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에 단계는 없다” 지난주 토론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다. 심리학에서 ‘의식의 단계’를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고 한다. 의식에 ‘단계’는 없다. 의식은 깨어있음이다. 인간은 깨어있거나 잠들어있거나 둘 중에 하나다. 단계는 없지만 방향성은 있다.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돈 주울세라 땅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정신차린 사람도 있고, 한눈파는 사람도 있다. 거기에 긴장과 이완의 법칙이 있다. ‘의식의 단계’ 개념은 예로부터 있었다. 선각이니, 후각이 하며 계단을 나누는 명상그룹이 있고, 불교에도 말나식, 아뢰야식 하는 것이 있다. 구조론에도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단계가 있다. 구조론 5단계는 통합되어 에너지 순환 1사이클을 이룬다. 단계가 있지만 한 덩어리로 모듈화 되어 있으므로, 실제의 작동에 있어서는 언제나 1단계로만 나타난다. 단계가 없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한 계단씩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성'으로 바로 간다. 소통과 감응과 증폭과 공명으로 바로 간다. 1단계씩 차례로 부팅하는 것이 아니라 스위치만 켜면 바로 방송이 나와야 한다. 구조의 모듈화로 단계가 없지만, 5단계로 풀이하는 이유는, 불완전하게 다른 것에 빌붙어 있는 것들 때문이다. 사람이 소를 몰고 간다면 소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므로 불완전한 의식이다. 아기가 엄마 등에 업혀 간다면 역시 불완전한 의식이다. 군중심리에 휩쓸려 거름지고 쫓아온 사람, 남의 지시를 받은 노예, 멋 모르고 얼떨결에 따라온 사람, 정신 나간 사람의 의식은 불완전하다. 완전성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존재론으로 보면 오직 질에서 양으로 일방향적인 진행을 할 뿐, 양에서 질로 올라서지 않으므로, 낮은 의식단계에서 높은 의식단계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자연계에서 양질전화는 없다. 닫힌계 안에서 모든 것은 높은데서 낮은데로 일방향적인 진행을 한다. 개가 깨우쳐 사람이 되거나, 혹은 쥐가 깨우쳐서 인간구실을 할 수는 없는 이치와 같다. 개는 깨우쳐봤자 훌륭한 개가 될 뿐이며, 쥐는 깨우쳐봤자 영리한 쥐가 될 뿐이다. 의식이 위로 올라가는 경우는 없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잠들어 있거나 그 잠에서 깨어나거나 뿐이다. 인식론은 다르다.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올라서며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젖히곤 한다. 그것은 학습된 지식이지 각성된 의식이 아니다. 지식은 누군가 뒤에서 코치해줘야 작동한다. ● 존재론 - 독립적인 일의 한 단위다. 작동할 때는 언제나 질에서 양으로만 움직인다. 높은 단계의 긴장에서 낮은 단계의 이완으로 내려간다. ● 인식론 - 지식은 인류의 공동작업이다. 다른 사람의 높은 의식에 빌붙어서 인식의 지평이 상승한다.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올라선다. 엄마의 지시를 따르는 꼬마,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개, 상사의 지시를 받는 부하는 낮은 단계의 의식상태에 머무른. 더 높은 수준의 작업을 지시받을 때, 의식 역시 높은 단계로 올라선다. 점원이 독립하여 사장이 되면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린다. 더 많이 긴장하게 된다. 이는 사회의 집단작업에 해당되므로 독립된 개인의 의식이 아니다. 불완전한 집단의식은 배제해야 한다. 개미의 군집이라면 개미들 각각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각자 맡은 일을 할 뿐이다. 이는 불완전한 의식상태라 하겠다. 침팬지 무리의 리더는 더 높은 수준의 각성생태에 도달해 있다. 서열이 낮은 침팬지에서 왕초로 올라선 침팬지는 높은 의식상태가 된다. 그러나 이는 그룹에서 승계된 것이지 자신이 찾아낸 것은 아니다. 이미 만들어져 있던 높은 의식이 전수된 것이다. 의식에 단계는 없지만 방향성은 있다. 바깥을 바라보고 외부변화에 대응하는 사람이 있고, 안을 바라보고 내부질서를 통제하려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외교를 맡고, 후자는 내치를 한다. 전통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 역할이다. 전자는 긴장하고 후자는 이완한다. 구조론으로 보면 긴장이 먼저고 이완이 나중이다. 긴장은 외부표적을 포착하고 이완은 내부질서를 거기에 연동시킨다. 하나의 일은 먼저 외부에서 표적을 찾고, 다음 내부를 줄세워 표적의 움직임에 연동시키는 형태다. 이에 의식의 방향성이 성립하며 전자는 개인의 독립적 역할, 후자는 집단의 사회적 역할이다. 깨달음은 긴장후 이완으로 넘어간다. 그 사이에 오르가즘이 있다. 쾌감이 있다. 명상은 쾌감을 즐긴다.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실패다. 쾌감을 느끼려면 먼저 고도로 긴장을 끌어올려야 한다. 외부의 표적을 찾는데 긴장이 있다. 긴장없이 곧바로 이완하면 나태해진다. 선가의 평상심이 나태함은 아니다. 몽롱하게 취한 상태나 잠든 상태가 아니다. 이완상태를 명상으로 안다면 잘못이다. 긴장에서 이완으로 넘어가는 것이며 그럴 때 뇌는 쾌감을 느낀다. 드라마의 클라이막스와 같다. 