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에서 예를 들어 사용된 다회에 관한 것은 제가 익숙한 부분이어서 예를 든 것이고, 원래 이 글은 다회에 관한 글을 쓰려고 했던 부분을 일부 인용하여 쓴 것임. 다 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요즘 시간상 동렬님의 구조론 총서9번 책 [창의하는 방법]을 읽고 있지 못해서 여기에 창의하는 방법에 관한 책소개와 더불어서 올리게 됩니다. 창의하는 방법은 곧 직관을 해야 하는 것이어서 아래글과도 맥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구조와 논리>
논리가 굳어 있는 어떤 틀이라면 그것은 죽어 있는 것이다.
논리가 발견되어 학문에 적용되는 지점은 논리의 생장점이 있다는 그 지점이다.
이 말은 논리의 구조가 있다는 의미다.
학문이 논리를 가질때, 이때는 논리의 틀을 만들어서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 틀이 널리 복제되면 서로 알아먹기 좋은 상태가 된다.
학문의 성장은 이 논리를 적용하는 틀이 보편화 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논리의 틀 안에 형식을 갖추었지만 내용이 부실한 경우는 많다.
이럴때 논리의 틀은 형식화 되어 버린다.
교육이 부실해지거나 학문이 성장하지 못할때는 논리의 틀이 형식화 되어가는 때이다.
새로운 틀이 필요해지는 시기는
기존의 논리의 틀이 변화해야할 시기이다.
구조...생장...논리성
여기저기 흩어져서 정렬되지 않는 파일들을 정리해 내는 것이다.
정리되지 않으면 쌓을 수가 없다. 질서가 없기 때문이다. 나열만 된다면 뭔가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구조라는 것은 입체적인 것이지 평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는 이성적 정리 구분 구획을 나누어 효율을 이끌어 내게 된다.
<생명 - 탄생의 구조>
생명이 탄생되는 완벽한 시공의 틈바구니가 있다.
생명은 그 완벽한 탄생의 구조를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직관으로 일이되는 방향에서 오는 영감을 느낄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는 방향 탄생의 방향...그 틈바구니를 기억하여 직관으로 아는 것.
그렇게 생명탄생이 일어나는 구조가 모든 생명에게 복제되어 있는 것.
이것이 DNA에 각인되어 있는 것.
결합.
이것이 사랑의 느낌으로 생명에게 각인되어 있는 것. 완전성.
구조는 요철의 맞물림이자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맞물림이기도 하며 대칭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두 입체적으로 느껴지고 인식된다.
이는 곧 밀도를 느끼는 것이다. 입체적인 것은 밀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와 가까울수록 밀도가 높아진다. 압력이 사방에서, 시공간에서 더 조밀하게 가해지는 것이다. 다도가 근현대에 영향을 미친 이유는 축적에 의한 시공간의 밀도가 조밀해졌기 때문이다. 다도도 여러가지 정보를 취합하여 한데 집어 넣은 것이다. 밀도가 조밀해졌다. 꽉찬 에너지 상태가 된 것이다. 요즘 시대에 획기적인 기술의 진보가 있는 이유도 점점 조밀해지기 때문이다. 한데로 압력이 모아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술이라고 한다해서 정신성과 무관하다고 할수없다. 정신성이 다양하게 연결되며 한데 모아져 축적이 이루어지자 밀도가 높아져 아이디어들이 튀어 나올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미의 순간적 체험.
모든 직관은 이렇게 일어난다.
<미(완전성)와 논리성의 구조>
예로서 이 사진의 벽화를 나름대로 풀어보자면...
저 삼각형 구도는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고 가운데 벽화로 소실점을 모으고 있어서 흩어지지 않는 것. 그러니 저 구도는 평면적 구도가 아니고 입체적 삼각형 구도인것. 보는 자의 시선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입체적인 구도인것. 이미 저 벽화에는 입체적 삼각형구도가 덧쒸워져 있는 것. 미(완전성)는 직관이나 그것을 구현하면 그 자체로 논리인 것이며 과학성이 반영되는 것. 그리고 이 전체가 하나로 소실점에 모여 느껴지는 것이 다시 미학이 되는 것.
그러니 이건 미를 직관으로 먼저 본 자가 구현한 작품을, 다시 제 삼자가 본 시선(미)까지 개입이 되어 입체적으로 나타나는 것. 보는 제 삼자에게 다시 삼각형 구도의 미가 복제 됨. 그래서 동시성으로 미를 느끼는 것임. 비록 시간차가 천년이든 이천년이든 이것은 동시성인 것임. 예술에 감흥을 받고 영감을 받는 이유이기도 함. 예술마다 작품마다 모두 그것이 있음. 미가 완전한 이유는 그 구조가 자기안에 복제되어 느껴지기 때문. 완전성이면 통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 이것은 이미 통하는 그 자체로 증명되는 것임. 단지 통한 것을 어떻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느냐가 창의성인 것.
