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네티즌들은 스스로 규정하기를 합리적이고 차분하며 논리적이라고 하더라. 그렇다면 비합리적이고 들떠 있으며 비논리적인 집단은 누구인가? 보나마나 바다 건너 불편한 이웃 한국일 터이다. 일본인들의 차분함은 거품경제의 붕괴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30년 전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의 일본은 어떠했을까? ‘그때는 백주대낮에 폭력단이 총격전을 벌이고, 학급붕괴가 일어나서 책가방에 칼 두 자루씩은 다들 넣고 다녔지. 굉장했다니까. 다들 날라다녔어!’ 웹사이트에서 읽은 일본인들의 이야기다. 아뿔싸! 그렇다면 한국의 20년 후 모습도 지금의 일본처럼 될 것인가? 어쨌든 다른 일본인이 저 대화를 들었다면 한 마디 거들었을 거다. ‘60년대 전공투 시절을 모르는군. 그때는 진짜로 날라다녔어.’ 한국이라면 어떨까?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80년대가 있다. 전공투 찜쪄먹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그때 그시절을 알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그런데 필자의 이런 감회를 어떤 중국인 할아버지가 들었다면? ‘말을 말어. 아무래도 내가 홍군의 대장정 이야기를 해줘야겠네. 루딩교의 혈전이라고 들어나 봤나? 문혁 때도 정말 대단했지. 싹 쓸었다니까. 너희가 그때 그시절 화끈했던 중국을 알아?’ 철학은 시대의 반영이다. 법륜스님의 너절한 강의가 인기를 끌고, 강신주의 시시한 잡담이 화제거리가 된다. 그렇다. 우리는 이런 시대를 살고 있다. 지나간 시대는 격동의 세기였다. 과학에서의 발견과 발명이 시대의 큰 변화를 낳고, 큰 변화가 큰 사건을 낳고, 큰 사건이 큰 철학을 낳는다. 20세기는 진보도 성큼성큼 큰 걸음이었고, 사건도 난리 터지는 대사건이었고 철학자도 큰 목청을 가졌었다. 지금은 다들 소심해져서 아기나 얼르며 울룰루까꿍 한다. 심지어 그걸 철학이라고 한다. 그렇다! 철학이 죽은 시대를 우리는 산다. 슬프다! 누가 큰 목소리로 말해줘야 한다. ‘그건 철학이 아냐. 그건 너희 시대의 실패를 반영하는 슬픈 자화상에 지나지 않아. 현실이 망가졌다고 넋마저 빼놓고 다니진 말아.’ 이런 일갈이 필요하다. 가능한가? 가능하다. 새로운 철학의 자원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스마트 시대다. 계절이 바뀌면 일기예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시대가 바뀌면 누군가는 새로운 진보의 방향을 말해줘야 한다. ### 근대과학의 역사는 지구중심적 사고를 극복해가는 역사다. 천동설이 깨졌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 은하와, 우리 태양계와, 우리 지구가 우주 가운데의 특별한 한 지점이 아닐까 하고 기대를 걸었다. 천체를 관측하면 관측할수록 그러한 기대는 빗나갔다. 지구는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며, 태양계는 은하계의 중심이 아니며, 우리 은하계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우리는 한사코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는 그 어떠한 특징도 없이 확률의 산더미에 깔려 신음하는 불쌍한 존재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만큼 불안해한다. 변방이라서 기준이 없다. 국가에 왕이 없어 불안하고 집안에 가장이 없어 불안하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자. 아기는 요람을 흔들어주어야 편안히 잠을 이룬다. 고요하면 오히려 두렵다. 아기가 깔깔대며 좋아하는 소리는 창 밖에 비 오는 소리나 비닐 구기는 소리와 같은 백색소음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그것이 소음임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편안히 잠에 빠진다. 고요하면 오히려 마음은 불안하고 움직이면 오히려 마음은 고요하다는 의사결정의 역설이다. 의사결정으로 봐야 한다. 우리는 심장이 쿵쿵 뛰기에 오히려 편안하고, 세그웨이는 자이로스코프가 팽팽 돌기에 오히려 편안하다. 고요하게 가만있는 것은 살짝 건드려도 흩어지지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탄탄하다. 계절이 변화하고 바람이 불어오기에 오히려 순탄하다. 흐름을 타고 에너지를 싣기에 오히려 태산처럼 의연하다. 지구가 중심이라는 사고는 시끄럽게 돌아가는 판을 고요하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와 같다. 그러나 진정으로 말하면 약간은 시끄러워야 오히려 편안하지 않은가? 의사결정으로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선 긋기 심리다.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양파껍질을 벗기면 또다른 양파가 등장한다. 선을 딱 그어놓고 이 한도 이상은 서로 건드리지 말자는 묵시적 약속이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자기 역할에나 충실하자는 거다. 너희는 고래먹고 우리는 개먹고 누구는 거위 간 빼먹고. 