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깨닫는 것이 깨달음이다. 관계는 변한다. 변화에는 일정한 방향성이 있다. 그것은 진보다. 곧 관계의 질적인 고도화다. 결론은 낳음이다. 관계가 질적인 고도화를 거쳐 낳음에 이르는 것이 진보다. 깨달음의 목적은 낳음에 있다. 관계는 진보하여 또다른 관계를 낳는다. 관계가 관계를 낳아 생육하고 번성한다. 관계의 나무 자란다. 커다란 관계의 숲을 만들고 관계의 산을 이루어 천하를 가득 채운다. 깨달음은 첫째 관계를 깨달음이며, 둘째 진화하는 관계망 안에서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와 있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현위치와 방향성을 깨닫는 것이다. 세계 앞에서 자신의 포지션과 역할 깨닫기다. 셋째 깨달음은 낳음으로써 실천하기다. 낳음이 진정한 것이며 깨달음은 낳음의 전제조건에 불과하다. 낳지 못하는 관계는 죽은 것이다. 관계는 살아있어야 한다. 낳고 또 낳아서 망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있는 관계의 나무 함께 키워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관계의 중심, 세계의 중심과 연결되는 것이다. 소통하는 것이다. 관계는 바깥 세계와 소통하는 채널이다.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 채널이 있다. ● 혈연관계 - 세계와 나 사이에서 독립적이면서 계승되는 계통관계. ● 부자관계 - 하나가 주도하고 다른 하나가 종속되는 주종관계. ● 부부관계 - 두 파트너의 대등하면서 의존적인 보완관계. ● 형제관계 - 어떤 일의 시간적 진행에 따른 동료관계. ● 남남관계 - 상점 판매인과 손님의 일시적 관계. 혈연≫부자≫부부≫형제≫남남라는 이름은 사람의 친족관계에 대입한 것이며 자연에서는 ‘일’에 의해 일어난다. 어떤 일을 하든 일의 처음 착수단계에서 혈연(리니지)관계에 해당하는 계통관계가 성립한다. 반드시 족보가 있다. 자동차가 있다면 그 이전에 먼저 마차가 있었다. 운전수가 있다면 그 이전에 마부가 있었다. 일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면 주종관계가 성립한다. 말은 마부에 종속되고 자동차는 운전수에 종속된다. 선수는 구단에 종속되고 학생은 학교에 종속된다. 관계의 발전은 그 종속관계에서 벗어나는 형태로 진행된다. 평등해져야 한다. 그러나 단지 평등만을 추구한다면 서로 코드가 맞지 않아 관계는 끊어진다. 부부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의존적 평등이다. 관계는 그 의존에서 벗어난 형제관계를 거쳐 남남관계에서 해체된다. 관계의 밀도가 엷어져서 마침내 소멸한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탄생시킨다. 관계는 둘이 하나가 됨으로써 둘 이상의 가치를 달성하는 것이다. 이때 남는 1의 잉여를 활용하여 또다른 관계를 만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포지션 이동이 일어난다. 처음 일시적으로는 종속된다. 하나가 다른 하나 밑으로 숙이고 들어가서 일을 배우고 코드를 맞춘다. 거기에 머물로 있다면 발전은 없다. 코드를 맞춘 다음에는 다시 독립하여 최대한 간격을 벌려야 한다. 어떤 사람이 처음 낯선 그룹에 들어가면 혈연관계다. 이때 서로의 포지션은 명확하지 않다. 과연 자신이 그룹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는지 불분명하다. 자신에게 일거리를 주는 사람도 없다. 한 동안 그룹 안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겉돌게 된다. 신고식이라든가 혹은 텃세라든가 따위의 마찰을 겪으며 관계는 발전한다. 차츰 식구로 받아들여진다. 그룹 안에서 자리를 잡는다. 부자관계로 발전한다. 그룹생활에 익숙해지면 지위가 격상된다. 평등한 부부관계가 된다.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일방적으로 명령하거나 지배하지 않는 관계가 된다. 더 나아가 그룹에 의존하지 않아도 좋은 자유로운 관계가 된다. 형제관계는 포지션을 바꿀 수 있다. 반면 부자관계는 포지션이 고정되어 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역전될 수 없다. 부단한 포지션 변경을 추구하는 것이 진보다. 관계 재정립을 두려워 하는 것이 보수다. 관계는 ‘혈연≫부자≫부부≫형제≫남남’으로 발전하며 에너지 순환의 1 사이클을 완성하고 거기서 잉여를 얻어 새로운 관계를 탄생시킨다. 그러면서 더 높은 세계와의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간다. 