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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제의 폐지가 시행된지 거의 100년이 되어서야
의식속에서의 신분제마져 사라졌다.
경제-사회구조가 바뀌어야 의식마져 바뀐다.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없어진 것이 갑오개혁(1894년, 갑오경장이라고도 함)이다.
그전에 갑신정변(1884년), 동학혁명(1893년)에서 줄기차게 주장되었고 갑오개혁 때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공노비가 폐지된것이 1801년이고(이전부터 공사노비 폐지논의도 많았음),
노비세습제폐지가 1886년이니 신분제의 폐지는 100년을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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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때만 해도 양반-상놈이라는 의식속의 차별은 여전하였다.
내가 결혼때 성씨를 보고 양반인지 따졌다.(1989년도 결혼)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이 완전히 사라졌다.
논이 남아돌면서 농사의 가치가 적어지고
본격적인 공업화로 농업으로 이득이 없어지자 농촌공동체가 희박화되고
도시화로 전통적인 사회가 붕괴하자
마침내 전통적인 반상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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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부농들은 머슴을 두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소작농이 많았다. 물론 자작농인데 자기논을 가지고 있으면서 남의 논도 부쳤다.
70년대 초중반부터 공업화-도시화가 본격화되자
젊은 층이 이농 혹은 아예 농사를 짓지않고 도시로 나가면서
머슴을 하려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리고 머슴이 없어지자 부농들은 논을 다 부치지 못하여 소작을 주기 시작했고(전통적인 소작료 1/2보다 쌌다)
이농한 사람들도 자기논을 부쳐야 하기에 누가 소작을 했다.
근데 이런 소작도 80년대 중반이 되자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농사를 지어봐야 이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빈 논으로 놔둘수가 없어서 억지로 떠맡겨 농사를 지었고
소작료라고 해봐야 주면 받고 안주면 그러려니 했다.(인정상 1/10 정도 받고 있음)
우리집도 자작농이었으나 논이 충분하지 않아 소를 많이 길렀다.(70년대 중반부터)
물론 그전에도 소를 길렀으나 1~2마리에 불과했으나 70년대 중반부터는 상업적으로 10여마리를 길렀다.
70년대 중반부터는 논이 남아돌기 시작해서 남의 논도 좀 부쳤다.
80년대 중반이 되지 소작으로 지을 땅이 많아도 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억지로 떠맡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나중에는 소작료도 거의 받지 않았다.
우리집도 내가 도시생활을 하였기에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논을 남에게 맡겼으나
소작료는 거의 받지 않는다.
기껏 쌀 한두가마니 받고 만다.
우리 논에서 나는 소출은 쌀로 따져도 30가마니(80킬로그램기준) 정도일 것이니
돈으로 따지면 720만원에 불과하다. 그러니 농사를 짓고 싶겠나?
소작료는 거의 형식상 받는다고 봐야할 것임.
이것도 억지로 맡겨서 농사를 짓고 있음. 농사짓는 뒷집아저씨는 우리 논을 농사짓기 싫어함.
경지정리 잘된 수리안전답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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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의 가치가 낮아지니 농업에 기반한 신분제도가 무너지는 것이다.
의식도 완전히 무너지려면 제도뿐만 아니라 그 제도를 뒷받침한 토대가 무너져야 한다.
그리고 그 제도속에서 커온 사람들이 죽어야 한다.
여기서 말라리아 퇴치와 관련된 동영상 링크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이 글과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말라리아 퇴치를 퇴치를 위한 확실한 방법은
모기장이나 백신이 아니라 사회 인프라 개선이라는.. 역시 상부구조개념이 중요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