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문제 사실이지 황당한 단어다. 믿음이 뭐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도 널리 쓰인다. 믿음이란 말을 함부로 쓰는 사람 치고 제대로 믿는 사람 없더라. 어원을 살펴보자. believe는 ‘바로+버린다’는 말인데 ‘의심을 거둔다’는 뜻이다. 납치결혼을 하던 게르만족이 봄에 유목을 떠나기 직전에 여자를 납치하고 한달 동안 숲에 숨어 살다가, 여동생을 찾던 오빠들이 포기하고 목축을 떠나면 허니문을 끝내고 숲에서 빠져나오는데, 그때는 여동생을 찾는 오빠들에게 살해될 위험이 없어졌으므로 여자가 도망치는지 감시하지 않고 내버려두는게 믿음이다. credit는 약속이 ‘굳었다’hard는 뜻이다. faith는 ‘받들다’의 뜻이다. 이런 단어들은 타인들과의 계약관계를 나타낸다. 서구인의 관점에서 믿음은 계약을 준수하는 것이다. 십계명부터 시작해서 서양의 종교적 콘텐츠에는 계약에 따른 의무의 준수를 나타내는 표현이 많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인간에게 커다란 혜택을 준 것이며 인간은 이에 보답을 해야 하고 신과 인간 사이에 묵시적인 계약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믿다 [동사] 1. 어떤 사실이나 말을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다고 여기다. 국어사전은 한심해서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이게 뭔 소리여? 1번은 ‘어떤 주장을 참으로 받들이는‘ 것인데 이건 종교적 믿음이 아니다. 광고를 믿는다거나 TV를 믿는다는 식이다. 참과 거짓에 대한 판단일 뿐 진정한 믿음은 아니다. 2번은 ‘의지하다+1번의 반복’이고 3번은 종교적 표현으로 쓰인다는 예시일 뿐 믿음 자체에 대한 설명은 아니다. 국어사전의 믿음은 어떤 주장을 참이라고 판단하거나 혹은 어떤 대상에 의지하는 것이다. 역시 진정한 믿음은 아니다. 하긴 철학적 개념을 국어사전에서 찾을 수는 없다. 부모가 자식을 믿는 것은 자식의 말이 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며, 자식에게 의지하는 것도 아니다. 자식을 받들고 따르는 것도 아니다. 국가를 믿는다면 국가에 의지하는 것인가? 지금 전쟁중이고 나라가 망한 상황이라도? 나라가 망하면 국가를 믿을 수 없는 건가? 보통은 의사결정의 위임을 믿음이라고 한다. 종교적 믿음에서 말이다. 그런데 왜 의사결정을 위임하느냐다. 서양인의 믿음은 계약이다. 입교할 때 계약을 했기 때문에 위임하는 거다. 근데 이건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불교도 수계식을 한다. 연비라고 해서 향불로 팔뚝을 지지기도 한다. 쿵후 드라마에는 소림사에서 불에 단군 화로에 생살을 태워 용문신을 새기는 장면을 내보냈다.
