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인가? 깨달음은 나를 깨닫는다. 앎으로 충분할텐데 굳이 깨달음을 필요로 하는 것은 ‘구조의 문제’ 때문이다. 집 사이에 길이 있고 길 끝에 집이 있다. 앎은 집을 아는 것이고 깨달음은 길을 아는 것이다. 집은 머무르는 정靜이고 길은 나아가는 동動이다. 정을 아는 것은 반을 아는 것이고 동을 아는 것으로 앎은 완성된다. 정을 알면 자동차와 마차를 분별할 수 있고, 동을 알면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
◎ 존재는 정과 동으로 구성된다. 깨달음은 구조를 깨닫는다. 구조를 알아야 그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인가? 나를 운전할 줄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이다. 어떻게 나를 운전하는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나自我ego는 의사결정의 주체다. 그리고 의사결정영역 전반을 아우른다. 자동차로 말하면 운전체계다. 그리고 차체와 도로체계 전반을 아우른다. 자동차는 운전체계와 동력체계, 도로체계로 구성된다.
◎ 자동차는 운전체계, 동력체계, 도로체계로 구성된다. 의사결정은 사건 안에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사건에 있어서의 원인측이다. 내가 어떤 사건을 일으켰을 때 그 사건의 원인이 되는 것이 곧 나다.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기起가 되는 것이다.
◎ 나는 의사결정 주체다. 국가의 3요소는 주권, 국민, 영토다. 나의 3요소는 의사결정주체인 ‘자아의 나’, ‘의사결정 실체인 사람의 나’, 의사결정영역인 ‘소유의 나’로 형성된다. 각각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네트워크를 이룬다.
◎ of, by, for 차가 있어도 도로가 없으면 달리지 못한다. 차를 만들 때 도로체계도 함께 만들어야 한다. 스마트폰을 만들 때는 통신사의 기지국도 만들어야 한다.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 네트워크와 함께 간다. 가장 심오한 것은 of다. 자동차의 차체와 도로 정도는 초딩도 안다. 운전할 줄은 모른다. ‘사람 나’는 나의 몸통이다. ‘소유 나’는 가족과 내 주변의 모든 것이다. ‘자아 나’는 참으로 알기가 어렵다. ‘자아 나’는 의사결정권이다. 노예가 주인의 명령을 따른다면 의사결정권이 없다. 아이가 엄마가 시키는대로 따르면? 이 부분은 미묘하다. 깨달음은 자아 나를 아는 것이며 노예가 주인되는 것이다. ◎ 깨달음은 환경과의 관계에서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게 한다. 동물은 환경에 적응하고 인간은 환경을 바꾼다. 날씨가 추우면 동물은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지만, 인간은 집을 짓고 옷을 입고 불을 피워 환경을 극복한다. 인간은 환경과의 대결에서 우위에 선다. 링컨의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떠올릴 수 있다. of가 앞서고 by와 for로 갈수록 주체인 인간과 거리가 멀어진다.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of, by, for가 기, 승, 전이 된다. 이는 정확히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작동시켜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순서다. of는 나의 대칭이다. by는 나의 연동이다. for는 나의 바운더리다. of의 나는 ‘나의’이며 나의 아내와 대칭된 그 나다. 내가 상대하는 무언가와 대칭된 그것이 바로 of다. 한국팀이 일본팀과 축구를 한다면 나의 상대팀은 일본팀이요 일본팀과 대칭되는 그 팀이 바로 나의 팀이다. 그러므로 of가 가장 먼저 시작한다. 나의 3요소 중에서 나의 신체와 나의 소유는 쉽게 알 수 있다. 신체는 내가 움직일 때 따라오는 것이요 소유는 내가 건드려도 탈이 안 나는 것이다. 다만 나自我ego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다. 내가 의사결정을 못하고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친다면 나自我ego는 깨진 것이다. 기승전결에서 앞장서는 기가 되어야 하는데 앞장서지 못하고 눈치를 본다면 나自我ego는 그만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http://www.yanghwajin.re.kr/html/vod/vod_640.php?id=m_lectures&no=185 김대식 교수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3개의 CPU를 쓴다고 한다. 전두엽이 관장하는 대뇌피질과 변연계의 해마, 김교수가 ‘도마뱀 뇌’라고 표현한 원시의 뇌가 있다. 각각 미래, 과거, 현재를 담당한다.
