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문득 생각나서...쓰다 만 글을 오늘 지금 완성하다.
자야 하는데..자꾸 생각이 미치니..어쩔수 없이...ㅜㅜ
오늘 만휴에 구조론 회원분이 오셨는데... 이 얘기 저 얘기 차 내고 다식 내고 손님오고... 내 정신이 어디에 있는질 몰라서 전화번호도 교환 못하고... 이제 닉도 생각이 잘 안나서..좀 당황스럽다..ㅋㅋ
그런데도 대화 내용은 생각이 난다..
나는 무심코 지나갔던 자사호 개완에 써진 한문, 그 한문을 보더니...
"진공묘유"에 대해 얘기를 해보다.
불교용어 이고, 검색해서 찾아보니.. 백과사전 설명은 더 난해했다...서로 진공묘유에 대해 얘기 하기가 더 애매해져서... 참나, 아공, 법공, 일체유심조, 절대성...이런 얘기들이 스쳐지나가서... 한때 불교는 이걸로 엄청난 논쟁을 했고, 지금도 그렇고... 그래서 어느 시대나 이런 논쟁은 있었군요....로 회원분이 마무리...
이리 서론이 긴 이유는...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진공묘유에 대해 느껴진 바를 풀어 쓰려고 하니, 어제 쓰다 만 글이 그와 맥이 통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연이 있나...ㅎㅎ
불교...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 작용이다. 또 일체는 12처이므로 나는 마음에서 비롯 되었다. 이기도 하다. 불교의 수행 방식은 자기를 보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다보니 세상 보다는 자신을 먼저 바꾸고자 한다. 이러한 부분은 또..세상을 바꾸기보다는 순행하는 풍조를 가져왔다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요즘 일체유심조는 세상을 바꿀수 없으니 나를 바꾼다. 라고 해석이 되는거 같기도 하다.(저의 생각이니..테클은 사양합니다.ㅎ)
구조.... 일체유구조...세상은 바꿀 수 있다. 세상은 상호작용이다. 구조를 바꾸면 된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내가 어제 생각나 쓰던 글은 바로 이 부분이다.
구조를 바꾸려면 형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 다음에서야 내용을 채울수 있다.
형식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형식은 유하다. 그런데 인식할때 고정되어 있거나 딱딱한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사회의 제도 관습 법을 먼저 접하기 때문이다.
형식은 변화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내용은 채워지거나 빠져나가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
형식은 본래 부드러운 것이다.
변화할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할수 있기 때문에 하나가 무수하게 다양하게 변용이 될 수 있다.
형식은 어떤 상황이나 무엇인가를 담아낼 필요성이 있을때 형식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다듬어서 인간은 삶과 사회에 적용 시키게 된다.
관념의 추상에서 현실화로의 모습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보통 이 과정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아서 쓰던 형식을 그대로 쓰려고 한다. 쓰던 형식을 세상이 바뀌어 가는데 계속 쓰다보면 뭔가 잘 맞지 않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형식은 고정되고 변하기 어렵고 딱딱하고 불필요한 형식화가 되었다고 비판하게 된다. 형식무용론은 그래서 사실 인간의 변화하는 특성을 가로 막는 것과 같다.
그 무엇이라도 먼저 기본 틀(형식)이 잡혀야 한다. 그 다음 무엇인가를 채우거나 내보내거나 할 수 있다. 형식은 하나의 객체로 설 수 있게 한다. 경계를 지어준다. 나라는 객체 너라는 객체... 하나의 사회 제도라는 객체, 또 지구라는 객체... 달이라는 객체... 형식은 안과 밖을 경계하여 구분짓고, 안에서의 채워질 내용에 질서를 부여하고, 밖으로는 객체로서 대등한 존재로 바로 서게 한다.
형식은 하나가 무수한 변주를 통하여 다양한 형식으로 다각화 되어 진화해 왔다. 형식은 딱딱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형식은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 상황에서의 안과 밖을 구분짓고 무엇인가를 채우거나 내보내서 존재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형식이 유동적이고 변화하고 무언가와 만났을때 그 필요성이 생겨나서 틀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얘기이고, 그 형식을 제대로 사용할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하드웨어인 형식과 소프트웨어인 내용...
