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마이너스와 플러스다. 건전지를 떠올려도 좋다.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한 세트다. 마이너스 가는데 플러스 간다. 언제나 마이너스가 앞서가고 플러스는 따른다. 세상은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가는 일방통행이다. 여기서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상부구조의 마이너스다. 쪼갤 수는 있어도 합칠 수는 없다. 만약 합치려면 특별한 방법을 써야 한다. 미리 시간과 장소를 약속해야 한다. 자연에서 자연스럽게 합치는 수는 없다. 남의 일을 방해할 수는 있어도 도울 수는 없다. 도우려면 미리 연락해서 장소와 시간을 정해야 한다. 상대방의 동작을 정지시켜야 한다. 의전절차가 필요하다. 자연스럽지 않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 돕자’고 말은 하지만 실패한다.
반면 남을 해치기는 쉽다. 해칠 때는 상대방의 사전허락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물교cargo cult의 예를 들 수 있다. 많은 백인 선교사들이 태평양 폴리네시아 섬들의 가난한 부족민을 도우려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바누아투 섬의 부족민들은 ‘존 프럼’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기독교의 횡포에 대항하는 자생적인 종교를 만들어냈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매우 많은데 대개 ‘하느님이 보내주는 화물을 가로채는’ 백인을 증오하는 교리가 있다. ‘부족민을 돕자’는 백인들의 노력은 많은 경우 오히려 그들을 해치는 결과로 된다. 백인이 성공적으로 부족민을 도와 자립시킨 예는 역사적으로 없다시피 하다. 만약 있다면 유일한 성공사례는 아마 한국이 될 것이다. 물론 생각있는 한국인들은 백인에게 고마워하지 않는다. 부족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기중심적 의사결정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이너스 원리-해치기는 쉬워도 돕기는 어려운-는 한국의 정치판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진보가 억압받는 노동자 농민을 돕고자 하나 그 약자들은 언제나 새누리당에 투표한다. 진보가 약자를 도우려 할수록 약자그룹 내부의 의사결정구조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남을 돕겠다는 플러스는 원래 잘 안 된다. 물론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원리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돕더라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거다. 그것은 자연법칙이며 법칙과 싸우려는 태도는 좋지 않다. 법칙은 일단 받아들이자. 남을 도우려면 먼저 뺏었다가 선착순으로 줄 세워서 나눠주는 권위주의 방법이 현장에서 먹히는 본질을 원리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진도 나가야 한다. 남을 돕는 데는 선의와 열정만으로는 부족하고 정교한 메커니즘을 구축해야 한다. 인도네시아 정글에서 오랑우탄을 연구한 비루테 갈디카스의 사례가 그러하다. 그녀는 부족민 특유의 의사결정구조를 존중했기에 족장의 지지를 얻어 부족민의 협조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전통을 존중하여 부족민의 체면을 세워주었기 때문이다. 흥부의 예를 들 수 있다. 그는 타고난 도움의 달인이었으나 정작 본인은 어쩔수 없는 민폐맨이었다. 돕고자 하나 결정적으로 가진 것이 없었다. 도우려면 먼저 가져야 하고 가지려면 뺏어야 한다는 딜레마다. 플러스는 가능하지만 그것은 마이너스를 한 다음에 가능하다. 먼저 빼앗은 다음에 남을 도울 수 있다. 어린이는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를 약탈한다. 도우려면 성장해야 하고, 성장하려면 일단 빼앗아야 한다. 자식은 부모의 등골을 빼놓고 시작한다. 놀부는 남을 도울 수 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이 있으니까. 흥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놀부가 되어야 한다는 딜레마다. 세상의 첫 번째 법칙은 쪼개기다. 쪼갠 다음 합친다.
자연법칙은 복제원리이며, 복제는 쪼개는 것이다. 분할할 뿐 합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자연에서 많은 합쳐지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배후에서 무언가 쪼개고 있다. 흥부 뒤에 놀부 있다. 놀부가 먼저다. 인간의 레이더에는 흥부만 포착된다. 흥부가 입자라면 놀부는 질이다. 입자는 작용반작용의 상대성에 의해 관측된다. 질은 절대성이므로 관측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 잘 관측되지 않는다.