◎ 도마뱀 뇌(원시 뇌) : 현재 이성적인 판단은 전두엽의 몫이다. 대개 전두엽이 뇌 전체를 관장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대뇌피질은 한꺼번에 많은 일을 처리하지 못하므로 용량이 넘치면 해마가 나서서 과거 데이터를 불러들인다. 해마가 감당을 못하면 도마뱀 뇌가 현재를 중심으로 해석한다. 치열한 전투를 치른다든가 곡예운전을 한다든가 하는 복잡한 상황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때 도마뱀 뇌는 단지 현재만을 판단한다. 현재는 주로 감정이다. 감정은 자기 신체상태다. 그리고 시청각 정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여러번 언급한 개장수 이야기를 인용할 수 있다. 동물은 누가 쫓아가면 도망치고 도망치면 쫓아간다. 그러므로 의사결정을 못하도록 헷갈리게 하면 사자도 제압할 수 있다. 두루마리 휴지 하나로 사자를 제압하는 동영상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다. 사자가 얼떨결에 사슴에게 쫓기는 일도 있다. of는 미래, by는 과거, for는 현재다. for는 위하여, 위하여는 배가 고프다든가, 똥이 마렵다든가, 섹스를 하고싶다든가 하는 본능적 충동이다. 탁구선수는 날아오는 공을 현재 곧바로 쳐내야 한다. 공은 현재 날아온다. 길을 가는데 갑자기 공이 얼굴로 날아온다면? 피해야 한다. 이건 현재다. 현재는 네트워크다. 현재는 자동차가 달려가는 도로체계다. 눈앞에 살펴야 할 신호등과 보행자가 있다. 자동차는 과거다. by는 공간에서 연결된다. 자동차는 엔진과 기어와 브레이크와 엑셀레이터 페달과 조수석과 트렁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들은 공간에 전개되어 있고 하나하나 판단하여 처리한다. 뇌의 입장에서 자동차를 구성하는 여러 부분들은 과거에 존재하는 것이다. of는 미래다. 자동차의 운전하여 가는 목적지는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다. 자동차의 운전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반면 현대차를 구입했다든가 하는건 과거에 결정한 것이다. 자동차의 운전은 먼저 현재를 보고, 다음 과거를 보고, 최후에 미래를 판단한다. 운전자가 전방을 주시하는 것은 자동차의 현재를 보는 것이다. 속도계나 연료계를 보는 것은 과거를 보는 것이다. 최종적인 의사결정은 미래를 판단하여 실행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현재 배가 고프다.≫과거 이미 아침을 먹었다.≫미래 다이어트를 해야지 참자. 이 순서로 판단한다. 의사결정의 순서가 이렇게 되는건 모든 의사결정은 대칭을 위주로 작동하며 의사결정을 촉발하는 대칭은 밖에서 오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도 날씨가 추워도 뇌 밖의 사정이다.
◎ 현재 – 바깥에서 동기를 얻는다. 의사결정의 3단계는 1)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고 2) 과거 정보와 비교하며 3) 다른 정보와 연동시킨다. 미인이 지나가면 어떨까? 예쁘다는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고, 기억 속의 다른 여자와 비교한다.
◎ 대칭 1 – 밖에서 안으로 마지막에 나의 미래 계획과 상관이 있는지를 판단한다. 첫째는 예뻐야 관심이 가고, 둘째는 내가 아는 사람보다 예뻐야 관심이 지속되고, 셋째는 나의 인생계획과 맞아떨어져야 가슴이 설레는 거다. 이 순서는 도마뱀뇌≫변연계 뇌(해마)≫대뇌피질(전두엽)의 작동순서와 일치한다. 문제는 상황이 급박하면 전두엽이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라면 1초에 여러 가지를 판단한다. 어느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뇌가 작동을 멈춘다. 그 때는 과거와 비교해서 과거에 했던 짓을 답습한다. 과거에 도망쳤으면 도망친다. 그러므로 한번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그 짓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더 급박하면 감정대로 해버린다. 동물적인 반사로 치닫는 것이다. 맹수가 으르렁거리듯이 개가 꼬리를 감추듯이 본능따라 행동하게 된다. 도마뱀 뇌의 작동이다. 결국 이성이란 미래를 위한 종합이다.