형식과 내용에서 형식이 어떤 상황에서 틀을 갖고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상대적이라면, 이러한 메커니즘으로 형식은 드러나고 감춰지고 하는 특질은 절대성이다.
나는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삶을 살아가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나의 하드웨어는 세상과 나를 구분짓고 하나의 독립된 객체로 존재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 어디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형식의 크기가 달라지고, 안팍의 구분 지점이 달라진다. 형식은 눈에 보이는 부분을 다룰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다룰수도 있다.
그러나 형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을 현실로 이끌어 낸 것이므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 먼저다. 단지 눈에 보이는 형식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형식을 유추하게 되는거 뿐이다. 이렇게 유추되어 메커니즘은 발견된다. 발견하고 나면 유추과정은 역으로 발견한 지점(추상)에서 시작되어 다시 현실로 넘어온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우리는 그동안 사용해 오고 있었고...철학에서는 그 부분을 다뤄오고 있었다.
형식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단지 변화하고 모습을 바꿀 뿐... 형식 그 자체의 절대성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형식은 유하기 때문에 다양하게 모습을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은 진보하고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자야 하는데..자꾸 생각이 미치니..어쩔수 없이...ㅜㅜ
오늘 만휴에 구조론 회원분이 오셨는데... 이 얘기 저 얘기 차 내고 다식 내고 손님오고... 내 정신이 어디에 있는질 몰라서 전화번호도 교환 못하고... 이제 닉도 생각이 잘 안나서..좀 당황스럽다..ㅋㅋ
그런데도 대화 내용은 생각이 난다..
나는 무심코 지나갔던 자사호 개완에 써진 한문, 그 한문을 보더니...
"진공묘유"에 대해 얘기를 해보다.
불교용어 이고, 검색해서 찾아보니.. 백과사전 설명은 더 난해했다...서로 진공묘유에 대해 얘기 하기가 더 애매해져서... 참나, 아공, 법공, 일체유심조, 절대성...이런 얘기들이 스쳐지나가서... 한때 불교는 이걸로 엄청난 논쟁을 했고, 지금도 그렇고... 그래서 어느 시대나 이런 논쟁은 있었군요....로 회원분이 마무리...
이리 서론이 긴 이유는...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진공묘유에 대해 느껴진 바를 풀어 쓰려고 하니, 어제 쓰다 만 글이 그와 맥이 통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연이 있나...ㅎㅎ
불교...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 작용이다. 또 일체는 12처이므로 나는 마음에서 비롯 되었다. 이기도 하다. 불교의 수행 방식은 자기를 보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다보니 세상 보다는 자신을 먼저 바꾸고자 한다. 이러한 부분은 또..세상을 바꾸기보다는 순행하는 풍조를 가져왔다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요즘 일체유심조는 세상을 바꿀수 없으니 나를 바꾼다. 라고 해석이 되는거 같기도 하다.(저의 생각이니..테클은 사양합니다.ㅎ)
구조.... 일체유구조...세상은 바꿀 수 있다. 세상은 상호작용이다. 구조를 바꾸면 된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내가 어제 생각나 쓰던 글은 바로 이 부분이다.
구조를 바꾸려면 형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 다음에서야 내용을 채울수 있다.
형식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형식은 유하다. 그런데 인식할때 고정되어 있거나 딱딱한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사회의 제도 관습 법을 먼저 접하기 때문이다.
형식은 변화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내용은 채워지거나 빠져나가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
형식은 본래 부드러운 것이다.
변화할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할수 있기 때문에 하나가 무수하게 다양하게 변용이 될 수 있다.
형식은 어떤 상황이나 무엇인가를 담아낼 필요성이 있을때 형식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다듬어서 인간은 삶과 사회에 적용 시키게 된다.
관념의 추상에서 현실화로의 모습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보통 이 과정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아서 쓰던 형식을 그대로 쓰려고 한다. 쓰던 형식을 세상이 바뀌어 가는데 계속 쓰다보면 뭔가 잘 맞지 않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형식은 고정되고 변하기 어렵고 딱딱하고 불필요한 형식화가 되었다고 비판하게 된다. 형식무용론은 그래서 사실 인간의 변화하는 특성을 가로 막는 것과 같다.