주인공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고도의 긴장상태다. ‘암행어사 출도야’ 하면 편안한 이완이다. 뇌는 긴장해야 하고 몸은 이완해야 한다. 몸이 경직된 것을 긴장으로 여긴다면 잘못이다. 히딩크는 말했다. 한국팀은 정신력이 약하다고. 몸이 경직되었기 때문이다. 몸이 굳어있다면 긴장이 아니다. 참된 긴장은 몸은 풀려있고 마음은 고조된 것이다. 식물이 햇볕을 받듯이, 동물이 먹이를 포착하듯이, 직원이 월급을 받듯이, 외부의 에너지원과 직접 연결되어 충만해 있는 것이 고조되는 것이다. 두려움이 아니라 설레임이다. 두려움은 미처 표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설레임은 표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연동이다. 마음이 포착한 외부표적에 몸이 줄세운 내부를 연동시킨다. 하나의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A 다음에 B, 그 다음은 C, 그 다음은 D로 차례차례 준비되어 있는 것이 연동이다. 연동성이 높을수록 설레인다. 내일 소풍을 간다면 무엇을 해야할지 다 알고 있다. 준비되어 있고 연동되어 있다. 배낭도 챙겨놨고 김밥도 싸놓았다. 날씨만 좋으면 된다. 그러므로 설레인다. 그러나 호랑이가 덤빈다면 그 다음은? 모른다. 연동되지 않는다. 무섭다. 몸이 경직된다. 명상의 요구는 긴장과 이완의 쾌감이며, 그것은 긴장 다음에 이완이며, 구체적으로는 마음이 표적을 확인하여 설레이고, 몸이 연동되어 편안하게 이완된 것이다. 그것이 참다운 깨어있음이다. 이완은 마음이 표적을 찾아서 A가 달성되었을 때 그 다음 단계의 목표 B, C, D, E로 순조롭게 넘어가는 것이다. 갖추어져 있고 준비되어 있으면서 연동되는 것이다. 전부 한 줄에 꿰어져야 한다. ### 명상을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진짜로 명상하는지, 그냥 머리에 힘주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호흡 운운한다면 사기다. 호흡을 멈추면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환각상태에 빠지게 된다. 환각상태를 체험하고 명상을 했노라고 우기면 곤란하다. LSD라고 마약을 사용하는 그룹도 있다. 진짜 명상을 해야 한다. 명상은 쾌감을 수반하는 것이다. 쾌감이 없다면 명상할 이유가 없는 거고. 경험을 말하면 테크닉이 있다. 어떤 제목이든 던져주면 즉시 생각을 만들어올 수 있다. 그 주제로 짧은 글을 쓸 수 있다. 단어 두 개만 주면 즉석에서 '시'를 지어준다는 사람도 있다더라. 길거리에서 즉흥시를 판다는데 그 분도 테크닉이 있을 것이다. 생각은 그냥 머리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공식에 맞추어 풀어내는 것이며 공식이 있어야 한다. 나의 공식은 ‘전제를 찾는 것’이다. 어떤 말이든 동사가 중심이며, 그 전제로 명사가 숨어 있다. 명사와 동사가 붙으면 문장이 되지만, 그 문장에도 전제가 있다. 전제의 전제가 있다. 동사의 전제는 명사, 술어의 전제는 주어다. 주어와 술어가 붙으면 진술이다. 그 전제가 예의 ‘전제’다. 전제와 진술이 붙으면 주장이다. 주장의 전제는 근거다. 근거와 주장이 붙으면 인식론이다. 그 전제는 존재론, 존재론의 전제는 완전성이다. 완전성에 도달하면 낳는다. 낳으며 전개한다. 창조한다. 무에서 유가 생겨난 것이다. 새끼를 치는 것이다. 거기에 힘이 있고 기세가 있다. 에너지가 있다. 에너지원을 찾으면 최종적인 성공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에너지를 찾으면 성공이다. 음악이든 회화든 문학이든 반드시 에너지가 있다. 모든 예술은 바깥에서의 에너지를 유도하는 절차다. 에너지는 근원의 자궁에서 나온다. 최종적인 자궁이 있으며 거기서 낳는다. 낳아서 채워진다. 그렇게 뻗어나간다. 그것이 생명성이다. 완전성에 도달할 때 일의 1 사이클이 끝난다. 이야기는 완결된다. 그럴 때 생각의 부스러기들은 전부 한 줄에 꿰어져 연동된다. 쾌감을 느낀다. 오르가즘을 느낀다. 새벽 1시에 벌떡 일어나 마을을 한 바퀴 돌고와야 할 정도로 몸이 달뜬다. 편안하게 이완된다. 명상은 전제를 찾고, 전제의 전제를 찾고, 그 방법으로 계속 추궁하여 에너지 순환의 1사이클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리하여 쾌감을 얻는 것이다. 부처의 미소는 그 쾌감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긴장을 끌어올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근원적인 모순, 근본적인 질곡을 드러내야 한다. 앞집 강아지가 병아리를 깨물었어도 생각 속에서는 우주가 흔들리는 일대사건으로 비약되어야 한다. ‘강아지를 야단치면 된다. 끝.’ 이렇게 간단히 결론을 내면 도무지 생각을 진행할 수가 없다. 우주 안에서 강자와 약자의 대결이 존재하는 한 그 강아지와 병아리의 충돌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강아지를 야단치면 된다'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되기는 뭐가 되었지?'하고 한번 더 추궁해야 한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므로 강아지가 병아리를 문다.' 한 단계 더 올라선 것이다. 더 높은 무대가 깔린다. 우주 안의 모든 약자가 연대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에 맞서야 한다. 여기서 끝내서 안 된다. 더 나아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약자를 연대하게 할 수 있지? 약자를 연대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지식이라는 에너지, 깨달음이라는 에너지, 함께 하는 기쁨이라는 에너지를 끌어내야 한다. 