◎ 외부자극에 대한 대칭으로 현재를 도출한다. 미래로 가려면 과거를 먼저 얻어야 한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봐야 어디로 가야하는지 아는 것이다. 대전에서 부산으로 가려면 서울에서 왔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과거를 모르면 미래를 모른다. 역사공부를 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를 떠올리기는 쉽다. 과거는 뇌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과거≫미래로 가는 것이다. 이 순서는 국민을 위한 for, 국민에 의한 by, 국민의 of다. 한국어의 어순은 도마뱀뇌≫해마 뇌≫대뇌피질 뇌의 순서다. 영어는 반대로 of, by, for다. 의사결정은 of, by, for의 순서라야 한다. 그러나 의사결정을 위한 상황파악은 반대로 for, by, of 순서다 깨달음은 자아다. 자아는 of다. of가 만들어져 있느냐다. 노예에게 없는 그것이고 아기에게 없는 그것이다. of는 종합이다. 종합하여 일대일을 만드는 것이다. 한국팀과 일본팀은 일대일의 대결이다. 그런데 과연 한국팀은 존재하는가? 현재 일본팀이 침략하니까 for, 조정에서 논의하여 과거의 명장 이순신을 부르고 by, 이순신이 조선팀 of를 출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건 선제대응이 아니다. 일본팀이 도발하기 전에 먼저 일본을 제압해 두어야 한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현실의 for≫by≫of를 이상적인 of≫by≫for로 바꾸는 것은 이념이다. 그것이 신과의 일대일이다. 날아오는 공을 보고 외야수가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리 공의 낙하지점을 예측하고 그 위치에 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나自我ego는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기에 서는 것이다. 뇌의 작동순서인 for≫by≫of를 이상적인 of≫by≫for로 바꾸는 것이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로 바꾸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의 이성은 미래를 판단하는 능력이다. 현재에서 바로 미래로 갈 수는 없으며 반드시 과거를 거쳐가야 한다. 여기서 헤겔의 변증법을 떠올릴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정반합의 도식을 가진다. 변증법은 틀린 것이다. 정반합의 도식대로라면 한국팀과 일본팀이 축구를 해서 한일통합팀을 구성해야 한다. 그런 일은 없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이 나오는가? 아니다. 뇌는 구조론의 마이너스 원리에 따라 미분을 계속하여 최종적으로 남는 차이값만을 정보로 채택한다고 한다. 어떤 정보와 다른 정보를 비교하여 그 차이값을 얻고 그것을 단서로 삼아 판단한다. 비교할 정보는 과거의 정보이므로 현재의 정보를 과거의 정보와 비교하여 미래의 정보를 도출하는 것이다. 야구선수가 날아오는 공을 친다면 현재 공을 과거 공과 비교하여 공의 궤적을 도출한다. 타자는 현재 공의 위치에 방망이를 대는게 아니라 미래 공의 위치에 방망이를 갖다댄다. 현재를 보고 과거와 비교하여 미래를 맞추는 것이다. 그것은 차이값이다. 차이값만이 뇌가 채택하는 정보다. 어떤 정보가 정이고 다른 정보가 반이면 그 차이값이 새로운 정보 곧 합이 된다. 이는 물리학의 가속도 개념과 유사하다. 속도가 변하지 않으면 움직이고 있어도 뇌의 판단에는 정지된 것이 된다.
◎ 헤겔의 변증법 – 한국팀 정, 일본팀 반, 한일통합팀 합을 결성한다. 현재는 실행된 것이요 과거는 챙겨간 것이며 오직 차이값만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된다면 인터스텔라는 현재요 그래비티는 과거다. 비교하여 차이값을 도출할 수 있다. 그 차이값은 다른 영화가 베껴먹을 수 있는 인류의 공동자산이 된다. 그러므로 다투어 그 영화를 칭찬하는 것이다. 왜? 베껴먹으려고. 정확하게는 그 차이값이 만드는 새로운 대칭이 인류의 공동자산이다. 현재 B가 유행한다. 과거 A가 유행했다. 그 차이값으로부터 미래 C가 도출된다. 대개 예술분야에서 의견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그 차이값을 보지 않고 절대값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건 낡은 예술이다. 인상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의 정교한 아카데미즘 미술은 손재주를 과시하는 것으로 그 차이값이 없다. 말하자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와 똑같이 연주하면 되고, 파바로티와 똑같이 노래하면 되는 거다. 인상주의는 이를 부정한다. 차이값이 없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 파바로티와 똑같이 노래하면 0점을 주는게 현대예술이다. 예쁜 디자인은 좋은 디자인이 아니다. 센세이션을 일으켜야 좋은 디자인이다. 이는 차이값 개념, 가속도개념이 있느냐다. 대칭을 시켜야 이것이 판단된다. 대칭시키려면 종합해야 한다. 신과의 일대일이 되어야 차이값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깨달음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김기덕 영화는 절대값이 낮아도 차이값이 높다. 그러나 역대 대종상 수상작들은 절대값이 높을 뿐 차이값은 0에 가깝다. 아니 마이너스다. 올해의 명량도 마찬가지다. 외국에 자랑할 영화는 아니다.
나는 현재의 배고픈 나 for를 ≫ 과거의 정체성있는 나 by를 거쳐 ≫ 미래의 점차 커나가는 방향성 있는 나 of로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노예에게는 of가 없습니다. 아기에게도 of가 없습니다. of는 컴퓨터의 램 기능을 하는 전두엽이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직렬회로를 병렬회로로 변환시키는 것입니다. 파충류가 쓰는 원시 뇌는 도마 없이 그냥 칼질을 합니다. 인간은 램이라는 도마 위에 올려놓고 요리를 합니다. 들판에 뛰어다니는 짐승을 물어뜯는 것이 아니라 해마라는 하드디스크에서 저장해놓고 도마라는 램에 불러들여야 제대로 된 요리가 됩니다. 사자가 사슴을 먹는 것은 요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저장하는 것도 요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급하면 다람쥐가 되고 사자가 됩니다. 요리를 포기하고 물어뜯습니다. 과연 요리할 수 있습니까? for만으로도 생존은 가하나 by를 더하여 현상유지는 가하나 of가 아니면 진짜 나가 아니고 누구에게 종속되고 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