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 2 - 어제 날자 동영상 해설, 아래 글과 이어집니다.- ‘왜 사는가?’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아주 어렸을 때(열살 이전의 어느 때) 확정해 놓고 있었다. 사실이지 이런건 그냥 1초 만에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정답은 사전에 기계적으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진실로 말하건대 그건 내가 임의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원래부터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며, 또한 깨닫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답은 당신이 원하는 답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건조하게 메커니즘으로, 수학공식으로 가야 진짜다. 낭만적으로, 문학적으로 가면 시인이 만족하고 수필가는 점수 주겠지만 구라다. 패턴분석으로 접근하기다. 철학 역시 과학이어야 한다.(초등학생 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초등학생도 판단할 수 있는 길로 가야 바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 비행기는 난다. 왜 나는가? 그것이 비행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사는가? 그게 ‘인간의 삶’이니까 사는 거다. 왜 고추는 매운가? 캡사이신 성분 때문이다. 캡사이신이 무엇인가? 매운 거다. 그렇다면 ‘고추가 매운 이유는 매운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사는 이유는 그 인간존재 안에 삶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역시 질문과 답변 사이의 정형적인 패턴에 주목하기다. 왜 매운가? 매운 것이 고추 내부에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패턴분석의 논리로 타인을 설득할 수는 없다. 생각을 모으고 모아서 17살 때 오도송을 지었다. 말하자면 타인의 논리를 격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타인들은 이 물음에 대해 어떤 논리를 가지고 있는가? ● 종교가의 답 - 천국 가기 위해 산다. 이건 답이 될 수 없다. 왜? 천국에 가서도 여전히 살기는 살아야 할 것인데, 거기서도 ‘왜 사는가’의 문제와 맞닥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건 답을 낸 것이 아니라 일시 유보한 것에 불과하다. 눈가림 속임수다. ● 쾌락론의 답 - 행복하기 위해 산다.(만족하기 위해, 혹은 성공하기 위해) 에피쿠로스들의 관점은 유전인자설 혹은 내부요인설이라 볼 수 있다. 행복감은 뇌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전기신호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존재의 삶’에 대한 답이 아니다. 벌레나 짐승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진화설의 연장에 불과하다. ‘왜 사는가’ 하는 물음에서 ‘살다’는 개념은 인간 고유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적 삶으로서의 ‘생활’을 의미한다. 개미나 짐승 따위에게 ‘생활’은 없다. 그것들은 사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살아지는, 살아있는 것이다. 벌레들은 자신의 삶을 인식하지 못하므로 삶 전체를 관통하는 컨셉 개념에서의 삶의 목적 따위는 없다. 팽이가 도는 이유는 채찍이 팽이를 때리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팽이에게 ‘왜 도니?’ 하고 물어서 안 된다. 그 답은 팽이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채찍이 때리니까 돌지.’ 하고 답할 수 있지만. 팽이 바깥에 있는 그 답은 팽이 자신의 것이 아니다. 팽이는 그 답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개나 돼지도 살아있긴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삶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존해 있는 것이다.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은 인간이 자유의지로 삶을 선택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부분을 바로 해명해야 한다. 왜 그것을 선택했는가 말이다. 왜 예수는, 왜 김구는, 왜 노무현은 편한 길로 가지 않고 하필이면 그 험한 길로 갔느냐 말이다. 떠밀려가지 않았다는, 휩쓸려가지 않았다는 의미를 전제로 한다. 왜 사느냐 하는 질문은 ‘당신 자신이 당신의 삶의 주인이다’는 명제를 전제로 한다. 바로 그 점을 해명해야 하는 것이다. ● 복수론의 답 - 무언가를 위하여 산다. (부모의 복수를 위해, 혹은 어렸을 때의 콤플렉스를 보상하기 위해) 이는 후천적 외부간섭론이라 할 수 있다. 종교가 선천적 외부동기론이라면 이는 후천적으로 바깥에서 동기가 주어진다. 