문신으로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게 믿음이라는 거다. 쿵후는 미국에서 만든 TV드라마다. 물론 이런건 가짜 믿음이다. 믿지 않으니까 약속을 하고 문신을 새기고 세례를 받고 계율을 지키는 거다. 진짜로 믿는 사이라면 약속이 왜 필요하냐고? 부모가 자식과 약속을 해서 자식을 믿는가? 내가 키워줬으니 나중에 효도로 갚아라 이건가? 배당을 노린 투자였단 말인가? 이건 불신이다. 그렇다. 믿음이라고 말하지만 대부분 믿지 않는다. believe는 의심을 거둔다는 말인데 실제로는 약속을 하고, 다짐을 받고, 문신을 새기고, 감시를 한다. 그게 믿음이냐? http://gujoron.com/xe/518905 사마귀 암컷은 교미하기 전에 수컷의 머리를 먹는다. 교미를 마치고 나머지 신체를 먹는다. 어떤 벌레는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먹는다. 부모가 자식을 믿는 것은 계약도 아니고, 참과 거짓에 대한 판단도 아니다.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떠받드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육체는 원래 흙에서 빌린 것이나 논할 것이 못 되고 영혼은 없으니까 역시 논할 것이 못 된다. 있는 것은 의사결정이다. 믿음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계약이다. 그것은 이미 결정된 것을 지키는 믿음이다. 둘째는 결정을 상부구조에 위임하는 것이다. 집단의 리더를 믿는 것이다. 셋째는 상부구조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 리스크를 감수하고 계약을 지키는 믿음. 진정한 믿음은 세 번째다. 그것은 의미있는 의사결정이다. 의미있는 의사결정은 상부구조에서 가능하다. 말단직원과 계약서를 써봤자 지켜지지 않는다. 재벌회장과 한 약속은 지켜진다. 의사결정을 할 때는 상부구조에서 해야 하며, 리스크가 없게 해야 한다. 믿음은 의사결정에 연동되는 리스크에 대한 태도이며, 상부구조에서 결정함으로써 애초에 리스크를 없게 하거나, 혹은 똑똑한 지도자에게 의사결정을 위임함으로써 리스크를 줄이거나 혹은 약속을 지킴으로써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이다. 믿음은 의사결정을 바르게 하여 리스크를 방지하거나 줄이거나 감수하는 것이다. 믿음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의 방법이다. 그런데 과연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냐다.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해놓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라고 우기기 위해 믿음이라는 단어가 소용되는 것이 문제다. 신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신을 믿는다고 하면 신을 타자로 인식하는 것이며 이는 신과의 계약관계를 나타낸다. 이는 거짓 믿음이다. 신을 믿는 사람 중에 신을 믿는 사람은 없다. belief는 될 수 있어도 진정한 믿음은 아니다. 의사결정의 영역에서 부모와 자식은 같아진다. 부모의 이익이 자식의 이익이고 자식의 이익이 부모의 이익이다. 그렇게 의사결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자식이 돈을 벌었다. 그래서 배가 아프면 믿음이 아니고 배가 부르면 믿음이다. 이해득실을 따져서 이익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다. 자식이 번 돈을 부모에게 상납하므로 자식의 이득은 부모의 이득으로 연결되고, 자회사가 돈을 벌면 지주회사 주가가 오르는 그런게 아니라, 부모가 내일 죽어도 자식이 돈을 벌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떠나는 것이 믿음이다. 결정된 것을 지키거나 혹은 결정을 위임하는게 아니라 상부구조에서 직접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은 결과가 어떻게 되든 리스크가 없다. 대학축제 때 학생들이 어떤 짓을 했건 그 소행은 나의 짓이므로 리스크가 전혀 없는 것이다. 어떤 대학의 학생들이 무슨 짓을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결과가 어떻든 리스크는 없다. 대학축제에서 학생들이 어떤 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한 것이다. 내가 인간이고 그들이 인간이므로 그들이 곧 나이고 그 행동은 곧 내가 한 행동인 것이다. 하느님이 인류를 창조했다. 인간들이 여기저기서 무슨 짓을 했다. 그 짓을 누가 했는가? 하느님이 한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지었다. 누가 죄를 지었는가? 다 하느님의 작품이다. 그게 다 하느님의 솜씨다. 그러므로 대학축제에서 한 행동을 두고 “내가 안 그랬는데요?” 하는 넘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믿음은 상부구조에서 의사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스크가 없는 것이다. 리스크를 회피하거나 혹은 리스크를 감수하는 행동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물론 belief는 될 수 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이나 확신에 불과하다. 수컷 사마귀가 암컷에게 몸을 내놓는 것은 암컷이 암컷이 자기를 먹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이나 확신이 아니고 그렇게 몸을 내놓고 자신의 임무를 마치는 본인의 의사결정이다. 내가 결정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대학생이 어떻게 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그거 제가 그랬걸랑요." 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잘되든 잘못되든 내가 한 행동이다. 김조광수가 동성결혼을 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내가 그랬는데요? 이게 1초만에 안 나오는 사람은 훈련을 해야 한다. 도를 닦고 볼 일이다. |
<중용>에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도 삼간다고 했습니다.
개인이 인류의 일부이며 동시에 인류 그 자체라는 생각이 있다면
말 하나 행동 하나 삼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성적 소수자나 장애인을 자신과 같이 여길 수 있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도 자신의 죄인 것 처럼 여기게 될 것 입니다.
구조론은 범신론이면서도 동시에 강력한 윤리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