시사리트윗에 쓴 글에 내용을 보탭니다. -
http://media.daum.net/culture/book/newsview?newsid=20130321082305837 던컨 교수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지만 약하다. 대체재가 없다. 역사는 프레임의 교체다. 낡은 프레임을 밀어낼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주류적인 관점은 마르크스주의 계급투쟁 역사관을 기본 프레임로 하고, 거기다가 민족주의 관점을 덧씌웠다. 이중으로 망했다. 고려 귀족과 조선 사대부의 계급투쟁으로 보는 프레임은 틀렸지만, 던컨 교수가 이를 대체할 새로운 프레임을 제안한건 아니다. 갈아줄 새 프레임이 없으면 낡은 프레임의 한계를 알고도 못 버리는게 인간이다. 역사의 구슬을 꿰는 새로운 실을 얻어야 한다. 가문의 발전으로 보는 관점이 답이다. 스승과 제자라고 한다. 스승은 선생先生의 옛날식 발음일테고 제자弟子는 동생이라는 뜻이다. 요즘으로 하면 선후배 관계다. 즉 스승은 ‘따꺼형님’ 쯤 되는 거다. 공부자孔夫子라고 하는데 아버지라는 뜻이다. 틀렸다. 아버지가 자식을 동생이라고 부른다면 족보가 망한 거다. 이런 호로집안을 봤냐고. 공형孔兄, 혹은 공따꺼라 불러야 할 판. 제자백가라 한다. 공가도 백가 중에 꼽살이 끼어 제법 일가一家를 이룬 것이다. 이렇듯 가라는 것은 혈족을 따르는게 아니라 패거리를 따른다. 역사는 이러한 패거리, 가家의 발전으로 보아야 한다. 역사는 계급투쟁의 산물이 아니라 가家의 부단한 확장이다. 가家라는 생물이 있다. 그 생물이 생육하고 번성하니 망라한다. 가를 성씨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다. 씨족도 가들 중에 하나다. 인도의 카스트를 연상해도 좋다. 카스트라고 하면 게르만의 귀족, 사제, 평민, 농노를 연상시키는 계급제도로 알아듣지만 실상은 복잡하다. 게르만이 여럿 헷갈리게 했다. 카스트는 직업그룹이며 일종의 노조 비슷한 것이다. 카스트가 계급이면 쉽게 해체가 되는데 노조라서 해체가 안 되는 것이다. 물론 계급의 성격도 있다.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은 게르만족 특유의 종사제도를 표절해먹은 건데 보편적인 법칙이 아니다. 물론 계급도 여러 가들 중에 하나이기는 하다. 특히 동아시아 역사는 가家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일본은 특이하게도 독일과 비슷한 농노계급이 있지만 그건 일본이 섬이라서 별종이 갈라파고스다. 예컨대 이런 거다. 조선시대에 천한 광대가 부유한 양반집 환갑잔치에 놀이판을 벌렸다고 치자. 영화라면 양반이 광대를 노예처럼 막 다룬다. 그러나 조선시대 천민이라는 말의 뜻은 오늘날의 그것과 다르다. 광대들이 사발통문 돌리면 전국의 광대가 집결해서 아주 박살을 내놓는 수가 있다. 천민? 그건 족보가 없다는 뜻일 뿐이다. 자꾸만 돌아다녀서 국가의 보호대상에서 빠져 있다는 거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세력을 이루고 보호한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이 그치질 않는데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다는 말이 있다. 정승집 개를 진짜 동물 개로 알아들으면 초딩이다. 개를 문상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 정승집 하인이 큰 세력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계급제도의 실상이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과거에 합격한 젊은 양반이 신참례를 갔다가 선배집 하인들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흔하다. 흥선대원군이 거느렸다는 ‘천하장안’도 굳이 말하자면 대원군집 개인데 그 세력이 만만치 않다. 양반도 함부로 못 건드린다. 천민과 양인을 나누는 기준은 의사결정구조인 가를 이루었느냐다. 양반이냐 상놈이냐는 근대인의 관점이고 당시는 성씨가 있는 씨족에 속하느냐 각성받이냐가 중요했다. 지금도 이런 전통은 일부 남아있다. 천민은 성씨가 없고 씨족이 없다. 물론 조선후기에 천민들도 대거 양인으로 바꾸고 성을 얻었다. 고려귀족과 조선사대부의 대결구도는 상당부분 환상이다. 고려의 백정은 성이 없고 조선의 백성은 성이 있다. 일본은 개화 이후에 강제로 성을 부여했다. 고려의 민중은 귀족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며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귀족의 보호를 받는데 그 귀족이 썩었으면 끝이다. 