전기회로라면 전구와 스위치가 있다. 전구는 잘 보이나 스위치는 감추어져 있다. 먼저 스위치를 장악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잘 보이는 전구 쪽으로 달려간다. 그러므로 실패한다. 먼저 배후를 살펴라.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을 이룬다는 ‘티끌모아 태산’식 사고는 실패한다. 물론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철을 모아 재활용하는 옃장수의 성공에 불과하다. 같은 조건에서 대결하면 백전백패다. 큰 것을 쪼개 작은 것을 얻어야 한다. 강변에는 모래가 모여 있다. 모래가 스스로 모여들었을까? 아니다. 모래는 산에서 떠내려온 것이다. 구체적인 에너지의 작용을 보라. 산이 깨져서 강에 모래가 쌓인 것이다. 마이너스다. 산이 깨지는 모습은 볼 수 없다. 모래가 몰리는 모습은 볼 수 있다. 큰 비가 내리는 날 강가에서 관찰할 수 있다. 상류에서 모래가 떠내려온다. 그러나 그 모래가 탄생하는 지점은 볼 수 없다. 바위가 쪼개져서 모래가 되는 장면을 볼 수 없다. 자연은 아기가 탄생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착각한다. 주방에서 면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보지 못한다. 짜장면에 그릇에 담겨져 있는 모양은 보여진다. 보이는 것에 주목하므로 우리는 세상을 잘못 안다. 의도를 가지고 몰래 주방을 훔쳐보아야 한다.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조사해야 한다. 장막을 걷고 아이가 탄생하는 장면을 지켜보아야 한다. 세상은 마이너스로 작동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자연의 법칙이다. 진보가 노동자 농민을 계몽하는 방법은 주방장이 면을 뽑지 않고 그릇에 담아주려는 것과 같아서 실패한다. 그것은 선교사가 부족민을 억압하는 방식과 정확히 같다. 선교사는 부족민을 예배당이라는 그릇에 담는다.
우리가 목도하는 세계는 원자가 집합된 세계다. 그러나 이는 편집된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과 같다. 배후의 연출자에게 당한다. 영화감독은 먼저 필름을 자른다. 마이너스다. 자른 다음 붙인다. 이는 플러스다. 우리는 감독이 편집하는 장면을 볼 수 없다. 조중동이 입맛대로 편집해놓은 거짓 기사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속는다. 당신이 무엇을 보든 속은 것이다. 분명히 의도를 가지고 장막 뒤를 파헤쳐 보아야 한다.
남자가 프로포즈 하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남자의 플러스다. 실패한다. 여자 입장에서 이 장면은 일생동안 무수히 상상해온 것이다. 인생 최고의 선물을 얼떨결에 받기는 싫은 것이다. 여자는 그 장면에서 자신이 예쁘게 보였는지, 혹시 몸에서 불쾌한 냄새는 나지 않았는지, 그 장소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등등 별걸 다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상처가 된다. 남자의 등에 분노의 비수가 날아온다. 남자의 플러스는 실패한다. 상대방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남자는 단지 여자의 방해자를 제거해줄 수 있을 뿐이다. 반대로 여자를 직접 도울 수는 없다. 만약 돕고자 한다면 사전에 완벽한 연출을 해야 한다. 서투른 연출은 끔찍한 트라우마를 선물할 뿐이다. 프로포즈를 하려면 사전에 눈치를 채게 해야 한다. 극장에 가기 전에 상상하는 기쁨을 먼저 선물해야 한다. 마이너스는 언제나 성공하고 플러스는 잘 연출했을 때 간혹 성공한다. 쉬운 길을 선택하라. 그것은 방해자의 제거다.
인간은 덧셈과 뺄셈을 쓰지만 자연에는 뺄셈의 시작과 끝만 있습니다. 이쪽에서 뺀 것이 저쪽에 더해집니다. 뺄셈이 먼저 가고 덧셈이 따라가며 인간은 뺄셈부분을 통제할 수 있고 덧셈부분은 통제할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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