그 에너지의 순환에서 얻어지는 창조의 기쁨을 모두가 맛보게 해야 약자의 연대는 진정으로 성사된다. 명상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쾌감이 없기 때문이다. 쾌감이 없는 이유는 진척이 없기 때문이다. 진도가 안 나가는 이유는 테크닉을 모르기 때문이다. 약간의 테크닉을 알면 일단 흥미를 가질 것이다. 왜? 좋으니까. 쾌감이 따르니까. 물론 한 두가지 테크닉 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림을 그리더라도 그렇다. 한 두 가지 간단한 테크닉을 가르쳐주면 일단 흥미를 갖고 집중할 것이다. 충분하지 않다. 고도로 긴장을 끌어올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신과 나, 세상과 나, 우주와 나의 근원적인 대립각을 확인해야 한다. 거기서 에너지를 조달받아야 한다. 내가 살아가는 에너지, 내가 생각하는 에너지를. 내 몸을 편안히 이완시켜 마음의 표적에 연동시킬 때 쾌감이 있다. 내 삶의 전부를 자유롭게 하여 내 꿈의 표적에 연동시킬 때 행복하다. 사회의 각자에게 자유를 주어 신의 이상과 연동시킬 때 완전하다. ### ● 의식에 단계는 없다. 깨어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둘 중 하나다. ● 의식의 단계는 없지만 의식의 방향성은 있다. 바깥에서 표적을 확인하려는 긴장의 마음과 이에 내부를 연동시키려는 몸의 이완이 있다. ● 의식의 단계가 없으므로 명상은 완전성으로 바로 간다. 가장 높은 단계인 정상에서 스위치가 켜진다. 스위치가 켜지지 않으면 아래의 단계를 밟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 외부의 표적을 얻는 방법은 진술에서 전제를 찾고, 그 전제의 전제를 찾아 계속 추궁하여 들어가며, 근원의 모순에 이를 때까지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 근원의 모순에 도달할 때 바깥에서 에너지를 조달받아 일의 1사이클을 완성할 수 있다. 그 지점에서 창조는 완성된다. ● 의식은 질에서 양으로 일방향 진행하므로 단계가 없지만, 인식은 구조론의 전개에 따라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단계가 있다. ● 의식은 존재론, 인식은 인식론이다. 존재론은 개인의 의식상태에서 에너지 순환 1 사이클을 완성하는 일의 진행이고, 인식론은 사회적 집단작업에서의 일의 진행이다. ● 존재론에서 의식의 단계는 없지만, 인식론에서는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다섯 단계가 있다. 노예의 마음에서 주인의 마음으로 올라서는 정도에 따른 단계다. 이는 사회적 집단작업에서이며 의식이 아니라 지식의 문제다. ● 지식의 집단작업은 상부구조가 되는 다른 사람의 머리를 빌리므로 마음은 버려두고 몸만 움직여도 되므로 의식이 낮은 단계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리더는 머리를 빌릴 수 없으므로 깨어있어야 한다. ● 사회적 집단작업에서 하급자가 상급자로 올라설 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리지만 이는 깨달음이 아니라 그 이전의 리더에게서 전수받은 것이다. 전두환도 대통령 자리에 앉혀두면 의젓한체 하지만 진짜가 아니다. ∑ |
archaic
magic
mythic(전근대=조갑제,지만원,이문열)=신화적,민족적,국가적,2인칭 관점
rational(근대=공병호, 복거일)=근대적이성, 자본주의,과학적,3인칭
pluralistic(탈근대-박노자, 김규항)=탈근대,사민주의, 4인칭
integral(=노무현, 함석헌,공자)=통합적, 5인칭,역사문명공동체
super-integral(=이외수,천상병,노자) 자연공동체
overmind(aurobindo)=영성
supermind
사람 예들은 제가 든겁니다.
김동렬씨가 말하는 현대성은 integral 단계정도 될겁니다...
joesondo/
예의 여러 단계들은 억지로 지어낸 것이고, 누구라도 왕창 더 지어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대칭논리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그 위의 세계에 대해서
는 그 수준을 소화할 수 있는 언어, 개념, 컨셉, 스타일을 얻어야, 비로소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것이며, 낮은 수준에서는 누구나 다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라면 초딩때부터 저의 수준을 구사했습니다. 단지 어휘력 부족으로 충분하게 사용할 수 없
었을 뿐입니다. 의식이 발달되어 수준이 점점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초딩한데 중딩문제를 내
면 그 능력으로 상황을 소화하지 못할 뿐입니다.
개도 엄마개가 통합적 의식수준으로 수준 낮은 강아지들을 잘 이끌곤 합니다. 지만원 등이 수준
이하의 행동을 하는 것은 그 자들이 낮은 수준의 언어를 가졌으며, 낮은 수준의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낮은 수준의 논리를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이상의 세계도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수준에서 자유롭게 소화하지 못할 뿐입니다.
이문열도 소설을 쓸 때는 치밀하게 고급논리를 구사합니다. 정치이야기 할 때는 바보인척 하고
바보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바보글을 쓰지요.
마찬가지로 독자들 중에 제법 아는 분들도 선생을 시켜놓으면 갑자기 바보가 되고, 정운찬 같은
학자도 강단에서는 수준 높은 행동을 하다가 국회에 갖다 놓으면 갑자기 철부지 어린애가 되고,
문국현도 제 기업에서는 제법 잘합니다.
