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나온 김에 했던 이야기 리바이벌해보자. 일생에서 가장 크게 충격받은 일 중의 하나가 만유인력을 처음 접한 일이다. 그때까지 나는 사과가 무겁기 때문에 떨어진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뉴턴의 만유인력과 나의 ‘무겁기 때문에’는 무엇이 다를까? 다른거 없다. 단지 있어보인다는거 뿐이다. 그렇다. 아는 사람은 있어보이게 말해야 한다. 그냥 아는 것은 아직 아는 것이 아니다. 있어보이게 말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유인력은 네 글자로 똑 떨어진다. 맞춤하게 각이 딱 잡혀주는 거다. 그러나 나의 ‘무겁기 때문에’는 뭐 구질구질하다. 깔끔하지 않다. 촌넘이 도시소녀 좋아하는 것 같다. 황순원의 소나기는 사기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어쨌든 소년시절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엄지와 까치의 조우는 판타지다.
때국물 줄줄 흐르는 까치가 거름냄새 나는 옷으로 도시에서 전학온 아이 엄지 근처에서 얼쩡거릴 수는 없다. 피해다녀야 한다. 욕 쳐먹으면 평생의 트라우마가 된다. 내가 원래 좀 까칠하다. 안다면 그것은 예쁘게 포장되어야 한다. 포장되지 않은 지식은 진정한 지식이 아니다. 포장된다는 것은 대상을 일의적으로 통제한다는 말이다. 즉 ‘말을 아느냐’는 말을 다룰줄 아느냐이다. 말을 탈줄 모르는 사람이 ‘나는 말을 안다’고 씨부리면 안 된다. 만유인력의 의미는 내가 그것을 다룰 수 있다는 거다. 다루려면 전체가 한 줄에 꿰어져 있어야 한다. 메커니즘으로 꿰어낸다.
포크트릭과 같다. 포크트릭은 한 점이 전체를 대표하는 성질을 나타낸다. 자이로스크포와도 같다. 동적균형이다. 참된 지식은 메커니즘 형태로 구현되어야 하며, 일의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아치와도 같다. 돌 한 개를 빼면 전체가 무너진다. 목수라면 못 한 개를 빼서 집 전체가 무너지게 지을 수 있어야 한다. 그 건물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건물 전체가 못 한 개를 보호한다. 그 한 개의 점에서 의사결정은 일어난다.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지점을 겉으로 노출시켜야 한다. 그 한 점을 다루어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 알 수 있다. |
일직선으로 정렬시켜야하는데 (힘의 정의도 이와 같다.), 이떄 창의가 나온다.
힘을 통제한다는건, force = mass * acceleration 으로 정의하고 들어간다. 갑자기, 질량과 가속도라니.
이게 실은, 수학의 미분개념에서 나왔다.
거리-속도-가속도, 한번씩 미분한다. 시간텀으로 쪼갠다는게 다르다.
그리고, 마지막 가속도에, 질량을 곱하면 힘이고, 속도에 질량을 곱하면 모멘텀
각 힘과 모멘텀은 움직이는 동안에도 보존된다. 동적균형?
하여간, 창의가 안된다면, 적어도, 창의하는 사람 곁에라도 있어야, 옮는다.
아니, 창의가 되는 사람을 볼줄 아는 안목을 기르는게 중요.
굉장히, 매력적이어서, 쉽게 전파된다. 이게 안되면, 걍, 평생 노가다하면서
괴로워하며 사는거구. 그거 괴로워하는것도, 중국이, 기계가 계속 대신하게 될운명이라는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