조선의 민중은 성을 얻어 국가의 보호대상이 되었다. 물론 천민은 제외다. 민중이 귀족가문이 아니라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 역사의 진보다. 실제로 그 내막은 복잡하다. 조선왕조 중기까지 성이 없는 백정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들 역시 나름대로 패거리를 이루고 왕초를 선발하여 독립적인 의사결정단위인 가를 이루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천민 만만히 보면 안 된다. 심지어 문둥이 조차 세력이 있어서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박살나는 판이다. 전국의 문둥이가 집결하는 수가 있다. 거지도 마찬가지로 조직이 탄탄해서 모르고 건드렸다가는 개망신 당한다. 보부상 조직은 말할 것도 없다. 한양의 이씨 왕가는 그 많은 가들 중에 명성이 높은 한 가에 불과한 거다. 물론 왕실숭배 신앙이 있었으므로 제사를 지내서 비를 내리게 하는 종교적 권위가 있었지만 불교와 도교, 천주교 등에 밀려서 약했고 특히 지방 사대부들 입장에서 왕은 수직적 지배자가 아니라 수평적 가문들 중에서 유력한 가문에 불과한 것이었다. 까짓거 벼슬 안 하면 그만이지 아쉬운거 없다. 역사는 가의 발전이다. 가는 씨족이나 패거리에서 국가, 세계로 커지는 방향과 함께 가족, 개인으로 작아지는 방향이 있다. 가의 단위가 클수록 개인의 의사결정능력이 강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큰 집단이 회의로 뭔가 결정해 낸다는건 상당부분 환상이다. 의사결정은 어떤 경우에도 개인이 한다. 거대집단이 회의로 뭔가 결정한다는건 유엔총회에서 뭔가 그럴듯한 의사결정이 일어난다는 것과 같은 환상이다. 그럴 리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오히려 빅브라더의 탄생위험을 높일 뿐이다. 개개인이 의사결정권자가 되어야 한다. 회의체는 다양한 권력시장에서 한 가지 권력형태에 불과하다. 역사에서 중요한건 세가지다. 첫째 의사결정단위인 가家는 어떻게 결성되고 발전해 왔는가? 여기서 가家는 모든 패거리 집단, 노조, 세력을 망라한다. 둘째 이 패거리를 결성하게 하는 미학은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종교, 문화, 이념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 전쟁과 외교는 어떻게 이를 구현했는가? 추가하면 미학을 전파하는 언어, 문자의 보급 그리고 전쟁을 전파하는 이동기술, 곧 기마술과 항해술, 자동차, 통신 등의 발전이 있다. 역사는 정확히 패거리, 그 패거리를 결집하는 믿음, 그 믿음을 전파하는 언어, 그래도 말 안들으면 전쟁, 전쟁을 뒷받침하는 이동기술에 의해 발전해온 것이다.
◎ 질(수준) – 미학, 이념, 종교, 문화 전쟁무기의 발달도 이동기술에 포함된다. 화살을 이동시키든 총알을 이동시키든 같으니까. 역사는 우월한 미학을 가진 집단이 열등한 미학을 가진 집단을 해체, 흡수해온 과정이었다. 미학은 속일 수 없다. 종교는 불교가 나은지, 회교가 나은지, 기독교가 나은지를 말할 수 없다. 미학은 답이 있다. 맛 없는 영국요리가 맛 있는 프랑스 요리를 이길 수 없다. 이건 백퍼센트 확정이 되는 것이다. 이태리가 프랑스를 지배했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겠지만 이태리요리가 프랑스로 전파되었다고 하면 모두가 수긍한다. 한중일을 비교해도 그렇다. 한국인 개개인이 일본인보다 우월한 것은 전혀 아니다. 기성세대로 보면 교육을 받아도 일본인이 더 많이 받았다. 한국인이 근대교육을 받은 것은 80년대 이후의 일이다. 노벨상은 비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한류가 뜨는 이유는 한국의 미학이 죽음을 찬미하는 일본의 허무주의 미학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즉 한국인의 의사결정을 더 잘하는 것이다. 미학은 결국 의사결정능력이다. 원래 조선의 양반들은 일본인을 보고 근친혼 하는 호로놈이라고 비웃었는데 일본인들이 ‘너희들은 빨래만 열심히 하고 목욕을 잘 안하잖아.’하고 공격하는데는 항복했다. 물론 중국인은 빨래도 하지 않고 목욕도 하지 않아서 졌다. 미학은 확실히 결론이 난다. 역사의 진보는 의사결정능력의 진보이며 그 중핵은 미학이고 그 미학을 전파할 가家가 결성되어야 하며, 성씨를 위주로 하는 씨족은 그 가들 중의 하나일 뿐이며 일체의 조합이나 노조나 조직집단이 가에 해당한다. 