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문득..
지난 잔상 되새김질...
나도 그렇다.
'내가 사회성이 떨어져요. 내가 뭘 실수한게 없나 혹은 분위기 잘 파악하고 있는지, 눈치가 없지는 않은지... 이런게 걱정되요..'
나도 그렇다.
뭔가 모르게 낯설고 이질적인 시간들과 겹쳐지게 될때는.
생각해보라...
너도 나도 처음 만났고, 모두 오늘 처음 본 이들이다.
물론, 모든 관계는 일대일이다.
관계를 처음 접할때 일대다를 상대할땐 누구나 벅차다.
자신은 혼자이고 다른 이들이 세트나 다수를 이루고 있는 형태일태는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언제나 사람은 독립된 객체인 존재대 존재로 맞서야 한다.
그렇게 만나야 하고 그렇게 대해야 한다.
나도 그렇다.
나도 그 누구를 막론하고 처음 본 이들에게 느껴지는 점에서 보자면 대동소이 하다. 그동안 우린 전혀 서로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서 한 자리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서로 바로 통할수도 있으나, 그 통함에 대해 대화를 나누거나 혹은 차이를 좁혀가거나에 있어서 어떤 괴리들은 반드시 발생하게 된다. 하물며 친밀감은 어떠할 것인가...? 그건 애초에 없는 것일수도 있고 바로 생겨날수도 있다. 그러나 친한것끼리 모이고 덜친한 것들은 밀어내듯이...,애초에 친했기에 서로 모여든 것이다. 무엇으로 친한 것일까... 자신이 감지하는 방향성이 서로 친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관계의 소실점이다. 그러나 애초에 친해서 모여든 것과 친밀감을 서로 느끼는 것은 또 다른 얘기이다. 친밀감은 이제부터 우리가 사건을 만들어 가며 우여곡절의 드라마를 통과 해가며 새롭게 생성시킬 감정이기 때문이다. 하기에, 친하다고 친밀감까지 반드시 갈거라는 그런 생각은 애초에 안하고 가는 것이 좋다. 친연이 있다고 하여 다 인연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낯설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이며, 모든 신경이 분위기 파악하는데 동원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 기분을 자기탓으로 돌리며 그런 자기 기분을 표현하게 되는 것.
자기문제로 돌리는 것.
그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주변이 의식되고 신경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이유..., 자기의 신경을 스스로도 어쩌지 못해서 자꾸 밖으로 삐져 나오게 되는 이유...., (공간에 시간을 투여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밀도가 높아져 사람은 어떤 긴장상태에 놓이게 되므로, 어떤 무게감을 느끼게 된다. 이 무게감이 주는 압박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할때 사람은 겉돌게 되거나, 어떤 스트레스 상태가 된다. 닫힌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 공간안에서의 시간의 쌓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만남은 다 이런 형태이다. 같은 공간안에서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 긴 시간일수도 있고 짧은 시간일수도 있으나 그 구조는 같다.) 바로 이 지점이 차(茶)가 발생되는 지점이다. 차의 필요성은 인간의 이러한 지점에서 발생한 것이다.
주변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고 분위기 파악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눈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자기안에서 실행되려면 방법론이 대두된다.
관계를 미학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 아니면 순간순간의 그때의 기분으로만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는 분명 차이가 있다.
관계의 소실점을 보면 자기를 넘어서게 된다. 관계의 소실점은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것을 모두 보는 것이다. 소실점은 너와 나 사이에 있고 너와나를 이어내는 선을 따라가보면 보인다. 소실점은 내가 느끼고 보지만 언제나 내 바깥에 너의 우리의 바깥에 있다. 그 소실점을 내안에서 느끼는 것이고 그 지점을 이어내는 것이다.
관계의 소실점을 보지 못하면 자꾸 주변이 신경이 쓰여 정신이 산란해져 피곤하게 된다. 거슬리는게 많아지고 감정투사를 하게 된다.
이 감정투사는 자기자신을 피로하게 만들게 된다. 결국 상대도 피곤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분위기 파악 안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정투사의 결과는 자신을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게 한다.
아무도 자기를 건드리는 이가 없다 하여도 스스로 주변을 의식하는게 극에 달하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결국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는 자기규정을 자꾸 반복하게 된다.
이래서 나는 안돼, 이래서 내가 문제가 있어, 이래서 내가 ....하는 자학이 계속해서 쌓이다보면, 또 이런 자학성이 자신의 무기가 되어 버린다.
이런 전제를 미리 깔고 얘기를 시작하게 된다.
이 말은 내가 곧 이러니 나좀 봐줘. 그러나, 이건 곧 어리광인 것이다.
생각이나 언어는 언제나 양날의 칼날과 같다.
자기규정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자기를 확장해 가는게 인간이기도 하지만, 자기규정을 통해 자기 생각과 행위의 폭을 제한시켜 자기를 가두어 버리는 것도 인간이다.
인간이 불필요하게 의식되는 많은 것들에서 자유롭게 의식을 놓아 놓는 것. 신경쓸게 많아져 분산되어 혼탁해져 버리는 의식을 명료하게 하는 것. 그 시간에 몰입하여 뇌의 압력을 낮춰주는 것. 이것이 차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고 미학이기도 하다.