이는 자신의 삶이 타자에 의해 조종된다는 점에서 주체적인 삶이라 볼 수 없다. ‘왜 사는가’는 왜 자신이 능동적, 적극적, 주체적으로 그러한 길(소크라테스의 길, 예수의 길, 노무현의 길)을 선택했느냐를 묻는다는 점에서 이런 너절한 복수론, 콤플렉스론은 참된 답이 될 수 없다. ‘위하여’는 정언명령이 아닌 가언명령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참된 답이 될 수 없다. ‘의하여’라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정언명령이 답이다. ● 유물론의 답 - 유물론자는 삶의 목적을 부정하고 상황논리로 대체한다. ‘적이 이렇게 하니까 나는 이렇게 대응한다’는 식이다. 추우니까 옷을 입고, 고프니까 먹는다는 식이다. 환경결정론이다. 또 비교우위론이라 할 수 있다. 주변 상황과의 비교에 의해 그 상황에서 즉자적으로 판단한다. 이 떡이 더 먹음직스러우므로 이걸 먹는다는 식이다. 죽는것보다 사는게 나으므로 삶을 선택한다. 이는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한 줄에 꿰어내는 일관성, 정체성을 부정한다. 이 질문의 목적이 인간의 존엄성 규명에 있을진대 그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노무현이 고향친구의 증언대로 ‘꼬마일 때부터 남의집 밥은 먹지 않아 버릇했기 때문에’, 세살버릇이 계속 가서 결국 그 험난한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었다는 필연성 의미에서의 ‘삶의 테마’를 부정한다. 유물론자들에게 인간의 삶은 동물의 생태와도 같은 자연현상에 불과하다. 인간이 이것과 저것 중에 나은 것을 계속 선택한 결과 살아진 것이다. 추운 것과 따뜻한 것 중에서 따뜻한 것을 선택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중에서 좋은 것을 고른다. 이런 행위를 계속 반복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살아졌다. 그렇다면 삶의 목적이고 동기고 없는 거다. 왜 살고 자시고 간에 없다. 원초적 아님. ### 종교가의 선천적 외부동기론, 쾌락론의 선천적 내부동기론이 한 세트가 되고 또 복수론의 후천적 외부간섭론, 유물론의 후천적 환경결정론이 한 세트가 된다. 이들은 인간의 주체적인 삶을 부정한다. ‘물이 왜 아래로 가는가’는 물 자신이 결정하는게 아니라 지구의 중력이 결정한다. 물이 아니라 지구에게 물어봐야 한다. ‘노예가 왜 일하는가’는 그 노예에게 일거리를 준 주인에게 물어봐야 한다. 무엇인가? 위 종교론, 쾌락론, 복수론, 유물론은 모두 ‘왜 사는가?’ 하는 질문에 답한 것이 아니라 노예처럼 답을 주변에 떠넘기고 있다. 천국에 가기 위해 산다? 이건 미래에 떠넘기는 수법이다. 길손이 묻는다. “여보시오. 노예씨는 왜 밭을 갈지요?” 노예가 아닌 주인에게 물어야 한다. 그래야 그 밭에 호박을 심으려는지 수박을 심으려는지 알 수 있다. 종교론, 쾌락론, 복수론, 유물론은 모두 대답을 주변에 떠넘기는 노예의 관점이다. 제 1원인을 찾아야 한다. 감기에 걸렸다. 왜 걸렸지? ‘손을 안씻었기 때문이지.’ ‘비를 맞았기 때문이지.’ ‘날씨가 춥기 때문이지.’ ‘운동부족 때문이지.’ 이런 너절하고 잡다한건 이유가 될 수 없다. 감기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적시해야 한다. 콕 찍어서 말해야 한다. 똑 부러지는 답을 내놓아야 한다. 위 네 가지 사이비한 답들은 감기 인플루엔자를 적시하여 정답을 말한 것이 아니다. 주변적인 이유, 2차적인 이유를 댄 것이며 그것은 왜 하필 그 사람이, 와 하필 그 장소에서, 왜 하필 그 시점에 감기에 걸렸는지를 정황적으로 방증할 뿐 감기 자체의 원인에 대한 정답은 아니다. 라디오에서 소리가 난다. ‘왜 소리가 나오지?’ ‘그야 라디오를 켰기 때문이지.’ ‘라디오에 밧데리가 있기 때문이지.’ ‘라디오가 국산이기 때문이지.(중국제는 소리도 제대로 안나온다구.)’ 이건 답이 아니다.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는 이유는 방송국에서 전파를 송출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근본 원인이다. 방송국을 찾아야 한다. 내 삶의 방송국은 무엇인가? 이걸 말해야 진짜다. 시계바늘이 돌아간다. 왜 돌아가지? 그 안에 태엽이 있고 누군가가 그 태엽을 감아줬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에너지가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그걸 말해야 진짜다. 동력원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돌아가는 시계바늘 입장에서 태엽감기에 해당하는 것, 라디오 입장에서 방송국에 해당하는 것은 ‘살다’에 있어서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태엽이 감아주었는가? 어떤 방송국에서 프로를 받았는가? ‘지평’이라는 개념. 나를 규정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다. 나의 몸통? 이런건 안쳐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7년 안에 대략 교체된다고 한다. 파골세포가 뼈를 분해한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깨끗하게 외부로 빠져나간다. 내 안의 배설물이 나의 일부가 아니듯이, 나의 세포나, 옷이나, 돈이나, 가족이나 이런건 내가 아니다. 나는 나의 주체적인 의사결정 단위, 가치판단 단위, 외부환경에 맞서는 대응의 1 단위다. 네살 때 처음 동네어귀까지 나와보았다. 그때 본 것이 내가 아는 우주의 크기였다. 그 우주는 지름 600미터의 동그라미로 된 바운더리다. 일곱살쯤 경주 남산 해목령에서 본 경주시내. ‘형 저기가 서울이야?’ 