자기 분야에서는 다들 어른처럼 합니다. 명계남 같은 사람은 자기 사람들과 있을 때는 어른처럼
의젓하지만 국회에 갖다 놓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훈련되지 않았으니까.
오세/
오세님의 '의식의 발달'은 내가 말한 본문에서 인식론적 관점, 사회적인 의식에 해당하오.
인간은 처음부터 세계의식을 가지고 있소. 단지 그 세계가 좁을 뿐이오. 아기에겐 엄마와
나의 세계가 세계의 전부이오. 그 바깥의 세계는 없소.
내 자서전에도 나오지만 내가 처음 골목어귀까지 갔을 때(집에서 약 100미터) 모퉁이를 처
음 돌아보고 느낀 세계가 당시의 내 세계의 전부였소. 다시 말해서 그 능력을 의식적으로 사
용하지 않을 뿐 처음부터 갖추어 있소. 없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어른이 세계를 느끼거나 꼬마가 식구들 눈치를 보거나 같소. 의식의 발달은 한 계단씩 올라
가는 것이 아니라 풍선을 부풀리듯이 부풀리는 것이오. 부채를 펴듯이 펼쳐내는 것이오. 기
본적으로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분하지 않으면 계속 혼란스러울 것이오.
깨닫는다는 것은 좁게 사용하던 것을 넓게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오. 한 개인의 마음 안에 나
사회 민족 국가 세계 다 있소. 단 세계를 논하려면 세계를 소화하는 언어와 컨셉과 스타일을
얻어야 하고 그것을 얻으려면 공부를 해야 하오.
지만원 등은 더 높은 세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소화하는 언어 논리 개념 컨셉
스타일이 없기 때문에 회피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쓰는 내용들을 30년 전에도 느꼈지만
그때는 지금 사용하는 단어가 제게 없었을 뿐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세계의식을 가지고 있소. 단지 그 세계가 좁을 뿐이오"
"의식의 발달은 한 계단씩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풍선을 부풀리듯이 부풀리는 것이오. 부채를 펴듯이 펼쳐내는 것이오"
"다시 말해서 그 능력을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뿐 처음부터 갖추어 있소. 없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이제 심리학에 '단계'론이 아니라 '풍선'론이 등장할 때가 되었나 보오.
동렬님의 풍선론은 완전히 패러다임의 전환이오.
피아제의 인지발달론 이후 의식 발달의 과정에 대한 연구의 대부분이 단계론을 취하였소. 그러나 이는 처음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접혀 있는 것이라는, 아직 방향성이 제대로 부여되지 않은 것일 뿐이라는 동렬님의 탁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소.
와우, 덕분에 박사 논문 주제 하나 건졌소.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 고맙소.
아실까 모르겠소. 동렬님이 위에서 언급한 것아 그야말로 심리학계에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임을 말이오.
거참, 구조론이 학문의 자궁이라더니, 이거 옥동자를 임신한 기분이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즐겨 쓰는 '논리의 연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미디언이 즐겨 쓰는 우스개 방식을 가지고 있듯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툴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요.
학자들이 말하는 의식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그 논리의 수준을 말합니
다. 그 이상의 수준에 도달못한 것이 아니라 그 수준을 소화할 연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도 표현못하는 겁니다.
그 이상의 높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대략 알지만, 익숙하지 않기 때문
에, 잘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익숙한 연장을 쓰는 것입니다. 사무라이
가 총의 시대가 되었어도 칼을 손에서 놓지 않듯이.
제가 다른 점은 어휘력이 발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높은 수준의
논리를 소화하는 연장을 만들었습니다. 그 논리를 모르는 사람은 그것
을 '직관'이라고 말하지요.
셈을 모르는 이누이트들은 백인이 셈을 해서 수를 알아맞히면 직관이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연장을 사용하는 언어를 만드는게 중요합니다.
'완전성' 이런 표현은 예전에 없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그 수준의 사고를 하지 않습니다. 칸트가
없었다면 이성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지 않았을테고, 플라톤이 없었
다면 '이데아'가 없을테고 그만큼 수준이 내려갑니다.
위대한 사상가들은 대부분 '단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인디언 추장들은
단어가 없기 때문에 대신 풍부한 비유법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용기가
있다면 최고의 세계로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언어가 없어서 못 가는데 한 사람이 그 세계를 소화하는 언어를 보급하
면 누구나 다 그 세계에 도달합니다.
사회 민족 국가 세계 다 있다는 것이긴 하나,
"깨닫는다는 것은 좁게 사용하던 것을 넓게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오"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진 못한듯 하오.
"지만원 등은 더 높은 세계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소화하는 언어 논리 개념 컨셉
스타일이 없기 때문에 회피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쓰는 내용들을 30년 전에도 느꼈지만
그때는 지금 사용하는 단어가 제게 없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발달은, 단계로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갖춰져 있던 완전성을 펼칠 툴, 도구를 꺼내어 쓰게 되는 것이구료. 그 도구의 수준을 나, 사회, 민족, 국가, 세계를 다룰 수 있을 만큼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 인식론, 교육의 관점이자 목표가 될 것이고.