한국인들이 애국을 강조하고 민족을 강조한다는 것은 한국에서 개인과 국가의 관계가 부자관계 단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여전히 미성숙하다. 국가와의 관계에 집착할수록 세계와의 더 높은 관계는 멀어진다. 깨달음의 문제는 인간의 인식이 관계의 일 사이클을 되짚는데 있다. 인간이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면 새로운 관계 탄생이다. 기존의 관계는 청산된다. 이때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기존의 관계를 파악한다. ‘혈연≫부자≫부부≫형제≫남남’으로 전개되는 부모와 자신의 1 사이클 전개가 끝나고 다음 자식과의 제 2사이클 전개에 와서 그제서야 그동안 진행되었던 부모와 자신의 관계를 이해한다. 아버지가 되어봐야 가족의 의미를 안다. 이러한 모순 때문에 깨달음이 필요하다.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내 안에서 낳아내는 창조적 과정을 경험해야 진정한 자기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낳지 못하는 깨달음은 죽은 깨달음이다. 한국인들은 여전히 국가와 자신의 부자관계에 집착할 뿐, 세계와 나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서는 모른다. 내 안에서 낳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사에 기여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 한국인들은 아버지가 되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외국인의 몇 마디 말에 과민반응한다. 두려워하며 지나치게 겸손을 떨고 격식을 차린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발작적인 공격행동을 한다. 왜? 어색하기 때문이다? 왜 어색할까? 안해본 짓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다운 어리광이다. 자연스러워지기 위해서는 레벨을 높여야 한다. 비교하려거든 한국의 최고와 그 나라의 최고를 비교해야 한다. 비교해도 일본인 중에서 하필 덜 떨어진 일본인과 비교하거나 중국인 중에서 가장 모자란 중국인과 비교한다면 이상하다. 어느 세계든 극은 단순하다. 최고는 심플하다. 최고레벨의 세계에서는 예의도 필요없고 격식도 필요없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음악가와 최고의 미술가라면 서로의 작품에서 금방 빼먹을 아이디어를 찾아낸다. 1초만에 해먹을만한 아이디어를 챙겨가므로 도무지 예의니 격식이니 불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도 서로에게 동시에 이익이 되는 최적의 조합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짜증나는 포지션 다툼이 필요하지 않다. 왜 깨달음이 필요한가? 관계 안에서는 관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관계 속에 있었지만, 내 안에서 낳아 새로이 창의하고서야 진정으로 이해한다. 관계 안에서 내가 할 일을 안다. 삶은 관계맺기다. 세상과의 더 높은 레벨에서의 관계맺기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부단히 진보하는 세상의 중심과 밀접하게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천하여 나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관계를 창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승은 머물러 관계를 깨닫고, 대승은 나아가며 실천하여 관계를 낳는다. 점오점수는 책상머리에서 관계를 궁리하는 것이고, 돈오돈수는 포지션 구조 안에서 저절로 관계가 명확해지는 것이다. 창의를 실천해야 포지션이 드러난다. 인연은 필연의 구조 안에서 조직된 우연이다. 너와 나의 만남 자체는 우연이다. 너 아니라도 누군가를 만났을 것이다. 문제는 일이다. 만나서 함께 창의적인 일을 진행시킬 수 있는 포지션 조합은 지극히 제한된다. 일은 세계사 단위로 성립하는 바 진보하는 관계망 안에서 일이다. 너와 나의 만남은 우연이지만, 그 만남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만남, 서로 의존하는 만남, 함께 창의하여 잉여를 창출하는 만남, 포지션을 공유하는 만남이어서 인연이다. 인연을 깨닫는 것이 깨닫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