의식이 흩어져 산만하면 안절부절이 된다. 태산이 무너져도 의연한 바로 그런 마음의 동요 없음이 곧 차다. 이 말은 의식이 흩어지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즉 정신이 크다라는 말과도 같다. 마음이 깊이라면 정신은 넓이와 같다. 의식은 넓게 확장되었을때 편안하고 깊게 몰입할때 안정된다. 사람은 매순간 의식하고 산다. 매순간 의식하면서도 안정된 이유는 정신의 확장 때문이다.
의식의 몰입이 가능해지는 이유는 이미 정신의 확장을 통하여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매순간 주변을 의식하지만 또 안전하다는 것은 아는 이유는, 그만큼 자기훈련을 통하여 정신을 확장하여 놓은 결과 이미 탐색이 끝난탓도 있으나 대칭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통제하는가... 자기를 통제할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때 의식은 주변을 인지하되 의식하지 않음으로 인해 몰입할 수 있게 되므로 편안한 상태가 된다. 자기 스스로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차이며, 혹은 다도이며, 혹은 다회이며 혹은 선차이다. 그리고 철학이다. 철학의 본질도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뻗어가고 어떻게 편안해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자 답하는 과정이라 여긴다. 모두 이러한 매커니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매커니즘이 쉽게 인식되지는 않는다. 우린 매순간 만나며 이러한 생각과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낯설어 하며 당혹해 하고 있다.
나역시 그렇다. 익숙하지 않는 만남들을 통해 차를 더 잘 느끼게 되지만, 그것이 또... 표현되기 까지는 내안의 갈등이 쉽사리 꺼지지 않는다. 언제나 자기안에서 난 반댈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를 자신이 통제할때(통합할때) 겉으로 자연스러움이 스며 나오게 된다. 곧 모든 만남의 형태가 차이며 철학이다. 만남 자체의 매커니즘을 형식으로 구현해 내어 단시간의 퍼포먼스적 형식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다도), 만남 그 자체를(다회 - 어느정도의 긴 시간) 통하여 그 공간안에서 그 시간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만들어 차를 구현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전반적인 정신과 행위의 모든 철학을 한데 묶어놓은 것이 선차이기도 하다.
이리 따지면, 우리의 일상...오늘 너와 나의 만남이 늘상 차(茶)이다. 그러니 우리는 매순간 차를 느끼고 있다. 또한, 매순간 만나서 매순간 자신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지난 잔상 되새김질...
나도 그렇다.
'내가 사회성이 떨어져요. 내가 뭘 실수한게 없나 혹은 분위기 잘 파악하고 있는지, 눈치가 없지는 않은지... 이런게 걱정되요..'
나도 그렇다.
뭔가 모르게 낯설고 이질적인 시간들과 겹쳐지게 될때는.
생각해보라...
너도 나도 처음 만났고, 모두 오늘 처음 본 이들이다.
물론, 모든 관계는 일대일이다.
관계를 처음 접할때 일대다를 상대할땐 누구나 벅차다.
자신은 혼자이고 다른 이들이 세트나 다수를 이루고 있는 형태일태는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언제나 사람은 독립된 객체인 존재대 존재로 맞서야 한다.
그렇게 만나야 하고 그렇게 대해야 한다.
나도 그렇다.
나도 그 누구를 막론하고 처음 본 이들에게 느껴지는 점에서 보자면 대동소이 하다. 그동안 우린 전혀 서로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서 한 자리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서로 바로 통할수도 있으나, 그 통함에 대해 대화를 나누거나 혹은 차이를 좁혀가거나에 있어서 어떤 괴리들은 반드시 발생하게 된다. 하물며 친밀감은 어떠할 것인가...? 그건 애초에 없는 것일수도 있고 바로 생겨날수도 있다. 그러나 친한것끼리 모이고 덜친한 것들은 밀어내듯이...,애초에 친했기에 서로 모여든 것이다. 무엇으로 친한 것일까... 자신이 감지하는 방향성이 서로 친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관계의 소실점이다. 그러나 애초에 친해서 모여든 것과 친밀감을 서로 느끼는 것은 또 다른 얘기이다. 친밀감은 이제부터 우리가 사건을 만들어 가며 우여곡절의 드라마를 통과 해가며 새롭게 생성시킬 감정이기 때문이다. 하기에, 친하다고 친밀감까지 반드시 갈거라는 그런 생각은 애초에 안하고 가는 것이 좋다. 친연이 있다고 하여 다 인연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낯설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이며, 모든 신경이 분위기 파악하는데 동원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 기분을 자기탓으로 돌리며 그런 자기 기분을 표현하게 되는 것.
자기문제로 돌리는 것.
