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성의 철학 존재는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은 현재진행이다. 이는 개체가 불완전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되어야 영화다. 필름은 감광제를 입힌 폴리에스테르에 불과하다. 필름은 관객과 만났을 때 영화가 된다. 진흙의 불완전함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 진흙이 가마에서 도자기로 구워지면 완전한가? 아니다. 찻잔은 그 잔에 차를 따라 마셔야 비로소 완전하다. 제 자리에 머무르면 곤란하고, 계속 다음 단계로 연결되어 가야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몸은 인간을 저장하는 용기에 불과하고 마음은 깔려있는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몸도 완전하지 않고 마음도 완전하지 않다. 인간은 세상과의 상호작용으로 완성된다. 그 전까지는 하나의 가능성 뿐이다. 꽃은 피어야 꽃이고, 춤은 추어야 춤이고, 노래는 불러야 노래고, 돈은 돌아야 돈이다. 서로는 만나서 마침내 완성되어야 진정하다. 철학은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진정한 만남의 장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철학의 목적은 군자가 되는 것이다. 군자는 내면의 인격을 완성한 사람이 아니라 사교클럽에 든 사람이다. 학이시습지면 군자가 아니고 유붕이 자원방래하여 만나야 군자다. 인간은 불완전에 서서 완전성을 지향한다. 그 완전은 고착된 완전이 아니라 동적인 완전이어야 한다. 살아서 호흡하는 완전이어야 한다. 도자기로 딱딱하게 구워진 완전이 아니라 찾아온 손님을 반기며 그 잔에 차를 따라 마시는 부드러운 만남의 완전이어야 한다.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완전성이다. 인간은 언제라도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돈을 벌거나, 명성을 떨치거나, 행복을 누리거나 간에 그것은 도자기가 딱딱하게 구워진 완전에 불과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인간은 완전을 지향하며 그 완전은 정적인 완전이 아니라 동적인 완전이어야 한다. 공간의 완전이 아니라 시간의 완전이어야 한다. 춤 추고 노래하고 꽃 피우고 향기나는 완전이어야 한다. 인간은 악을 선하게 하고, 약을 강하게 하고, 빈을 부하게 하고, 무를 유하게 하여 완전성에 이를 때 그 노래하고, 춤 추고, 꽃 피우고, 향기나는 상호작용구조 안에서 대칭을 이루어 의사결정을 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다. 비로소 그것을 그것이게 할 수 있다. 꽃을 꽃이게 할 수 있다. 영화를 영화이게 할 수 있다. 보석을 반짝이게 할 수 있다. 진리를 알아보게 할 수 있다. 사람을 사랑하게 할 수 있다. 모두가 하나되게 할 수 있다. 인간은 내적으로 모순된 존재이며, 오직 바깥과 상호작용하여 세력을 이루고 그 세력의 성장과, 그 성장과정에서의 에너지 순환을 통해서만 완전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방향은 정靜에 없고 동動에 있다. 완전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순환구조 안에서의 부단한 호흡이다. 이런 것은 훈련하여 직관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이 보석이 완벽하지 않아?’ 하면 ‘천만에. 미인의 가슴에서 빛나야 완전한 거야’ 이게 1초만에 나와야 한다. 정적인 완전이 아니라 동적인 완전, 멈춘 완전이 아니라 성장하는 완전, 고립된 완전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완전이어야 한다. 깨달음도 같다. 이 개념을 훈련하여 자기것으로 삼아야 한다. 씨앗은 완전하나 그것은 정적인 완전이다. 그 씨앗에서 꽃이 피어나야 하고 가인이 그 꽃을 반겨야 하고, 그 광경을 제 3자가 보고 한 수의 시를 남겨야 한다. 이렇게 계속 뻗어나가야 한다. 세상의 끝까지 가야 한다. 철학은 동기를 부여한다. 동기는 마음을 이끄는 에너지다. 인간의 동기는 상호작용에 있어서의 의사결정이다. 먼저 환경과 상호작용하기를 원하고 다음 자신이 능동적으로 의사결정하기를 원한다. 다섯가지로 나눠진다.
존엄은 상호작용의 레벨을 올린다.
자유는 의사결정의 권한을 얻는다.
사랑은 하나로 통일한다.
성취는 남아서 단순화 된다.
행복은 반응하여 되돌린다. 존엄과, 자유와, 사랑과, 성취와, 행복은 별개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의 임무가 진행되는 각 단계다. 그러므로 이 순서를 밟지 않은 행복은 가짜다. 마약에 취한 자의 행복은 성취가 없으므로 가짜다. 증오에 기초한 성취는 사랑이 없으므로 가짜다. 억압된 상태의 사랑은 자유가 없으므로 가짜다. 존엄하지 않은 자유는 당연히 가짜다. 고립된 존엄은 없기 때문이다. 존엄하지 않은 양아치의 자유는 가짜다. 긴장이 풀린 사람의 한가한 자유는 가짜다. 사랑한다면서 상대방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가짜다. 강자가 약자를 차별하고 배제한 상태에서의 성취는 가짜다. 성취가 없는 정신병자의 행복은 진짜가 아니다. 꿈 속에서의 행복은 진짜가 아니다. 고립을 극복하고 의사결정의 중심에 서는 존엄, 존엄을 갖춘 자유, 자유를 주는 사랑,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한 승리, 성취한 결과로의 행복만이 진실하다. 이들을 연동시켜 한 줄에 꿰는 것이 철학이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대승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 악기가 제 소리를 내려면, 자기 안의 모든 현들을 골고루 울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세계로 나가서 자기 밖의 모든 악기와 협주해야 한다. 당신 안에 무엇이 있든, 당신이 무엇을 얻었든, 무엇을 가졌든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당신이 세상의 정상과 만나지 못했다면 실패다. 역사의 편에 서지 않는 역주행의 행복은 없다. 보수주의자의 행복은 없다. 돼지의 행복은 없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세상과 협연하지 않는 자기만족은 소리가 나지 않는 악기와 같다. 지하에 묻혀 있는 금과 같다. 평범한 강변의 돌과 평범한 운석의 차이는 매우 크다.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의 일 사이클을 완성시켰을 때만 진정으로 완전하다. 인간은 그 완전을 바란다. 차는 달려야 하고, 역사는 진보해야 하고, 악기는 연주해야 하고, 인간은 만나야 한다. 만나서 세상의 중심에 서야 하고, 거기서 임무를 받아 능동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현해야 한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철학이 있는게 아니라 한가지 진정한 철학의 다양한 연주가 있을 뿐이다. 철학의 목적은 군자가 되는 것이다. 군자는 봉건시대의 지배자 개념이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작용 안에서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을 실현하는 사람이다. 나의 의도를 배제하고 환경의 호흡을 끌어내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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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복수로 써놓고 뒤에 따라오는 동사는 단수로 씁니다. 형태는 복수이나 실제로는 단수취급을 합니다.
물리학 physics
윤리학 ethics
통계학 statistics
수학 mathematics 등
원래 철학이나 신학이나 수학이나 다 하난데 사람들이 냅다 나누어 놓았습니다.
그러고 이제 와서 통합하려고 듭니다.
원래 하나인 것을........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 늑골 몇개.... 등으로 되어 있다고 몸이 나뉜 것은 아니겠지요.
하나로 꿸 수 있어야 제대로된 학문이라고라....
철학,,,,,나의 철학은,,,,생각은,,,,발상은,,,,,,감사,,,,
...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