암튼, 한 가지는 확연해 졌소. 기본적으로 서양 아해들의 심리학에는 이 초기에 세팅된 완전성이라는 개념이 빠져 있소. 그들은 항상 무언가 단계를 밟아서 한 계단씩 위로 상승해야만 하오. 그들은 아이들의 인지적 한계를 발달 단계를 아직 밟아 나가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소. 그러나 구조론은 그것을 한계가 아니라 아이 수준에서의 하나의 완성으로 보는구려. 아이의 자기중심성은, 자기라는 세계 안에서 일관된 논리를 구사하는 하나의 작은 완결성이 될 것이겠고, 그 완결성을 더 넓은 범위로 확장시키는 것, 사회, 민족, 국가, 세계로 나아가게끔 하는 것이 발달이 되겠구려. 그것은 계단을 밟듯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한 번 완성시킨 것을 더 크고 더 넓게, 더 깊게 확장시키는 수평적인 차원의 것이 될지니.
"깨닫는다는 것은 좁게 사용하던 것을 넓게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오"
이 말, 앞으로 두고두고 써먹겠소. 조문도석가사의라더니, 흥분해서 오늘 도배좀 했소. 양해 바라오
맞소.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가 있는데
그런 아이들은 처음부터 연역을 할줄 알기 때문에 열을 아는 것이오.
그런 연역을 한 번이라도 해본 아이들은 더 익숙하게 잘하오.
그건 재미들려서 그런 것이오.
화가들은 그릴 때만 그 연역을 잘하고, 깡패들은 싸울때만 그 연역을 잘하오.
학자들이 몇살이 되어야 의식수준이 올라가서 연역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선생들이 내는 시험문제를 연역하여 푼다는 뜻에 지나지 않소.
나는 연역을 잘했기 때문에 공식을 암기하지 않고도 산수문제를 다 풀어서
그 때문에 산수실력이 갈수록 나빠졌소.
그런 편법으로는 쉬운 문제만 잘 풀어내니까.
미학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는 미학이 더 높은 세계에 대한 감을 키우기에 좋기 때문이오.
뭐 좀 어색하고, 답답한게 있으면 아 '이건 아니다' 하고 더 높은 세계를 욕심내야 하오.
이발소 그림을 보면 답답한걸 느껴야 하오.
더 높은 세계에 대한 독자들의 감각은 미학적 감수성으로 획득되고
더 높은 세계에 대한 선생들의 논리는 예의 '연장'으로 획득되는데
논리는 대칭성에 기반하므로 대칭원리를 사다리 삼아 높은 세계는 쉽게 올라갈 수 있소.
이창호라면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하고' 장이야 하면 네가 그럴줄 알고 멍이야.
장군과 멍군을 통합하는 전체를 장으로 치고 더 높은 멍이야 이런 식으로 계속 가면
정치도 경제도 학문도 다 그 안에 있고
알고보면 일곱살 때 소꿉놀이 하면서 코찔찔이와 다투던 그 장면 안에 다 있음을 알게 되오.
윤회와 영혼의 성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윤회는
사전적으로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 '허어'입니다.
감정적 의미 밖에 없습니다.
의미가 있다면 느낌이 의미라는 거지요.
내가 죽어서 남이 되어서 태어나는 것과
내가 죽고 그냥 세상 어딘가에서 남들이 나와 무관하게 무수히 태어나는 것과
내가 죽지도 않은 지금 현재 어딘가에서 남들이 무수히 태어나고 있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내가 죽어서 무엇이 되어 태어난들 그것이 나와 연결될 이치는 전혀 없습니다.
내가 죽어서 제왕으로 다시 태어났다 해도 현세의 나와 내세의 제왕이 된 나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논리로 봐도, 의미로 봐도, 가치로 봐도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제로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전생에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었다고 말해도
그것이 실제로 사실이다는 것과 그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차피 아무런 차이가 없으므로 만약 죽음이 두렵다면
내가 죽어서 신(이왕이면 높은 계급)으로 태어난다고 생각해도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나 저러나 간에 무방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냉철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를 순수하게 받아들일수 있다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죽는 것과 내가 영원히 사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으므로 죽음이 두려울 수가 없지요.
훈련하면 내가 아닌 누구라도 이 우주 안에 한명 이상 존재하는 한 내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영원불멸하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그 대신에 모든 존재는 카르마의 끈으로 인해 생멸을 거듭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한 번 살면 그걸로 끝이고 그 앞에는 내세가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설명하는데
저는 내세를 믿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재생하면서
성장의 사이클을 거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면 동렬님은 인간 개개인의 존재는
단 한 번의 생만을 거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우리 모두는 더 큰 존재에 필연적으로
한 몸으로 묶여있다는 사실을 배제하고서라도 인간 하나하나는 일회성의 존재인가요~?
그리고 카르마에 대해서 의견을 좀 듣고 싶습니다...
카르마는 없습니다.
개개인이라는 개념은 역시 개개인 기준으로만 성립되는 개념입니다.
왜 개개인 기준으로 보지요?
누구 맘대로?
이런 말은 제가 어떻게 풀어서 설명해도 결국 오해하고 말 거라는 느낌인데
한 번의 생과 두 번의 생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1회성의 존재라는 개념도
아마 탄생에서 죽음까지를 1회로 잡을텐데
그것이 1회라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매 순간의 완전성이 존재할 뿐입니다.
완전성이 없다면 천년을 살아도 1회도 아닌 무회일 것입니다.
완전성에 도달한다면 1초를 살아도 1억년을 산 이상으로 통쾌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짜릿한 1초를 명박의 지루한 백억년과 바꾸지 않습니다.
어제의 나는 어제버전이고 오늘의 나는 오늘버전이고 다른 겁니다.
카르마가 있다면
카르마의 정산은 0.01초 단위입니까 아니면
1초 단위입니까 아니면 하루 단위, 일년 단위, 평생단위, 우주단위, 백억년 단위겠습니까?