그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주변이 의식되고 신경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이유..., 자기의 신경을 스스로도 어쩌지 못해서 자꾸 밖으로 삐져 나오게 되는 이유...., (공간에 시간을 투여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밀도가 높아져 사람은 어떤 긴장상태에 놓이게 되므로, 어떤 무게감을 느끼게 된다. 이 무게감이 주는 압박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할때 사람은 겉돌게 되거나, 어떤 스트레스 상태가 된다. 닫힌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 공간안에서의 시간의 쌓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만남은 다 이런 형태이다. 같은 공간안에서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 긴 시간일수도 있고 짧은 시간일수도 있으나 그 구조는 같다.) 바로 이 지점이 차(茶)가 발생되는 지점이다. 차의 필요성은 인간의 이러한 지점에서 발생한 것이다.
주변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고 분위기 파악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눈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자기안에서 실행되려면 방법론이 대두된다.
관계를 미학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 아니면 순간순간의 그때의 기분으로만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는 분명 차이가 있다.
관계의 소실점을 보면 자기를 넘어서게 된다. 관계의 소실점은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것을 모두 보는 것이다. 소실점은 너와 나 사이에 있고 너와나를 이어내는 선을 따라가보면 보인다. 소실점은 내가 느끼고 보지만 언제나 내 바깥에 너의 우리의 바깥에 있다. 그 소실점을 내안에서 느끼는 것이고 그 지점을 이어내는 것이다.
관계의 소실점을 보지 못하면 자꾸 주변이 신경이 쓰여 정신이 산란해져 피곤하게 된다. 거슬리는게 많아지고 감정투사를 하게 된다.
이 감정투사는 자기자신을 피로하게 만들게 된다. 결국 상대도 피곤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분위기 파악 안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정투사의 결과는 자신을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게 한다.
아무도 자기를 건드리는 이가 없다 하여도 스스로 주변을 의식하는게 극에 달하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결국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는 자기규정을 자꾸 반복하게 된다.
이래서 나는 안돼, 이래서 내가 문제가 있어, 이래서 내가 ....하는 자학이 계속해서 쌓이다보면, 또 이런 자학성이 자신의 무기가 되어 버린다.
이런 전제를 미리 깔고 얘기를 시작하게 된다.
이 말은 내가 곧 이러니 나좀 봐줘. 그러나, 이건 곧 어리광인 것이다.
생각이나 언어는 언제나 양날의 칼날과 같다.
자기규정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자기를 확장해 가는게 인간이기도 하지만, 자기규정을 통해 자기 생각과 행위의 폭을 제한시켜 자기를 가두어 버리는 것도 인간이다.
인간이 불필요하게 의식되는 많은 것들에서 자유롭게 의식을 놓아 놓는 것. 신경쓸게 많아져 분산되어 혼탁해져 버리는 의식을 명료하게 하는 것. 그 시간에 몰입하여 뇌의 압력을 낮춰주는 것. 이것이 차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고 미학이기도 하다.
의식이 흩어져 산만하면 안절부절이 된다. 태산이 무너져도 의연한 바로 그런 마음의 동요 없음이 곧 차다. 이 말은 의식이 흩어지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즉 정신이 크다라는 말과도 같다. 마음이 깊이라면 정신은 넓이와 같다. 의식은 넓게 확장되었을때 편안하고 깊게 몰입할때 안정된다. 사람은 매순간 의식하고 산다. 매순간 의식하면서도 안정된 이유는 정신의 확장 때문이다.
의식의 몰입이 가능해지는 이유는 이미 정신의 확장을 통하여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매순간 주변을 의식하지만 또 안전하다는 것은 아는 이유는, 그만큼 자기훈련을 통하여 정신을 확장하여 놓은 결과 이미 탐색이 끝난탓도 있으나 대칭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통제하는가... 자기를 통제할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때 의식은 주변을 인지하되 의식하지 않음으로 인해 몰입할 수 있게 되므로 편안한 상태가 된다. 자기 스스로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차이며, 혹은 다도이며, 혹은 다회이며 혹은 선차이다. 그리고 철학이다. 철학의 본질도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뻗어가고 어떻게 편안해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자 답하는 과정이라 여긴다. 모두 이러한 매커니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매커니즘이 쉽게 인식되지는 않는다. 우린 매순간 만나며 이러한 생각과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낯설어 하며 당혹해 하고 있다.
나역시 그렇다. 익숙하지 않는 만남들을 통해 차를 더 잘 느끼게 되지만, 그것이 또... 표현되기 까지는 내안의 갈등이 쉽사리 꺼지지 않는다. 언제나 자기안에서 난 반댈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를 자신이 통제할때(통합할때) 겉으로 자연스러움이 스며 나오게 된다. 곧 모든 만남의 형태가 차이며 철학이다. 만남 자체의 매커니즘을 형식으로 구현해 내어 단시간의 퍼포먼스적 형식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다도), 만남 그 자체를(다회 - 어느정도의 긴 시간) 통하여 그 공간안에서 그 시간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만들어 차를 구현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전반적인 정신과 행위의 모든 철학을 한데 묶어놓은 것이 선차이기도 하다.
이리 따지면, 우리의 일상...오늘 너와 나의 만남이 늘상 차(茶)이다. 그러니 우리는 매순간 차를 느끼고 있다. 또한, 매순간 만나서 매순간 자신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