하고 물었을 때 ‘저 산 너머 너머 너머 어딘가에 서울이 있겠지’ 하고 생각했을 때 그 산에서 내려다 본 세계가 나의 세계 전부다. 그렇다. 나의 바운더리는 내 인식이 미치는 범위다. 내 위에 커다란 내가 하나 더 있다. 큰 나는 얼마간 너와 겹쳐 있다. 서로는 서로와 조금씩 겹쳐 있다. 더 큰 나가 있다. 고추가 매운 이유는 캡사이신이 있기 때문이고 내가 사는 이유는 더 큰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다. 지평은 새로운 단위의 세계를 발견함이다. 가족이나 공동체나 국가나 인류는 오히려 작다. 세계는 시공간을 넘나든다. 아담과 이브가 첫 씨앗을 뿌렸을 때 이미 인류 단위의 거대기획은 출범하고 있다. 세계의 존재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는 인류의 기획이다. 무엇인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여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너와 나의 생물학적 존재는 알지만 그 집단지능의 의미로운 존재는 깨닫지 못한다. 국가의 존재는 믿지만(국가권력과 충돌해보면 깨닫는다. 영장 나오면 실감한다.) 집단지능, 인류문명의 기획,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촉발된 거대기획,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다. 고추에 캡사이신이 있어서 고추가 맵듯이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여 있다. 고추는 캡사이신 때문에 맵고 인간은 거대기획 때문에 산다. 바로 그거다. 그것이 나의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이다. 나는 그 존재를 납득시키고자 한다. 세계는 실제로 있다. 네가 있고 내가 있듯이 있다. 라디오는 만져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방송국은 긴가민가 하여 믿을 수 없다면 곤란하다.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방송국은 있다. 신의 완전성은 있다. 세계는 있다. 더 높은 지평은 있다. 인류문명의 거대기획 있다.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시계바늘 돌아가듯이 살아서 째깎째깍 진도 나간다. 내 위에 내가 하나 더 있다. 큰 나로 부터 작은 나로 전해지는 것이 있다. 이어받는 것이 있다. 관통하는 것이 있다. 큰 나가 그 ‘삶’을 규격하고 작은 내가 오늘 ‘살다’를 해치운다. 두루마리 화장지가 펼쳐지듯이 삶의 감긴 태엽을 살다로 펼쳐낸다. 왜 사는가? 두루마리 화장지는 왜 펼쳐지는가? 감겼기 때문에 펼쳐진다. 감기와 펼치기는 대칭된다. 그 안에 일정한 공식이 있다. 오늘 하루의 ‘살다’가 펼쳐짐이라면 나의 인생을 관통하는, 인류 거대기획 가담은 감김이다. 감겼으면 펼친다. 삶이면 산다. 삶은 감김이고 살다는 펼침이다. 삶의 감김(예비함)이 존엄이다. 인간은 존엄하다. 왜 사는가? 종교가는 천국갈 목적으로 살고, 유물론자는 죽는것 보다 사는게 나으니까 살고, 쾌락론자는 좋아서 살고, 복수론자는 목적 때문에 산다. 이들은 임의로 통제할 수 있다. 종교가에게는 더 환상적인 천국 설계도를 보여주면 홀려서 따라온다. 유물론자는 죽음보다 못한 삶의 고통을 보여주면 포기한다. 쾌락론자는 병들고 힘없을 때 포기한다. 복수론자는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 허탈해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은 타자에 의해 조종되고 파괴된다. 그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진정한 것은 인류 단위의 거대기획에 가담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시절부터 면면히 이어가는 것이므로 흔들리지 않는다. ∑ |
비행기는 날고 메뚜기는 뛰고 자동차는 달린다. 왜? 비행기이고 메뚜기이고 자동차이니까...
하지만 날기 위한 기계를 만들고 이를 비행기로 뛰어다니는 곤충중 하나를 메뚜기라고 하고 달리는 기계를 보고 자동차라고
하기로 약속했다면.... (동사나 형용사를 통해 명사화 되어진다고 한다면)
(신에 의해서든 자연발생적이든 간에) 우리가 태어나 유한하게 존재(살아가고) 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삶이라고 정의 했다면
우리가 "사는 것"이 바로 "삶"이 되는 것이고 그것을 왜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게 된다.
삶이니까 산다는 논리는 이후의 길손과 노예의 이야기에서 왜 밭을 가는가에 대하여도
노예의 우답 "주인이 시키니까 갈지"와 별차이가 없는 "밭이니까 가는거지 논이면 심지"가 된다.
즉 거기에 왜? 무엇을 위해서? 밭을 가는지라는 근본적인 답은 여전히 남게 된다.
개인의 존재 인식에 대한 문제는 다른 여러가지 문제들과 같이 개인적 선택 혹은 신념 믿음의 문제가 아닐런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했듯이, 그 인류의 만남을 그 절실한 접선을 실천하고 싶습니다.
주먹구구가 아니라, 수준별, 단계별의 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조치, 그, 미학을 '실현'하고 싶을 뿐.
그렇다면, 스쳐가는 바람도 그저 아름다울뿐. 오클라호마의 들녘처럼.
http://www.youtube.com/watch?v=B2MycU_N634&NR=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