연말정산인지 일당제인지 주급제인지 월급제인지 평생급제인지 우주급제인지.
공감하는 바입니다.
흔히 윤회나 환생에 대해 얘기하면 사람들은
그런것은 죽음이 두려운 사람들이 공포를 덜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라고
폄하하는 태도를 보이는데요.. (특히 논리적으로 발달된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제가 죽음이 두려워서, 또는 내세가 궁금해서 윤회에 관해 질문했던 것은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봤을 때 내가 죽은 다음에 나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끊임없는 영혼의 성장의 수단으로서의
윤회의 메카니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가 시작과 끝이 없듯
우주 안에서의 개개인의 삶도 일회성이 아니라는 거죠.
인간은 원래 영원불멸하는 존재니까요.
영혼을 시간적으로 성장하는 존재로 볼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폭넓게 소통하는 의미로 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한 번 연설로 백만명의 마음을 단번에 움직이는 폭넓은 소통과
한명씩 백만명을 만나서 백만번 같은 이야기를 지루하게 반복하는 것과 어느게 나을까요?
백만명과 한꺼번에 소통하는 것이 백만번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백만회 반복하는 지루한 리바이벌보다 낫지 않을까요?
공간속에서 공명하고 증폭하여 전파되는 것이 영혼의 성장이 아닐까요?
그렇게 지금 이 순간만을 강조한다면 수십 수천억년에 이르는 우주의 진화과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시간의 개념이라는게 허구이고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는 '원론적인' 개념은 저도 이해하지만
동렬님은 너무 극단적으로 존재의 일원성과 현존만을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역사 전공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저는 방향성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딘가에서 와서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거죠. 지금 제가 동렬님과 댓글로 대화하고 있는 이 순간도 성장의 과정입니다.
개별성을 인정 안한다고 하셨는데 모든 것이 하나라면 우리 개개인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죠~? 그냥 한 통으로 보면 다 나인데.
개별성과 일원성을 동시에 인정해야 합니다.
개개인의 경험 모두 소중한 것입니다. 존재 하나하나의 경험이 모여 더 큰 궁극적인 존재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카르마에 정산이 필요하다고 누가 그랬나요~?
카르마는 한 번에 몰아서 정산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더하기 빼기를 통해 자동적으로 보완이 이루어질 뿐.
모든 것은 연속됩니다. 단절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단칼에 끝내기 원하시는 동렬님의 간절한 염원과는 반대로 이 과정은 계속적으로 반복됩니다.
김동렬씨는 개인중심이 아니라 공동체 중심으로 생각하는것 같습니다.
marx-사회 시스템이 개인의 의식을 만든다(사회 시스템 위주)
김동렬,하버마스-사회적관계,소통,도구등이 개인을 만든다(소통, 인간관계 위주)
켄 윌버,불교 -개인이 개인,공동체를 만든다.(개인의 내면 위주)
대명사 i,we, it,its 중에 marx는 its(사회적 시스템) 중심으로, 김동렬씨는 we(소통,공동체)와 it(도구, 언어)
위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의식수준은 I 중심으로 생각하는거구요.
소통방식(미학,스타일), 언어, 사회 시스템 따위가 개인의 의식을 높이는 경우도 있지만(일반 대중들), 맨 처음에는 특정 뛰어난
개인의 내면적
의식이 올라가야 특정 소통방식, 언어 등을 만들수 있는겁니다. 순수 이성비판, 이데아 라는 툴이 칸트, 플라톤을
이성적인 인간으로 만든게 아니라, 칸트가 이성적인 인간이였기 떄문에 순수이성비판, 이데아를 만든거죠..
그리고 그런 툴이 있어도 이해 못하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성적인 사고를 하려면, 뇌의 어떤
특정부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뇌의 그특정부위가 마비된 사람에게 백날 도구, 소통방식을 들이밀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한글, 구조론 이란 툴등을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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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나 힌두교에서 인간에게 3개의 몸/정신이 있다고 합니다.
gross body(현재 우리몸)
subtle body(=기,말라야식) 실제로 기공이나 단전호흡좀 하면 누구나 느낄수 있습니다.
causal body(=아뢰야식)
gross body는 죽어서 없어지고, subtle/causal body가 윤회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gross body의 외모, 성격,직업 따위가 윤회 하는게 아니라
subtle/causal body에 저장되어있는 지혜의 발달정도, 덕의 발달정도에 따라
알맞은 몸으로 환생한다고 합니다.
다시 태어난다해도 지금의 나와 후생의 내가 전혀 상관 없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개인의 의식이 자신의 말라야식, 아뢰야식을 인식하는 수준까지 올라가지 못해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으로 자신의gross body(몸, 성격, 지위 등등) 밖에 인식 못하기 때문이죠.
사고의 수준이란것이 별것아니고, 몇인칭 관점에서 생각할수 있느냐입니다.
인식할수 있는 관점이
1인칭-2인칭-3인칭-4인칭-5인칭으로 늘어나는것입니다.
예를 들어초등학교도 안나왔거나, 어렸을때 머리가 굳어버린사람, 장애인 들은 1인칭 관점에서 밖에 생각을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한테 과학책 들이밀어 봤자, 이해 못합니다. 왜냐하면, 간단한 과학을 이해하려면 3인칭 관점에서
생각 하는게 개인적으로 가능해야 하기 떄문입니다.
포스트 모던 철학, 상대성 이론 등을 이해하는데는 4인칭 관점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해야 이해할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헤겔,화이트헤드 철학, 음양오행, 구조론, integral theory를 이해하려면 5인칭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해야합니다.