가를 잘 만드는 나라가 독일이다. 옛날부터 길드니 뭐니 해서 이상한 가가 있었다. 돌아다니는 가를 행行이라 하는데 상인조합이다. 유태인들이 행을 잘했는데 은을 취급하는 은행이 예다. 비단을 취급하는 행과 차를 취급하는 행, 도자기를 취급하는 행들이 있었다. 박지원의 예덕선생전에 나오는 엄행수는 똥을 취급하는 행의 우두머리인데 행수를 실명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역사는 미학을 생명으로 하고 가와 행을 결성하여 그 미학을 전파하는 것이며 언어와 문자가 힘이 되고 이동기술이 수단이 되며 인구와 경제는 별것 아니다. 잘 먹고 잘 살았다는건 안 쳐주는 것이다. 개처럼 살았느냐 인간답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며 그것을 나누는 기준은 오직 미학이 있을 뿐이다.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백날 논쟁해도 답이 안 나오지만, 중국인과 한국인 중에서 누가 더 옷을 잘 입는지는 분명히 답이 나온다. 정치이념은 머리 좋은 넘도 헷갈리지만, 옷맵시는 바보라도 수준을 알아본다. 아랍인이 히잡을 쓸 것인지 말 것인지도 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결론이 나와주는 것이다. 역사의 정답은 누가 의사결정을 더 잘하는가에 있다. 첫째 미학이 있어야 하고, 둘째 그룹이 있어야 하고, 셋째 소통수단이 있어야 하고, 넷째 이동수단이 있어야 하고, 다섯째 살람살이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 먹고사니즘에만 골몰하는 이명박그네주의가 최악이다. 역사는 미학이 가장 중요하다. 의사결정을 잘해야 합니다.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순신의 의사결정과, 사카모토 료마의 의사결정과, 모택동의 의사결정 중에서 누가 더 뛰어난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원균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이순신의 고집에서 하늘을 찌르는 관운장의 자부심과 같은 미학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순신에 비하면 사카모토 료마의 그것은 실무자의 방법이며, 모택동은 그냥 허세입니다. 전쟁에 임하여 장수는 3초에 한번씩 의사결정을 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묘사되듯이 말입니다. 유교주의 트레이닝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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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회담은 3%의 중반대를 넘나들던 시청율이
진중권교수의 두번째 출연으로 단숨에 4.2%가 되었다.
4%가 넘으면 시청자들에게 여러가지 공약을 했는데 무엇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몸으로 웃기고, 말로 웃기고, 표정으로 아무리 웃기려고 노력해도
"내가 너보다 한 수 위라는 지성"은 당해 낼 수 없었다.
또 그내용이 한반도를 둘러싼 내용이고,
어디가서 들을 수 없는 한반도의 내용을 외국인 비정상을 통해 들으니
더 객관적으로 우리 상황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우리가 서양인에게 비해 토론이 훨씬 뒤 떨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비정상들이 정상보다 더 진지하게 지식을 가지고 얘기한다.)
손석희가 "백분토론"을 떠난뒤 토론프로그램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4%를 넘은 기념으로 앞으로도 몸으로 웃기려고 하기지말고
지성으로 시청자들에게 충만하게 해 줄 생각은 없는지...
삼시세끼는 차승원, 박신혜가 나왔을 때 시청율의 정점을 찍었다.
위의 둘은 요리로써는 아마추어이지만
충분히 프로만큼 능숙한 솜씨로 음식을 만들어냈다.
이미 위의 둘은 머릿속에 수많은 레시피가 들어있고
그냥 하나둘씩 풀어낸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사람들이고 시청자들은 시청율로 보답한다.
시청자들은 재미를 원하지만 단순히 재미를 원하지 않는다.
killing time용 내용을 더이상 예능에서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