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은 진리를 ‘참인 명제’로 좁게 정의한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리는 더 깊은 뜻이 있다. truth는 진리의 진眞을 의미할 뿐 리理가 빠져 있다. 진眞 보다 리理에 주목해야 한다. 어떤 사실이 참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명제가 중요하다. 어떤 것이 거짓이면, 당연히 그 반대쪽은 참이므로 어떤 것이 거짓이라는 것은 반대쪽 어떤 것이 참이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명제가 아니면 곤란해진다. 이 경우는 그 반대쪽이 참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냥 개소리가 된다. 명제는 법칙에서 유래하므로 ‘판단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판단가능성이 중요하다. 예수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하는 말은 달리 봐야 한다. 다시 말해서 길이 아니고, 생명이 아니고, 존재가 아니면 진리가 아니다. 존재≫ 길≫ 생명≫ 진리다. 존재는 대칭되는 것이며, 길은 연결되는 것이고, 생명은 완결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다. 어떤 하나가 다른 것과 만나 연결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진리다. 불교의 법 개념이나 도교의 도 개념 역시 대칭 ≫ 연결 ≫ 완성의 의미가 있다. 무엇인가? 인간은 존재로 대칭해서, 길로 연결해서, 생명으로 완성된다. 진리는 미완성인 인간을 완성시켜 준다. 인간은 미완성된 존재인가? 개인으로는 완성되었다 해도 집단으로는 미완성이다. 개인은 완성되어 있으므로 늙으면 죽지만 사회는 죽지 않고 계속 진보해가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기독교는 인간을 원죄를 지은 노예로 보므로 미완성이다. 불교는 깨닫지 못했으므로 미완성이다. 도교는 자연상태가 아니므로 미완성이다. 진보주의는 사회화 되지 않았으므로 미완성이다. 대승의 팀에 들지 않으면 인간은 미완성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완성은 무엇인가? 집단의 의사결정이다. 북은 소리가 나야 완전하고, 피아노는 연주되어야 완전하듯이 의사결정해야 완전하다. 아기도 의사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기는 완전하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존재는 being이다. ~ing는 현재진행형이다. 실존existence은 현재 존속되는 시간적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공간에 널부러져 있는 것은 실존이 아니다. 살아가는게 실존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본질이 고정되어 있다는 의미다. 북이나 피리가 자체의 목적으로 완성되어 있다면 곧 본질이다. 실존으로 말하면 그 북은 소리나기 전까지 북이 아니다. 어떤 소리를 내는가는 누구를 만나는가에 달려 있다. 인간은 미완성의 존재라는 입장이 실존이다. 완성되어 있다고 보면 곧 신분제도다.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 귀족은 귀족, 노예는 노예로 각자 고유한 역할이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본질이다. 실존은 이를 부정한다. 진리는 미완성의 존재인 인간을 완성시켜 내는 것이다. 기독교는 구원으로 완성된다고 믿는다. 이는 실존이 부정하는 본질이다. 본질은 안에 있고 실존은 밖에 있다. existence의 접두어 ex~는 바깥을 뜻한다. 개인의 바깥은 사회이고 환경이다. 인간의 완성은 내면적인 믿음이나 자기완성이 아니라, 바깥에서의 적극적인 실천에 있다. 그런데 실존주의는 종교적 본질을 부정하지만 스스로는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다만 모색할 뿐이다. 이들은 히피와 비슷하다. 전쟁을 반대할 때는 제법 멋있었는데 전쟁이 끝나자 역할을 잃고 허무해졌다. 실존주의는 질문을 던지고 도망쳤다. 답을 제시해야 한다. 누구라도 진리를 말해야 한다. ‘생태적 지위’라는 말이 있다. 울버린은 태즈매니아 데블과 생태적 지위가 비슷하다. 전혀 다른 종인데 생긴 것도 비슷하고 하는 짓도 비슷하다. 너구리와 라쿤도 알고보니 완전히 다른 종이었다. 생긴게 비슷한데다 하는 짓도 비슷해서 미국너구리를 너구리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캘리포니아 도마뱀은 쿠바 도마뱀이 침범해 오자 생태적 지위를 바꾸어 그새 발바닥 크기를 키웠다고 한다. 불과 15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호주대륙에서는 수십만년 동안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고립된 곳에서 경쟁자가 없으면 생태적 지위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진화하지 못한다. 태즈매니아 데블은 안면암에 걸려 멸종위기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고립된 지역에서 흔히 이런 일이 일어난다. 태즈매니아 데블은 젖꼭지가 넷 뿐인데 새끼를 많이 낳아 70퍼센트가 죽는다. 수컷은 암컷을 물어뜯어서 강제로 임신시키는데 그 때문에 안면암의 전염을 막지 못한다. 이런 몹쓸짓은 사막처럼 고립된 지역에 사는 동물에게서 잘 관찰된다. 