3인칭 관점에서밖에 생각못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구조론 책 갔다줘도 그사람 이해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연장/논리적 툴"이 있어도 내면적으로 사고 할수 있는 능력이 발달 안한 상태에선, 그 도구는 아무소용 없습니다.
여기서 또 말해야 될것은, 사고/인식적 수준과 감성/도덕적 수준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문열은 사고/인식적으로는 5인칭 관점에서 생각하는게 가능합니다. 구조론 읽으면 대충 이해할겁니다.
그의 도덕성/감성수준이 수구 꼴통인거죠.
여기서 도덕성/감성적 수준이란 같이 느끼고, 공감하고, 관계할수 있는 인간/생명의 범위를 말합니다.
그 범위가 가족에서 멈춰 버린 사람이 있고,
나-->가족-->부족-->국가-->세계-->자연-->우주 까지 확장된 사람이 있고요.
예를들어 살인자, 범죄자는 나의 고통 밖에 느끼지 못합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고통을 느껴도 아무것도 공감하지 못합니다.
이문열은 그 공감할수 있는 범위가 그 살인자 보다 더 확장되서, 국가 까지 확장된사람이고 .김규항은 세계 까지 확장된 사람이고,
천상병은 자연/ecology 까지 확장된 사람입니다.오로빈도는 우주까지 확장된 사람이고요.
예를들어)김규항박노자는 고생하는 노동자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지만, 이문열/조갑제는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진중권 은 티벳 사태에 스트레스를 받지만, 민족주의 적인 어떤 일반인에겐 그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노무현은 소외감느끼는 대중들과 공감하지만, 진중권은 잘 공감하지 못합니다.
천상병에게 꽃은 같이 교감할수 있는 친구이지만, 복거일에겐 예쁜 객체일뿐입니다. 등등등
사고를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할 이유가 없으니까.
무엇보다 돈이 안되니까.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서 꽃을 생각하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꽃을 생각하지요.
명상가는 구라를 치기 위해서 우주를 언급하는 것이고
소년은 무엇이든 다 생각하지요.
왜냐하면 미래가 있으니까.
보수노인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지요.
왜냐하면 미래가 없으니까.
나치 학살범들은 평범한 이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인 거의 전부가 학살에 직간접으로 가담했으니까.
그들은 고통을 못 느낀 것이 아니라 안느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밀그램의 전기고문 실험에서
0.1프로의 극소수 사이코패스만이 450볼트 스위치를 누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실험에 들어가자
60프로의 평범한 사람들이 서슴없이 450볼트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의 60프로도 그 스위치를 누를 수 있는 잔인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30년대 독일에서 났으면 서슴없이 독가스를 주입하였을테고
일본에서 났으면 서슴없이 군도를 휘둘렀겠지요.
조금의 가책도 없이.
남의 고통을 못 느껴서?
아니지요.
잔인한 사디스트들 중에는 오히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자가 많습니다.
대중의 고통을 잘 이해하는 밑바닥 출신 정치인 중에서
대중을 억압한 독재자가 많습니다.
톨스토이의 표현을 빌리면
귀족출신 중에서 농노를 학대한 사람은 드물지만
농노 출신 중에서 어쩌다 귀족의 마름이 된 자들이나
어쩌다 신분상승하여 세리가 된 자들이 가장 악랄하게
농노의 껍질을 벗기려 들었습니다.
못 느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잘 느껴서지요.
가장 무지한 자의 표를 받은 삽질부대 출신 자수성가형 이명박이 오히려
자신에게 표를 준 사람들을 가장 잔인하게 짓밟습니다.
거지의 마음을 잘 아는 거지출신이 출세하면 가장 잔인하게 거지들을 짓밟습니다.
푸른호수, 생글방글/
불교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낫겠고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길바닥에 널린 돌맹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나라면 서슴없이 다이아몬드를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더 아름답고 가치있으니까.
세상에 가치있는 것은 하나 뿐입니다.
왜냐하면 둘이면 이미 가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원하든 좋으나 가장 나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가장 나은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라는 집착을 떠나 '우리모두'의 마음을 합치고서야 발견될 것입니다.
답글 쓰신걸 이제야 봤네요...
왜 못 봤을까..? 매일 들어오는데...
어쨌든 동렬님이 지금 하신 말씀이 제가 늘 하던 말 (여기서는 안 했죠)과
비슷해서 한마디 다시 씁니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의 기로에서 보다 가치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라는 점.. 공감합니다.
다이아몬드를 놔두고 돌멩이를 선택할 사람은 그만한 안목이 부족하거나
욕심으로 눈앞이 가리워져 있거나 둘 중에 하나겠죠.
또한 우리모두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 '우리모두'를 인식하자는 주장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동렬님은 지나치게 '우리모두'에 집착하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나'와 '우리모두'가 병립 불가능한 개념입니까~?
'나'의 개별적 카르마를 주장하면 자아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힌 불쌍한 영혼입니까~~?
'나'의 개개인의 영혼의 여행이 그렇게 하찮다면 개별 카르마는 없고 집단 카르마만 있는
개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불교 얘기는 그만하자고 하시니 그리하겠습니다마는
지금 이순간 깨달음의 소중함을 아는 영혼이 지구상에 몇 퍼센트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각각의 개별적인 행로를 통해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동렬님의 모습은 부진한 학생들에게 "너넨 왜 준비 안된거야~? 이 답답한 것 들아" 하고
질책하는 선생의 그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동렬님 말씀대로 모든 인류가
깨달음에 근접하려면(구조론을 이해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휴~ 같은 얘기를 두고 왜 이렇게 다른 해석이 나와야하는지 모르겠네요.