저 사진 벽화를 예로 들어서 설명했음. 무엇이든 자기에게서 뭔가가 나오려면 무엇으로부터( 세상 모든 것) 영감(미의 복제..완전성..)을 받고, 그 다음 자신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의 뼈대를 세우게 됨. 그리고 직관으로 방향을 찾아내는 것임. 나머지는 하부구조들의 사용. 숙련된 붓질 표현 혹은 익숙한 숫자들. 혹은 글쓰기 혹은 기술...(이건 모두 평소에 닦아 놓아야 하는 것들)등등. 이러한 전체가 이미 논리성의 반영인 것. 논리가 어느 특정 분야에 특화된 것이 아니고, 논리성이 드러나는 것임. 보이지 않다가 무엇인가가 구체적으로 구현될때 드러나는 것임. 그러므로 논리성은 시작부터 끝까지 일 사이클이 완결되었을때 제대로 보이는 것이고 느껴지는 것임. 미가 현실에 드러날때...그래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임.
현재 학문에서 사용하는 논문방식은 서로의 약속일 뿐인 것임. 기준이 있어야 대화가 되므로. 그리고 시간을 무한정 늘리기가 애매하므로 지면에 특정하게 제한시켜진 것임. 그리고 솔직히 논문이 무한정 길어야 할 이유도 없음. 어떤 개념에 대하여 방향을 잡으면 그 다음은 계속 풀어 나가면 되는 것이기 때문임. 단지 개념과 방식에 대한 것을 압축을 시킨 것이고 또 전달의 목적이 강하기 때문에 규정이 있는 것임. 거기서 표현한 한 단어의 주석이나 인용이 오히려 논문 이해하는 것보다 더 방대할때가 많음. 그렇다면 그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방대한 자료를 어느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되는 것. 논문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다듬어 압축시킨 것이므로..이 압축된 개념이 실효성을 보이게 되는 것이므로...이 압축을 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다시 자신의 생각의 범위로 들어온 것과 생각한 것들에 대한 그 전체를 압축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대체로 직관을 사용하여 구도를 잡게되는 것임. 논리성이 복제되는 것임. 논문이란 틀에 다시 논리성이 복제되어 겹쳐지는 것임. 이 논리성의 겹쳐짐이 약하면 그 논문은 별볼일 없어짐. 논리성이 약하다는 것은 직관력이 약하거나 직관력을 잘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 연결고리들이 약하다는 것은 직관으로 그 부분들의 문제를 잘 짚어내지 못했다는 것. 결론은 시간의 투여가 적었다는 것.
<철학이 되는 구조>
철학과 철학 아닌 것의 차이가 생기는 이유...
이 말이 좀 그렇다면, 철학을 하는 것과 철학이 안되게 하는 것의 차이, 철학을 가진 것과 철학을 가지지 못하는 것의 차이라고 했을 때.
철학을 한다는 것은 시간의 양을 절대적으로 자기에게 투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같은 시간의 양을 두 사람이 자기에게 투여했다고 치자. 그런데도 차이가 생긴다면 이건 상대적으로 질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시간의 양은 절대적으로 같으나 상대적으로 시간의 활용과 그 사용됨이 질적으로 다르다면 이미 여기서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다시 같은 시간을 투여해도 철학의 질이 달라진다면 이건 다시 절대적으로 직관력의 차이 그리고 생각의 차이이다.
논리성이 약하게 드러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밀어붙일만한 그 연결고리들을 매끄럽게 다듬어 내는 직관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의미이다. 직관이 답을 찾아낼때까지 계속하여 머금고 있어야 하는 그 시간의 투여가 적었다는 반증도 된다. 충분하게 다듬어지지 않아서 논리성이 약해진 것이다. 이리따지면 철학이 되는 것과 철학이 안되게 되는 경우는 시간의 비례인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자기 시간을 충분하게 확보하고 시간을 투여하면 철학이 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시간을 쫒겨서 살게되므로 그 시간을 자기안에서 늘리는 수밖에 없다. 절대적으로 같은 시간이지만 상대적으로 시간을 늘려 사용해야 하는데, 이는 자신안에서 머금고 있는 수 밖에 없다. 계속하여 풀리지 않는 명제들이나 혹은 어떠한 것들에 대하여 머금고 사유하는 것이다. 늘상으로.. 이것저것 다하지만 한쪽에서는 계속하여 머금어진 그 생각에 대해서 직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방향을 찾게되면 확신이 서므로 생각이 계속하여 일어나서 답을 찾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