군은 군다이, 신은 신다이, 민은 민다이 각자 자기 맡은 역할에나 충실하자는 거다. 학생은 데모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자는 거다. 노동자는 파업하지 말고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거다. 그러면 세상이 조용하지 않겠는가다. 과연 그럴까? 그렇게 조용하면 오히려 두렵지 않을까? 기계가 삐꺽삐꺽 돌아가는 소리가 나야 오히려 편안하지 않은가? 데모하고 파업해야 자연스럽지 않나?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면 더욱 자기 자신이 판단의 중심이다. 내가 의사결정의 중심이다. 내가 결정할테니 너는 건들지 말라. 이건 소승적이다. 대승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계가 중심이어야 한다. 중심은 역동적인 에너지의 중심이어야 한다. 나는 변방이어야 한다. 그래야 변방에서 중심으로 나아가는 나의 발걸음이 편안하다. 내가 중심이면 오히려 사방으로부터 침략받지 않을까 불안하다. 내가 중심이라는 생각은 나의 바깥영역을 포기하는 즉 판을 고요하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는 스스로 금을 긋고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 조중동이 지식인은 비판과 견제만 하라는 식이다. 좌파 지식인이 집권을 포기하고 비판과 풍자만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는 것과 같다. 모든 자기중심적 사고의 이면에는 선긋기 심리, 판을 조용하게 만들려는 의사결정 회피심리가 잠재해 있다. 아기는 자라는게 중심이고, 악기는 연주하는게 중심이고, 자전거는 달려야 중심을 잡고, 비행기는 날아야 중심을 잡고, 수영선수는 헤엄을 쳐야 중심을 잡는다. 진정한 중심은 정에 없고 동에 있다. 중심은 조용한데 없고 시끄러운데 있다. 중심은 담쌓기에 없고 그 담을 허무는데 있다. 중심은 변방에서 중앙으로 치고나가는 가속도에 있고 정작 그 중심에는 중심이 없다. 중국에 암것도 없다. 전자렌지를 돌려도 요리를 가운데에 놓으면 냉동만두가 잘 녹지 않는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장소야말로 가장 특징적인 장소다. 씨 뿌리기에 적당하고 사람 키우기 적당하고 일 벌이기 적당하다. ### 돌아가는 팽이의 가장 적게 움직이는 부분은 가운데 중심부다. 자기중심적 사고, 소승적 사고는 의사결정을 회피 심리다. '내가 가랴? 니가 와라' 이거다. 칸을 가르고 차별하는 심리도 같다. 모든 비철학적 태도에는 의사결정을 두려워 하는 심리가 자리하고 있다. 포지션을 고정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가장 적게 움직이는 자리가 가장 불안한 자리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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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소승은 2천년 넘게 까이는구려. ㅎㅎㅎ
그나저나 마음의 역설만 알아도 한소식 하겠소.
아기가 백색소음하에서 자는 것은 단순한 조건반사입니다.아기들은 원래 시끄러운 곳에서 태어났습니다.엄마뱃속에서...
어른들도 아주 조용한 곳은 안 좋습니다.
이것참...보기에 따라선 자기를 변방으로 여기는 것이 의사결정을 회피하는 소승일 수도...
자기를 중심이다 변방이다를 보는 관점이 소승-대승을 가리는게 아니라 '자기'라는 생각을 한다는게 소승일겁니다 수신은 소승이고 평천하는 대승이지요 대승에서보면 연역이고 소승에서보면 귀납이구..여하튼 지나치게 소승을 까는 것도 결국 또다른 소승이 될 수도
보기에 따라 달라지면 구조론이 아닙니다.
본 글의 중핵은 자연공간의 물질적 한가운데가 아니라
의사결정의 중심으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가운데로 논하면 인체의 가운데는 배꼽입니다.
과연 배꼽이 인체의 중심이냐? 운동의 중심은 단전이나 회음부이고
의사결정의 중심은 뇌입니다.
멈춰 있는 배는 부피의 가운데가 중심이지만
달리는 사람의 중심은 발끝과 대지가 만나는 지점입니다.
우완으로 던지는 투수라면 왼쪽 발끝이 중심이죠.
상대적 관점도 있고 절대적 관점도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보면 상대적이고 절대적으로 보면 절대적입니다.
자기 집에서는 상대어로 해도 되지만 전쟁터에서는 절대어로 해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3시방향의 적을 공격하라고 해야지 오른쪽의 적을 공격하라고 하면 안 됩니다.
소승을 까는 것도 소승이라고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하더라도 구조론을 알고 말해야 합니다.
상대적 관점은 있어도 절대적 관점은 없습니다(굳이 님과의 차이를 말한다면 저에겐 절대란 없다는 뜻입니다)
전쟁터의 절대어는 절대어라기보다는 한 층 높은 상부구조의 상대어입니다(하부구조에서는 절대어로 보입니다만)
3시방향? 적을 빙 원으로 둘러싸서 공격하고 있는데 어디가 3시방향입니까?동서남북으로,한 층 더 높은 상대어를 쓰는거죠.
소실점은 말 그대로 소실되는 곳이죠.딱 여기야 하고 찍으면 뻥인거죠.근사치로 '여기인 듯' '여길 걸'하는거죠
소실점을 깨달을순 있어도 찍을 순 없는겁니다(그래서 제가 성철은 뻥이라고 하는겁니다.경허라면 몰라도..)