아마도 제가 표현력이 부족해서 그런 듯 합니다. 동렬님과 제 생각 사이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이곳에 자주 오는 것이구요)
분명히 있습니다. 깨달은 존재들은 아직 깨닫지 못한 존재들과 보조를 좀
맞춰줄 필요가 있는 듯... 이명박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 된다는 말씀은
동의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의미있는 규모로 깨달음의 수준에 이르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듯...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괴로움은 학습을 촉진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므로 지금 추세로 보면 예상보다 상당히 빨리 이루어질 수도
있을 듯... -_-;;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이명박은 우리의 은인일수도.. -_-;;;;;;
대략 좌절이오. 그러나 좌절감을 딛고 다시 써 보자면,
-인간 의식을 시간축 상에서 관찰할 때, 여러가지 발달 노선이 보이며(인지, 정서, 도덕, 예술, 영성, 등등)
-이러한 발달 노선들은 '단계level or stage'처럼 보이는 일종의 분절된 질적 특성을 드러내며, 이는 유아-청소년-성인에 이르는 발달과정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관찰되오.
-예를 들어 인지발달의 경우, 아이는 구체적 조작기 이전인 6세 정도까진 좀처럼 '타인의 관점'을 취하지 못하는 자기중심성을 보이며, 이는 구체적 조작기에 이르러 이전의 '연습'이 아니라 어느날 그냥, 느닷없이 인지적으로 타인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 가능해지오. 쉽게 설명하자면, 한 쪽 면에 코끼리 반대 면에 기린이 그려진 한 장의 카드를 전조작기(3~6세)에 해당하는 아이에게 보여주고 난 뒤, 아이에게 코끼리 그림을 보여주면서 지금 실험자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물으면(물론, 실험자는 그 반대면인 기린을 보고 있소), 아이는 십중팔구, 자신이 보고 있는 코끼리를 그 실험자도 보고 있다고 대답하오. 이처럼 '이 시기'의 아이는 타인의 관점을 취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며, 이는 인지적 기능이 한 단계 도약하는 시점인 구체적 조작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하게 되는 것이오.
-아이들이 각 단계에 해당하는 인지적 기능을 획득하는 과정은 '교육'에 의한 것이라기 보단, 어느 날부터 '그냥' 되기 시작하는 특징을 보이며 인지 발달 단계의 하위 단계에선 아무리 아이를 다그치고 긴장시키고 별 짓을 다 해봐도 아이는 그 보다 상위 단계에서 요구되는 인지적 과제를 좀처럼 수행하질 못하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에게 이러한 인지 발달 과정을 빨리 밟게 하겠다고 생쇼를 해도 아이가 특출난 영재가 아닌이상 대부분의 아이들은 각 발달단계에 따른 평균연령을 그대로 따라가는 경향이 있소(물론, 이는 평균치이며, 최근엔 전반적으로 평균치가 하락한, 즉 아이들이 조기에 발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소. 그러나 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한 이는 아직 없는 듯 하오),
-이와 같은 발달 단계는 인지발달 뿐 아니라, 도덕, 정서 등의 발달 라인에서도 두드러지며,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오
1. 상위 단계는 하위 단계를 포함하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즉, 인지 발달 단계에서 상위로 올라갈 수록 아이는 하위 단계의 능력을 고스란히 지니면서도 하위 단계의 한계는 극복하는 모습을 보이오. 즉,
2. 상위 단계로 갈수록 '자기중심성'을 탈피하며, 보다 넓은 관점을 취할 수 있게 되어. 이를 심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오
자아중심적egocentric-민족중심적ethnocentric-세계중심적worldcentric
3. 기본적으로 사춘기, 인지발달 상으로 형식반성심의 단계에 도달하면 추상적, 가설추리적, 연역적 사고가 가능해지고 성인이 되면 이것이 완전히 능숙해 지게 되오. 이 형식반성심의 단계에서 인간의 관점을 취하는 능력은 '세계'로 확장되며 특별히 지능이 떨어지거나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이 기본적인 능력은 죽을 때까지 유지되오.
4. 의식 발달 과정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관점'을 취하는 능력의 향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거기에는 점점 더 넓고 깊어진다는 방향성이 존재하오. 종국에 그 관점 취하기가 신,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오.
나는 인간은 신의 눈, 완전성의 관점을 획득할 수 있으며, 따라서 구원, 깨달음, 해방 등이 가능하다고 보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을 획득할 수 있는 기본 능력은 인간이면 누구나 발달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며, 이를 동렬님처럼 극한으로 갈고 닦을 것인가, 극한으로 밀어 붙여 결국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는 각자의 자각과 선택에 달려있다고 보고 있소.
암튼, 의식의 발달 과정을 보면, 어느 시점에선 아무리 자리를 깔아주고, 긴장감을 불어넣고, 등등을 해도 도무지 안 되는 일도 있으며, 이는 발달 과정을 제대로 밟을 경우 대부분 극복이 되오. 이 발달 과정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 의식에 접힌채로 펼쳐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으며 그 펼쳐진 모습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타나는 질적인 전환으로 나타나오. 그런 점에서 이미 접혀진 채로 있었으니 동렬님 말처럼 분명 양질전환은 아니오. 이미 접힌 채로, 정보의 형태로 인간 의식에 내장되어 있으니 말이오. 그렇지만 그것이 펼쳐지고, 펼쳐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는 가는 분명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이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궁극적으로 문명의 형태에 달려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