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은 260자로 요약된 불교의 정수다. ‘존재는 공空한 것이다.’ 하는 ‘공 사상’을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결론이 없다. 대략 이런게 있으니까 각자 알아서 깨달으라는 식이다. 진리의 완전성을 다루고 있는데 완전하지가 않다. 저곳에 정상이 있다고 길을 안내할 뿐 정상에서 본 풍경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완전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을 말해줘야 한다. 완전한 것은 진리다. 진리의 의미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에 있다. 공空하다는 것은 세상이 무수한 의사결정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다. 공空하지 않은 것은? 꽉 찬 것이다. 꽉찬 것은? 의사결정하지 않는 것이다. 잘 익은 사과가 있다면 그것은 꽉 찬 것이다. 반면 덜 익은 과일은? 꽉 차지 않은 것이다. 잘 익은 사과는 먹으면 된다. 의사결정하지 않는다. 덜 익은 밥은? 익혀먹어야 한다. 의사결정해야 한다. 무엇인가? 잘 익은 것은 의사결정에 있어서 내가 수동에 서는 것이다. 덜 익은 것은 내가 능동에 서는 것이다. 핵은 의사결정이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세상은 바로 먹는 인스턴트 식품이 아니라는 거다. 의사결정해야 한다는 거다. 그것이 공하다는 것의 의미다. 그러나 사람들은 꽉 찬 것을 좋아한다. 황금이나 현찰이나 권력은 꽉 차 있는 것이다. 사랑이나 믿음이나 지혜는 공空한 것이다. 꽉 차 있는 것은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이미 의사결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한 것은 사람을 능동적으로 만든다. 의사결정은 할수록 실력이 늘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은 꽉찬 것을 버리고 공한 것을 선택하라고 가르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꽉찬 것을 부정한다. 그렇다. 요리된 밥은 꽉 찬 것이지만 5분 전에는 꽉 차지 않았다. 서양요리는 꽉 찬 것이지만 한식요리는 밥과 반찬을 합성해야 하므로 공空한 것이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전개된다. 결에 서므로 꽉 찬 것이며 기에 서면 공한 것이다. 결과에 서므로 꽉찬 것이며 원인에 서면 공한 것이다. 원인에 서야 내게 권리가 생긴다. 발언권이 생긴다. 결과에 서면 이용당한다. 집이 두 채 지어져 있으면 두 집 사이에 왕래하는 길이 생기는 법이다. 집은 꽉 찬 것이고 길은 공한 것이다. 그러나 집도 알고보면 꽉 찬 방과 방 사이를 공한 복도가 연결하고 있다. 방 안도 꽉 찬 책상과 침대 사이를 빈 공간이 연결하고 있다. 이렇듯 계속 파고 들자면 물질도 공한 것이며 우주 안에 꽉 찬 것은 없다. 꽉 찬 것은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결 포지션이다. 결에 서면 사건이 종결되었으므로 개입할 수 없다. 내가 떠밀려 나가떨어지므로 만원버스처럼 꽉 차 있는듯이 느껴지며, 이는 존재의 사실이 아니라 나의 주관적 입장에 불과하다. 모든 존재는 결에서 보면 꽉 찬 것이 되고, 기에서 보면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는 본래 공한 것이며, 결에서 보면 꽉 차 있지만 결에 선 자에게는 발언할 권리가 없으므로 ‘닥쳐!’ 모든 꽉 차 있는 것은 이미 끝난 것이다. 단단한 황금도 광산에서는 크게 비어 있다. 광부의 이익은 그 비어있음에 있다. 컴퓨터도 하드디스크가 꽉 차 있는 것은 남이 쓰던 중고품이다.
◎ 꽉 찬 것과 공한 것이 있다. 꽉 찬 것은 이미 먹어버린 밥이요, 결혼해버린 킹카요, 끝나버린 월드컵이요, 이륙한 비행기요, 버려진 사진첩이다. 내게 발언권이 없다. 내가 개입할 수 없다. 의사결정할 여지가 없다. 공한 것은 지금 요리중인 음식이요, 데이트 중인 파트너요, 이제 진행중인 월드컵이요, 좌석이 있는 비행기요, 내가 채워야 할 사진첩이다. 내게 발언권이 있다. 의사결정할 수 있다. 의사결정은 사건과 사건을 연결시킨다. 길을 이어 또다른 길을 만들어낸다. 친구 한 명을 사귀면 그 친구로부터 또다른 친구를 소개받는다. 이성친구를 사귀면 없던 아이가 새로 생긴다. 마트의 1+1 행사와 같다. 그것이 진리의 힘이다. 빈 밭에 씨를 뿌린다. 가을의 수확은 1+1을 넘는다. 꽉 찬 밭에는 씨앗을 뿌릴 수 없다. 이렇게 빈 것을 연결하여 덤에 덤을 더하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다. 그렇게 연결된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의사결정으로 보는 관점을 획득하면 도달할 수 있다. 이는 물리학의 양자개념과도 연결된다.
세상을 사건으로 보는 관점, 의사결정으로 보는 관점을 획득해야 합니다. 그것은 흔히 길로 표현됩니다. 길은 갈림길이고 갈림길에서는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택하면 연결되고 연결되면 하나가 됩니다. |
나이 50을 넘기니 없던 걱정과 불안과 초조함이 고개를 쳐들어
요즈음 공허한 우울증으로 힘들어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마음 먹고 살아가야하는지 길잡이가 되어주는 글을 만났네요.
미완성은 부족과 다르고 완성은 성공과 다르니
내가 공허함은 아직도 젊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동렬님의 글을 읽어오면서
내 작은 존재의 전 인류적 가치와 시공을 초월하는 포지셔닝을 확고히 한후
그를 출발삼아 세상과 직접 소통하는 전 인류적 관점의 삶을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그결과 근래 주변의 수많은 가까운 죽음을 목도하는 속에서도 오히려 삶의 능동적인 면을 발견하면서
소모적이며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해나가고 끊임없이 의사결정을 하며 조금씩 완성해가는 삶의 기쁨을
찾고 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저는 평소
반야심경의 공 空 이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결정되지않은 가치라고 해석하는데 같은 뜻이라 생각합니다.
그 가치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10을 쓸수도 있고 100을 쓸수도 있고 1000을 쓸수도 있습니다.
어떤이는 -100을 쓸수도 있겠지요.
예전에 사람을 혈액형으로 구분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지금은 진보와 보수로 구분합니다.
꽉 찬것에 기대려는 보수와. 빈공간을 채워가려는 진보.
사람을 타이틀보고 판단하려는 보수.
자기손에 맞는 악기를 찾으려는 사람과. 악기에 자기손을 맞추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손에맞는 악기를 사는 사람은 결국 자기얘기만 하고 거기서 끝이지만. 후자는 이 악기에서 최대한의 소리를 내기위해 이리저리 연구하면서 실력이 향상됩니다.
진보는 정말 시간이 오래걸리지만 확실한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