타자와 경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악은 인간개념이고 자연에는 없다고 여겨지지만 자연에도 선악이 있다. 진화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 방향성을 가지고 확률적으로 나타나며 상호작용은 확률을 높인다. 강변의 재첩이나 말조개는 여름에 수위가 줄어들면 90퍼센트가 폐사하기도 한다. 아주 몰살을 당하는 것이다. 경쟁자가 없을 때 이런 현상이 잘 나타난다. 유전적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진화는 방향성을 가지며 집단의 의사결정이 진보의 방향과 일치하면 선이고 역행하면 악이다. 악은 경쟁자가 없는 고립된 지역에 잘 나타나며 인간사회 뿐만 아니라 자연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경쟁은 다윈 생각이고 상호작용이 정확하다. 경쟁은 승자와 패자를 나누지만 상호작용은 공간적 존재를 시간적 존재로 승격시킨다. 자연에 승자도 패자도 없지만 시간적인 존재가 더 풍성하다. 한 알의 사과는 공간적 존재지만 사과나무의 일생은 시간적 존재이다. 선악의 판단은 시간적 존재에서만 가능하다. 공간에서는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벼락이 치든 선악의 판단이 불가능하다. 시간에서는 상호작용의 레벨을 높일 수 있다. 생태계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순방향 진행은 선이고 역방향은 악이다. 금을 돼지에게 주는 것은 악이고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은 선이다. 무엇인가? 인간은 원래 돼지와 생태적 지위가 같았다. 그러나 돼지와 달리 인간은 개체 단위가 아닌 집단 단위의 의사결정을 했고 이 방법으로 생태적 지위를 높여왔다. 일베충은 예외다. 개같은 짓을 하면 자신의 생태적 지위를 개로 규정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이 생태적 지위를 높여왔으며,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옮겨탔으며, 그것이 인간의 길이고 생명이고 존재이다. 그렇다면? 생태적 지위를 높여야 한다. 혼자서는 지위가 높아지지 않는다. 집단의 진보로만 지위가 바뀐다. 자연의 생태환경 안에서 인간집단이 의사결정권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방법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레벨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양의 생존경쟁에서 질의 문화경쟁으로 전략을 바꾸어야 한다. 먹고 사는게 장땡이라는 동물의 생존경쟁은 인류집단의 생태지위를 높일 수 없다. 등산복 입고 다니면 생태적 지위가 낮아진다. 의사결정권자가 될 수 없다. 이는 기계적으로 정해져 있으므로 따라야 한다. 등산복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도시의 모습을 어떻게 디자인 하겠다는 적극적인 의도를 깔고 들어가는 전략적 기동을 해야 생태적 지위가 높아진다. 다른 집단이 디자인을 따라오면 잽싸게 디자인을 바꾸어야 한다. 집단이 일정한 수준에 오르면 생산의 효율경쟁에서 디자인의 레벨경쟁으로 판갈이를 한다. 그것이 집단의 상호작용하는 수준을 높이기 때문이다. 물질적 에너지에서 심리적 에너지로 바뀐다. 새들은 이미 디자인 경쟁을 하고 있다. 극락조 무리가 가장 열심이다. 몸집을 키우거나 새끼를 많이 낳는 데는 관심이 없다. 개체의 생존확률을 높여봤자 집단이 붕괴하면 도로아미타불이다. 집단의 생존확률을 높이려면 레벨경쟁을 해야 한다. 그것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경쟁이 아니라 상호작용의 수준을 개체단위에서 집단단위로 높이는 것이다. 올림픽 경기는 개체단위 경쟁이다. 우사인 볼트가 우승해봤자 자메이카의 레벨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관광객이 일본이 아닌 한국을 택하면 한국의 레벨이 올라간다. 생태적 지위는 개체가 아니라 팀 단위로 판명된다. 일베충들의 생태적 지위는 일베충 지위다. 개인이 ‘나는 높다’고 규정하고 선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집단의 의사결정은 분명히 그 집단의 지위를 높인다. 이는 인류문명의 정해진 방향성이다.
◎ 진리는 짝을 찾고 연결하고 완성하는 것이다. 라디오나 텔레비젼은 방송국에서 전해오는 소리를 시청자에게 잘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타고난 본질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방송하면서 동시에 새 프로그램을 기획해야 한다. 방송의 트렌드를 바꾸어야 하고, 그걸로 센세이션을 일으켜야 하고 이 방법으로 심리적인 일체감을 도출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생태계의 임무는 진화고 문명의 임무는 진보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이는 하나의 상호작용 레벨에서 의사결정할 때 인간의 기분이 좋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가치판단은 언제라도 하나를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기분이 좋기 때문에. 제 소리를 내기 때문에. 하나는 전체이며, 그것은 인류문명 단위의 의사결정입니다. 진리의 팀에 드는 것이 정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