그 무엇이라도 먼저 기본 틀(형식)이 잡혀야 한다. 그 다음 무엇인가를 채우거나 내보내거나 할 수 있다. 형식은 하나의 객체로 설 수 있게 한다. 경계를 지어준다. 나라는 객체 너라는 객체... 하나의 사회 제도라는 객체, 또 지구라는 객체... 달이라는 객체... 형식은 안과 밖을 경계하여 구분짓고, 안에서의 채워질 내용에 질서를 부여하고, 밖으로는 객체로서 대등한 존재로 바로 서게 한다.
형식은 하나가 무수한 변주를 통하여 다양한 형식으로 다각화 되어 진화해 왔다. 형식은 딱딱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형식은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 상황에서의 안과 밖을 구분짓고 무엇인가를 채우거나 내보내서 존재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형식이 유동적이고 변화하고 무언가와 만났을때 그 필요성이 생겨나서 틀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얘기이고, 그 형식을 제대로 사용할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하드웨어인 형식과 소프트웨어인 내용...
형식과 내용에서 형식이 어떤 상황에서 틀을 갖고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상대적이라면, 이러한 메커니즘으로 형식은 드러나고 감춰지고 하는 특질은 절대성이다.
나는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삶을 살아가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나의 하드웨어는 세상과 나를 구분짓고 하나의 독립된 객체로 존재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 어디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형식의 크기가 달라지고, 안팍의 구분 지점이 달라진다. 형식은 눈에 보이는 부분을 다룰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다룰수도 있다.
그러나 형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을 현실로 이끌어 낸 것이므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 먼저다. 단지 눈에 보이는 형식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형식을 유추하게 되는거 뿐이다. 이렇게 유추되어 메커니즘은 발견된다. 발견하고 나면 유추과정은 역으로 발견한 지점(추상)에서 시작되어 다시 현실로 넘어온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우리는 그동안 사용해 오고 있었고...철학에서는 그 부분을 다뤄오고 있었다.
형식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단지 변화하고 모습을 바꿀 뿐... 형식 그 자체의 절대성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형식은 유하기 때문에 다양하게 모습을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은 진보하고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르페
김동렬
형식을 깨고 새로운 형식을 만드는게 진보입니다.
형식을 깨려면 일단 형식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형식을 기득권으로 놓고 반항하겠다는 식으로 가면 실패입니다.
그건 형식을 깨는게 아니고 괜히 건드려서 더 견고하게 만드는 겁니다.
형식은 에너지가 들어오는 원천입니다.
본인이 그것을 장악하고 지배하겠다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형식에 돌을 던지고 야유를 퍼붓는 소박한 방식으로는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없죠.
형이 나오는 이유는 외부에서 에너지를 조달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체조를 하더라도 팔뚝에서 힘이 나오는게 아니고 체중에서 나오는 것이며
체중은 지구의 중력에 빨대 꽂아놓고 잠시 빌려 쓰고 갚아야 하는 거죠.
그러나 일단 지구로부터 힘을 조달한 다음에는 무궁한 변화가 가능합니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여오는 것이 형이고 자기 안에서는 변형하는 거죠.
컴퓨터라도 USB라든가 바깥과 연결하는 잭은 형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설계는 맘대로 해도 전원은 무조건 220볼트 코드를 써야하는 거죠.
세계철학의 기조를 간단히 살펴보니,
근대이전의 선형적 구조, 근대의 원형적 구조, 현대의 탈중심적 구조, 최근의 파편화된 분절적 구조로 발전해왔습니다.
인간중심적인 근대철학을 넘어서서 중심의 다원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현대철학은 큰 틀에서 구조론과 맥을 같이 합니다.
특히 최근사조인 파편화된 분절구조는 모듈화, 모형화를 지향하는 구조론에 상당히 근접했다고 봅니다.
경직구조 -> 탈구조 -> 배열화된 구조 순으로 현대철학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서구 철학자들이 구조의 형식에 대해 서서히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것 같네요.
코 앞에 최강의 구조철학이 있음에도 유럽 사대주의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국 철학자들은 해당사항이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